지난 22일 정장선 평택시장이 집무실에서 CBS 취재진과 인터뷰를 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평택시청 제공전·현직 미국 대통령들이 주목한 도시다. 육·해·공군을 거느린 캠프 험프리스와 첨단산업의 근간인 세계 최대 반도체 공장이 위치한 곳. 경기도 평택시다.
"평택에는 '세계 최대' 타이틀이 붙은 시설들이 여럿 있어요. 동북아시아의 눈인 미군 총괄기지와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이 대표적이죠. 미국 대통령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합니다." 재선에 성공한 정장선(더불어민주당·64) 평택시장이 자신의 고향이 "세계가 주목하는 글로벌 대도시로 거듭나고 있다"고 자부하며 한 말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삼성 평택공장이다. '저걸 미국에 지었다면…'이라며 부러워했다고 한다. 지난달 조 바이든 대통령도 이곳에서 '반도체 상생'을 선언했다.
평택이 한·미 군사혈맹에 이어 기술동맹을 상징하는 도시로 급부상한 셈이다.
3선의 중진 국회의원 출신인 정 시장은 평택이 미군 주둔지라는 이미지를 벗고 미래 첨단산업 메카로 탈바꿈하는 데 몰두해 왔다. 당 사무총장 등 중앙정치 무대에서 의정활동을 하면서도 지역의 새로운 먹을거리를 찾는 데 주력한 것.
대표적인 게 미군이전평택지원법 제정이다. 용산 미군기지의 팽성읍 확대 이전이 확정(2004년)돼 지역사회에 거센 반발이 일었지만, 이를 '기회'로 바꾼 결정적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독대까지 했어요. 노무현 대통령이 미안하다고 사과했죠. 미군기지를 또 보내게 됐다고요. 그래서 부탁한 게 적어도 지역이 자립은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국가안보를 위한 희생에 대해 정당한 보상을 요구한 것인데, 그렇게 따낸 지역개발 예산만 18조 9천억 원에 이른다는 게 평택시의 추산이다.
이는 삼성전자 평택캠퍼스를 포함한 430만평의 매머드급 산단과 고덕국제신도시, 브레인시티, 수소특화단지 등 평택의 백년대계를 위한 대규모 시책사업들의 주요 재원으로 쓰이고 있다.
인터뷰에서 6·1 지방선거 당선 소감과 시정 계획 등을 얘기하고 있는 정 시장의 모습. 평택시청 제공2년 전 50만을 넘어선 평택시 인구는 현재 등록 외국인을 포함해 60만 명에 육박한다. 이대로라면 인구 100만 '평택특례시'도 머지않았다.
지난 22일 정 시장은 시청 집무실에서 CBS와 인터뷰를 갖고 "다음 시장이 더 잘 하게 판을 깔겠다"며 "도시 덩치에 맞는 사업들이 골격을 갖추도록 시정역량을 집중하겠다"고 힘을 줬다.
'반도체특구' 중심 도시팽창…기반시설 확충도
첫째는 반도체특구 조성이다. 4차 산업혁명 선도 분야이자 국가 안보 자산인 첨단산단을 조성함으로써 예비 특례시로서의 자족기능을 높이겠다는 취지다.
핵심은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한 반도체 생산라인 구축이다. 자신이 의원 시절 제정에 앞장섰던 법률을 근거로 5천억 원 넘는 산단 기반시설 설치비 등을 확보한 상태다.
정 시장은 "2006년 9월 평택 고덕국제화계획지구 지정 이후 유치 작업을 시작해 2012년 고덕산단 분양계약을 맺으면서 삼성전자의 입주가 확정됐었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내 2라인 전경. 삼성전자 제공이런 과정을 거쳐 2015년 첫 삽을 뜬 삼성전자 평택공장 전체 부지는 축구장 400개(289만㎡)와 맞먹는다. 총 6개 공장 중 2개 라인이 가동 중으로, 올 하반기 3공장이 완공 예정이다.
오는 2025년 준공 목표인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특화단지 건립도 추진 중으로, 수원-화성-평택-용인 등을 아우르는 정부의 K-반도체 벨트 중심으로 거듭날 전망이다.
그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만 지난해 시에 낸 세금이 약 1600억 원, 총 세입의 26%인데 공장이 모두 들어서는 2026년쯤엔 4천억 원, 35%를 차지 할 것으로 추산된다"고 내다봤다.
반도체 산단에 기반해 고덕국제신도시 개발이 순차적으로 이뤄지면, 신도시 배후 주거단지 조성 등으로 15만 명 가까운 인구가 늘어날 것으로 관측된다.
지난해 7월 평택시와 카이스트, 삼성전자가 '반도체 인력양성 및 산학협력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평택시청 제공이와 관련해 정 시장은 "지난해 유치 확정된 카이스트 평택캠퍼스(2024년 준공)와 고덕국제학교(2026년 개교) 설립 등을 마무리하면 더 매력적인 주거조건을 갖출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어 "반도체 산단을 지역의 신성장 동력으로 삼아 주변에는 인구 증가에 맞춘 교육, 의료, 문화, 체육 시설 등 생활 인프라를 넉넉하게 확대하는 게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가스 관문 기반 활용 '수소복합단지' 박차
다음은 수소산업이다. 대형 액화천연가스(LNG) 저장고를 갖춘 가스 수출입 관문 도시로서 기존 배관시설을 활용해 수소를 생산·보급하는 '수소복합단지'를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정 시장은 "처음 수소 얘기 꺼냈다가 폭탄 들여온다고 주민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다"며 "미래 청정에너지의 비전과 지역이 최적지임을 내세워 반대여론을 극복했다"고 회고했다.
정 시장이 평택항 인근의 수소복합단지 사업현장을 방문하고 있는 모습이다. 평택시청 제공그가 주목한 건 지역에 운영 중인 LNG 시설이다. 수소를 생산·유통하려면 액화과정이 필수인데, 이 시설에서 버려지는 냉열을 이용하면 효율을 높이면서 비용까지 절감할 수 있어서다.
그는 "LNG 냉열로 저장과 운반에 용이한 액체수소 제조를 상용화하고, 기존 배관망으로는 평택을 비롯한 전국에 수소연료를 공급하는 전진기지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앞서 정 시장은 2019년 정부가 파리기후변화협약에 따라 '2050 탄소중립'을 선언하자 수소자동차 보급과 수소충전소 건립을 시작으로 수소경제 활성화에 시동을 걸었다.
더욱이 에너지원 수출입 통로인 평택항 일대에는 축구장 50개 면적과 맞먹는 37만㎡의 수소특화단지 사업이 순항 중이다.
평택 수소생산기지 조감도. 평택시청 제공한국가스공사가 수소가스·액화수소 생산과 이산화탄소 포집, 액화탄산 제조 시설을 짓는가 하면 한국서부발전은 수소연료전지 발전에 주력한다. 하루 수소생산 목표치는 37톤 이상이다.
이와 연계해 수소항만에 대한 청사진도 그렸다. 하역장비와 운송트럭, 선박 등 항만 관련 모든 동력을 수소에너지로 바꿔 이른바 '친환경 그린항만'을 건설하겠다는 전략이다.
정 시장은 "액화수소를 만드는 최적지로서 이르면 올 하반기 국토교통부의 수소도시로 지정될 예정이다"라며 "작년엔 15개 업체·기관과 6천억 원 규모의 투자 유치도 마친 상태"라고 했다.
또 "자동차클러스터 등 연관 산업들도 완료되면 생산부터 소비까지 수소경제의 중심지가 될 수 있다"며 "산업구조 고도화로 평택이 제2의 도약을 하게 될 것"이라고 비전을 제시했다.
치우침 없는 도시 발전…'거미줄 교통망' 구축 주력
급격한 도시 팽창에 따른 불균형 문제에 대한 고민도 빼놓지 않았다.
"개발업자 시각이 아닌 사람에 대한 배려가 우선"이라며 "치우침 없이 친환경, 인간 중심의 살기 좋은 스마트도시로 발전시켜야 된다"는 게 도시계획에 대한 그의 확고한 신념이다.
그러면서 균형발전의 최대 과제로 심각한 교통난 해소를 꼽았다. 지역 안팎을 파고드는 노선 연장으로 구도심의 활기를 되찾고, 대중교통을 대폭 늘려 삶의 조건을 개선하겠다는 것이다.
정 시장은 "교통망은 도시공간 재설계의 주요 요소"라며 "대표 공약사업인 남부권역의 GTX-A와 C노선의 평택지제역 연장과 수원발 KTX 직결 등을 반드시 실천하겠다"고 역설했다.
평택역 복합문화광장 조성도. 평택시청 제공또한 속칭 '삼리'로 불리는 집창촌 폐쇄를 매듭짓고 평택역복합문화광장 조성과 원평동 재개발, 도시재생사업 등을 지속해 낙후된 구도심을 되살리겠다는 계획이다.
미군기지 주변 고도제한에 대해서는 "미군 측과 긴밀하게 협조해 완화조치를 이끌어내겠다"며 "신장동과 송탄동 등의 침체된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각오다.
특히 발전 속도가 가장 더딘 서부지역에는 수소복합지구와 더불어 안중역세권·평택호관광단지·화양·만호지구 개발을 병행해 도시 발전의 균형을 잡겠다는 입장이다.
이와 함께 그는 "버스를 몇 백대 늘려서라도 시내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하겠다"며 "그간 환경 개선에 성과를 낸 것처럼 생활환경 전반을 선진화해 질적 성장을 이루겠다"고 다짐했다.
'외유내강'의 거물급 시장…"열린 시정으로 성과 지속"
애초 이번 지방선거는 고전이 예상됐다. 정권교체에 이은 대통령 취임식 직후였던 데다, 상대 후보가 윤석열 마케팅을 앞세운 가운데 평택에서 한미 정상회담까지 열린 터였다.
그럼에도 정 시장은 유세현장에서 많은 시민들이 손을 흔들며 호응해주는 모습을 보며 "지역에서 만큼은 바닥민심이 아직 나를 버리지 않았다고 확신했다"고 돌이켰다.
이를 두고는 인물론과 시정성과로 '바람'을 극복했다는 해석이다. 경기도지사와 광역·기초의원 선거 득표수에서 국민의힘에 밀리고도 민주당 시장이 나온 지역은 평택과 안성 두 곳뿐이다.
지난해 11월 '코로나19 극복 작은음악회'에서 정 시장이 팬데믹으로 지친 시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노래 공연을 선보였다. 평택시청 제공이로써 정 시장은 총 8번(지방선거·총선) 출마해 2014년 재보궐선거를 제외한 나머지 7번의 선거에서 승리, 평택 민주당의 승부사이자 터줏대감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과거 의원 시절 그는 연임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도 "국회 개혁 실패에 책임을 느낀다"며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는 등 물러날 때를 아는 강단을 보이기도 했다.
'거물급'으로서 더 큰 정치에 대한 미련은 없는지 물었지만 "국회의원은 다시 할 생각 없다. 평택이 굉장히 중요한 도시인 만큼, 시장으로서 의미를 계속 찾고 싶다"는 답이 돌아왔다.
무게감 있는 정치 이력과 달리, '인간' 정장선은 무겁거나 딱딱하지 않은 면모를 지녔다. 오히려 유쾌한 끼와 소탈함마저 읽힌다.
국회를 떠난 뒤 야인시절 배운 성악은 그를 '노래할 줄 아는 시장'으로 만들었다. 시장실 진열장에는 그가 무대에서 노래하는 사진이 유독 눈에 띈다. 코로나19 극복을 기원하는 행사였다.
곡명은 'Time To Say Goodbye(이제 헤어질 시간)'. 정 시장은 "처음에는 떨려서 신경안정제를 먹어가며 무대에 섰는데, 시민께 작은 위로라도 됐으면 싶어 무대에 올랐다"고 말했다.
재선 성공을 거창하게 기념하고 싶을 법도 하지만, 취임식은 직원들만 모여 간소하게 치르고 대신 카이스트 총장을 초대해 공직자들을 대상으로 평택의 미래에 대한 특강을 할 예정이다.
평택시장실 벽면에 '좋은 말을 많이 듣고 열심히 행하라'는 뜻의 문도근행(聞道勤行) 한자가 적힌 액자가 걸려 있다. 평택시청 제공끝으로 정 시장은 벽면에 걸린 사자성어를 가리켰다. 문도근행(聞道勤行), '좋은 말을 많이 듣고 열심히 행하라'는 뜻으로 "잘 듣고 열린 시정을 펼치겠다"는 그의 시정철학과 맞닿아 있다.
그는 "그동안 뿌려놓은 역점사업들의 씨앗이 제대로 열매를 영글 수 있도록 마지막 기회를 주신 것 같다"며 "평택항 배후단지 축소 위기, 현덕지구 개발 지연 문제 등 산적한 현안들도 행정력을 집중해 돌파구를 찾겠다"고 인터뷰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