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의 '집단 망각' 현상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
여야가 소상공인 코로나 손실 보상의 최대 쟁점인 '소급 적용' 문제를 놓고 과거 자신들의 입장은 잊어버린 채 정권이 바뀌자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6월 28일 열린 산업자원통상중소벤처기업위원회 전체회의. 윤창원 기자
지난해 6월 28일 손실 보상 법안 처리 문제를 논의하던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산중위) 회의장.
당시 야당 간사이던 국민의힘 이철규 의원은 "여당(더불어민주당)과 정부가 (소급 적용을 하지 않기 위해) '손실 보상보다 재난 지원금이 더 두텁고 더 폭넓게 더 많이 갈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건 국민 기망"이라며 "재난 지원금이 손실 보상 보다 더 많다면 왜 자영업자들이 손실 보상을 소급해서 해 달라고 아우성을 치겠느냐"고 밝혔다.
그러면서 '소급 적용' 내용이 빠진 손실보상법 처리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같은 당 양금희 의원도 "손실 보상은 소급 적용하는 것이 당연한 원칙"이라며 "원칙대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정재 의원의 발언은 더욱 강도가 높았다. 김 의원은 "여기 있는 공무원들, 국회의원들,그리고 대기업 다니는 사람들 모두 월급 따박따박 받지 않느냐"며 "그것(전국민재난지원금) 반납하고 그 돈으로 소상공인들 손실보상 소급 적용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여당이던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소급 적용'을 하면 소상공인에게 더 큰 피해가 갈 수 있다며 소급 부분이 빠졌더라도 법안부터 통과시키자고 다그쳤다.
송갑석 의원은 "소급에 대해 시뮬레이션을 하고 적용 시점을 예측해 보니 (소급 적용보다는) 재난 지원금 형태가 소상공인에게 더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해 (법안을) 이렇게 설계한 것"이라며 법안 처리를 요구했다.
이성만 의원은 '소급 적용을 하면 보상이 늦어지고 나중에 환수될 가능성도 있다'며 "여러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만큼 법안을 빨리 처리할 것을 촉구했다.
정태호 의원 역시 "소급 적용을 하면 소상공인 80%가 배제된다"며 "피해 지원 형식이 소상공인들에게 훨씬 더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결국 여당의 입장대로 소급 적용이 빠진 소상공인 손실보상법은 국민의힘 의원들의 집단 퇴장 속에 이날 상임위에서 처리됐다.
연합뉴스1년 뒤인 지난달 12일 같은 국회 산중위 회의장. 소상공인 코로나 손실 보상을 위한 추경예산안을 논의하고 있었다.
야당이 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1년여전과는 달리 소급 적용 예산이 빠졌다며 정부 여당을 물고 늘어졌다.
이동주 의원은 "두 당의 대선 후보들이 소급 적용을 약속했던만큼 소급 적용 내용이 반영된 추경안을 마련해야 한다"며 소급을 주장했다.
김정호 의원도 "국민들에게 공개적으로 약속한대로 빠진 사람없이 소급해서까지 추경안이 증액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황운하 의원은 "윤 대통령이 후보 시절 '소급 적용'을 약속했는데 파기했다"며 공약대로 소급 적용하라고 요구했다.
반면 여당이 된 국민의힘 의원들은 이전과 달리 소급 적용에 매우 소극적인 모습으로 일관했다.
여당 간사가 된 이철규 의원은 "법적 근거 없이 손실 보상을 소급 적용할 수 없다"며 손실보상법을 개정하기 전까지는 소급 적용이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한무경 의원도 "소급 적용을 못하는 이유는 법이 그렇게 돼 있기 때문"이라며 "법안에 소급 적용을 넣었느냐 말았느냐 하는 논쟁은 소상공인 문제를 정쟁으로 끌고 가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1년여 전 민주당 의원들이 '소급 적용'을 주장하던 국민의힘 의원들을 향해 했던 말과 똑같이 민주당 의원들을 되받아 쳤다.
야당 시절 소급 적용을 요구하며 삭발과 단식까지 했던 최승재 의원은 "수십, 수백조원을 썼는데도 소급 적용 얘기가 아직도 나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라면서도 소급 적용을 주장하는 대신 전 정권이 예산을 비효율적으로 썼다는 비판에 집중했다.
결국 야당 시절 소급 적용을 적극 주장하던 국민의힘은 여당이 되자 '손실보상법에 소급 적용이 빠져 있기 때문에 소급 적용이 어렵다'는 이유로 사실상 소급 적용에 반대하고 있다.
반면 여당 시절 '손실보상의 시급성'을 얘기하며 '소급 적용의 문제점'을 들춰냈던 민주당은 야당이 되자 적극적인 '소급 적용'으로 돌아섰다. 현재의 여야 모두 과거 자신들의 발언과 입장을 집단적으로 '망각'한 셈이다.
대통령과 장관도 '집단 망각'에 합류해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소급 적용이 배제된 손실보상은 반쪽짜리에 불과하다'며 소급 적용을 약속했지만 당선이 되자 국정 과제에서는 소급 적용을 제외했다. 또한 새 정부 첫 추경예산에도 소급 적용 예산을 넣지 않았다.
담당 장관인 이영 중소벤처기업부 장관도 마찬가지.
국민의힘 의원 시절에는 '소급 적용은 반드시 필요하다. 계산이 정확하게 나오지 않더라도 소급 적용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난달 장관 후보 인사청문회에서는 '지자체에서 방역 조치 이행 여부를 점검한 데이터가 없어 소급 적용이 어렵다'고 입장을 바꿨다.
여야가 이처럼 대선 이후 '집단 망각'에 빠졌지만 완전한 망각은 아닌 듯하다. 자신의 과거 입장은 망각했지만 상대방의 과거 입장과 발언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선 이후 열렸던 산중위 회의에서는 '화장실 갔다 오더니 마음이 달라졌다'거나 '그 때는 그렇게 말하더니 지금은 왜 달라졌느냐'는 상대를 향한 힐난이 이어지고 있다.
여야 정치권이 지난달 30일 윤 정부 첫 추경 예산을 합의처리하고 부대 의견으로 '손실보상의 소급 적용'을 계속 논의하기로 했지만 이같은 '선택적' 집단 망각 증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