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아난티 골프장. 연합뉴스남북 이산가족 상봉 장소이자 남북협력사업의 상징인 북한 금강산 관광지구 내 남측시설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다.
미국의소리(VOA) 방송은 북한 당국이 금강산에 있는 아난티 골프장 리조트 단지를 약 여드레 만에 모두 철거했다고 19일 보도했다.
VOA는 위성 촬영 사진을 분석한 결과 아난티 골프장 리조트의 중심부 건물을 비롯해 주변의 8개 건물의 지붕과 외벽이 모두 해체돼 콘크리트 토대만 남았다고 전했다.
이에 앞서 진행하고 있는 해금강호텔 해체도 상당 부분 진척돼 총 7층 높이 건물의 윗부분이 모두 사라진 채 호텔 앞면에는 큰 구멍이 뚫린 듯 어두운 부분이 포착됐다고 밝혔다.
올해 들어 북한 당국이 금강산 내 남측시설들에 대한 해체 작업에 적극 나서고 있어 이런 철거 작업 속도라면 조만간 모든 남측시설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북한 금강산 아난티 골프장 리조트 단지를 촬영한 위성사진. 왼쪽부터 4월 1, 9, 10, 11일의 모습. 10일 중심부 건물(왼쪽 붉은 사각형 안)이 사라지고 11일에는 북쪽 2개 동(오른쪽 붉은 사각형 안)이 철거된 모습이다. 연합뉴스
금강산 내 남측시설 해체는 지난 2019년 10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금강산 시찰 과정에서 남측에 의존한 금강산 개발을 비판하며 독자 개발을 독려한 데 따른 것이다.
당시 김정은 위원장은 고성항과 해금강호텔, 금강산호텔, 금강산옥류관, 금강펜션타운, 온천빌리지, 제2온정각, 고성항회집, 고성항골프장 등 남측에서 건설한 시설들을 둘러보았다.
김 위원장은 이들 시설을 둘러본 뒤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지는 너절한 남측 시설을 싹 들어내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북한은 공동연락사무소를 통해 2020년 2월까지 금강산의 남측 시설물을 모두 철거하라고 요구했고 올해 들어 본격적인 해체 작업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금강산관광지구 해금강 호텔. 연합뉴스고성항 바다에 떠있는 해금강 호텔은 30여 년 전 호주 사업가에 의해 지어진 세계 최초의 해상 호텔로 호주와 베트남을 거쳐 지난 2000년 금강산으로 옮겨왔다.
아난티 골프장은 지난 2008년 개장했으나 개장 2개월 후 발생한 박왕자 씨 피격사건으로 관광이 중단되면서 10년 넘게 방치돼 왔다.
남북왕래가 활발하던 노무현 정부시절 통일부를 출입한 덕분에 남북이산가족, 적십자회담 등 각종 회담과 행사 취재로 금강산을 꽤 여러 차례 다녀 온 경험이 있다.
남북이산가족 상봉 행사 당시 해금강호텔에 묵고 있는 남측 가족과 이들을 방문한 북측 가족이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울음보를 터트리던 모습은 지금도 기억 속에 생생하다.
북측 가족이 돌아간 저녁 시간 호텔 1층 무대에선 필리핀 여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그 음악에 맞춰 덩실 덩실 춤을 추던 남측 가족들의 모습도 생각난다.
관광객에게 개방된 외금강 코스 외에 묘길상, 보덕암 등이 있는 내금강 코스 사전 답사를 위해 2007년 방북했을 때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아난티 골프장을 방문했다.
당시 공사 관계자로부터 공이 그린에 올라오면 저절로 홀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이른바 '깔때기 홀'을 만든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도 있다.
금강산 관광지구는 1998년 여객선을 이용한 첫 관광이 시작된 이후 2008년 관광이 중단될 때까지 약 10년간 150만 명 이상의 남측 관광객이 방문했다.
당시 관광지구에는 금강산 호텔, 해금강 호텔, 외금강 호텔 등 호텔 급 숙소만 4개였고 재중동포를 포함한 남측 직원 1250여 명, 북측 인원 1200명이 각종 시설에서 근무했다.
평양옥류관을 모방한 '금강산옥류관'과 북측이 직영하는 숯불구이 음식점 '금강원', 음양의 조화를 위해 주기적으로 남탕과 여탕을 바꾼다는 '온정리 온천마을' 등에 대한 기억이 새롭다.
2018년 8월 20일 고성 금강산면회소에서 열린 제21차 이산가족 상봉행사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금강산 지구는 관광을 위한 곳이기도 했으나 남북 분단으로 인해 발생한 이산가족들이 짧게나마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고 얼굴을 볼 수 있는 뜻 깊은 만남의 장소였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달러벌이 수단으로 금강산 관광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일종의 '퍼주기'라며 비난하기도 했으나 이산가족에게는 그리움을 달랠 수 있는 곳이었다.
남북 이산가족 행사는 1985년 역사적인 첫 상봉이 이뤄진 뒤 2018년 마지막 행사 때까지 21회에 걸쳐 대면 또는 화상 상봉 형식으로 성사됐는데 대면 상봉은 주로 금강산에서 이뤄졌다.
이처럼 남북협력사업의 상징이자 만남의 장소였던 금강산 내 남측 시설은 2008년 관광 중단 이후 방치된 채 결국 철거 해체라는 비극적 운명을 맡게 됐다.
정부는 지난 18일 이산가족 고령화에 대비해 유전자 검사를 진행하는 사업에 7억900만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이 사업은 이산 1세대가 사망한 이후에도 후손들이 가족관계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로 2014년부터 추진돼 지난해까지 2만 5천여 명이 참여했다.
남북 관계가 좀처럼 풀리지 않다보니 2018년 이후 지금까지 대면 상봉은커녕 화상 상봉도 이루어지지 못한 채 이산의 아픔은 깊어만 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8년 4월 27일 첫 정상회담 당시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며 상징적인 장소가 된 판문점 도보다리 보수 공사가 시작됐다고 유엔군사령부가 지난 15일 공개했다. 연합뉴스최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관리하고 있는 유엔군사령부는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지반 침하가 발생한 '도보다리' 보수 공사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도보다리'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2018년 4월 27일 첫 정상회담 당시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눴던 상징적인 장소다.
당시 TV를 통해 두 정상의 담소 모습을 지켜보며 '조만간 금강산 가는 길이 다시 열리겠구나'하는 생각을 했으나 4년이 흐른 지금 재개방은커녕 시설 철수가 본격 진행 중이다.
내 책상 서랍에는 금강산 관광지구 면세점에서 쓸 수 있는 상품권이 아직 여러 장 남아 있다.
금강산 가는 길이 다시 열릴 경우 사전 답사든 이산가족 상봉 취재든 금강산을 방문할 후배기자에게 주고자 간직해 왔는데 이제는 미련 없이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