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정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이 지난 12일 서울 강남구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한형 기자"민주주의 국가에서 생산한 배터리가 더 민주적인가요? 그게 더 효능이 좋은가요? 시장은 시장 논리대로 움직이는 것이죠." 김기정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은 미중 간의 '전략적 모호성'을 버리고 양자택일할 시점이 됐다는 주장을 일종의 강박증으로 진단했다. 미중은 지금 이념으로 대립하는 '신냉전'이 아니라 이익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라는 것이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미국 자본가들은 중국 시장에 투자를 한다"며 "이익론의 관점에서 미중관계를 보면 민주주의나 인권은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라고 말했다.
김 원장은 미중경쟁에서 '외교의 유연성'을 강조했다. 그 핵심은 이익과 가치의 전략적 결합에 있다고 봤다. 그는 "중국에는 가치를 얘기해야 하고 미국에는 이익을 얘기하는 게 외교의 유연성"이라고 했다.
학창시절 농구를 했다는 그는 외교의 유연성을 농구 기술인 '피버팅'(Pivoting)에 비유했다. 한 발을 축으로 삼되 다른 발은 여러 방향으로 폭넓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냉전의 유산인 경직된 자세로는 국익을 지키기 힘들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외교안보 정책에 깊이 관여한 김 원장은 학자(연세대 정외과 교수) 출신답게 현안에 대한 철학적 접근이 돋보였다. 북한의 극초음속 미사일 발사에 '분절적 인식'(Compartmentalize)의 심리적 분석을 적용해 설명하기도 했다. 북한이 종전선언 제안을 거부했다고 최종 판단하기는 아직 이르다는 설명을 하는 과정에서다.
그는 북한을 한미동맹의 편으로 끌어들이자는 빈센트 브룩스 전 한미연합사령관의 아이디어를 호평하며 구태의연한 시각을 뛰어넘는 외교적 상상력을 강조했다. 하지만 미국에 대한 설득은 여전히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종전선언 문안 합의에서 보듯 바이든 행정부는 어느 정도 움직였지만 전략가들은 또 다른 문제라고 했다.
김 원장과의 대담은 북한이 극초음속 미사일 시험발사 성공을 발표한 지난 12일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서 이뤄졌다.
Q. 북한의 극초음속 미사일 발사는 종전선언 거부로 봐야 하지 않을까? A. "그렇게 단선적으로 해석하긴 어렵다. 우리도 종전을 선언한다고 안보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북한도 비슷한 논리로 스스로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당 전원회의에서 국방력 강화를 확인했고 이중기준 철회도 얘기한 적 있다.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는 말을 먼저 드리겠다."
지난 11일 북한에서 극초음속미사일 발사를 준비하는 현장을 조선중앙TV가 12일 보도했다. 발사 장소는 자강도로 알려졌다. 연합뉴스Q. 종전선언 추진 동력이 여전히 살아있다고 보는 것인가? A. "종전선언은 사실 오래 된 역사이다. 멀리는 1953년 휴전협정, 2006년 노무현과 부시 회담, 2018년 판문점회담 때도 나왔지만 좌절됐다. 우리 정부가 종전선언을 다시 끄집어낸 것은 한반도 평화 구상의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지금 꼭 결과를 내는 것이 아니라 다음 정부로 물려준다는 관점에서 접근을 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동력이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고 본다."
Q. 정부로선 종전선언 외에 다른 카드가 없기도 했던 것 아닌가? A.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북한과의 대화) 입구에 뭘 두느냐 인데, 꼭 종전선언이 아니어도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종전선언과 연락사무소 설치 이후의 일이긴 하지만) 상상력을 발휘하면 평화협정보다 오히려 북미수교를 앞에 놓는 방법을 얘기하는 미국 전략가들도 있다. '92년 한중수교 모델'이다. 여러 가지 길이 있을 것이라고 본다."
Q. 북한을 한미동맹에 포섭하자고 했던 브룩스 전 사령관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A. "저도 거기서 좀 영감을 받았고 약간 쇼크도 받았다. 그래서 워싱턴에 갈 때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과 비슷한 얘기를 했다. 저는 미국이 동북아 전략을 짤 때 'Think big', 좀 크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미국이 중국을 정말 견제하고 싶으면 북한으로 하여금 견제하게 하는 것도 전략이어야 한다. 만약 성공한다면 중국에게는 'Wake-up call'(자명종) 같은 깜짝 놀라는 '신의 한 수'가 될 수 있다."
지난 2018년 11월 당시 빈센트 브룩스 한미연합사령관이 서울 용산구 합동참모본부 연병장에서 열린 환송 의장행사에서 경례를 한 모습. 이한형 기자김 원장은 그러나 브룩스 전 사령관과 같은 생각이 많지는 않다고 했다. 그는 "21세기 초의 미국에는 키신저 같은 대전략가가 없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이후 70년이 흘렀지만 워싱턴의 주류는 여전히 과거 패러다임으로 한반도를 본다는 것이다.
"이익론의 관점에서 보려하지 않고 감성론의 관점에서 '북한 못 믿겠다, 나쁜 놈이다'(라고 한다). 그러니까 심리적 요인이 이익에 대한 상상력을 제한하고 있다." 김 원장은 북미 양측 모두 근본주의와 무오류, 감성적 함정에 빠져있다고 평가했다. 북한이 자력갱생을 외칠 때 미국은 제재만능의 근본주의에 빠지고, 양측 공히 자기 주장만 옳다고 믿으며, 이성보다 감성적 판단으로 전략적 이익을 놓치고 있다는 지적이다.
Q. 우리 정부가 미국을 설득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것은 아닌가? "종전선언을 설득시킨 것을 보면 정부 측면에선 상당 부분 되는 것 같다. 바이든 행정부는 한국의 전략적 중요성, 경제적 중요성을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우리가 이야기 하면 그냥 허투루 듣지 않는다. 그런데 미국의 전략가들은 다른 문제다. 전략가들을 설득하는 게 훨씬 어렵다. 논리도 잘 안 통하고…"
Q. 미국은 이란 핵합의 때 썼던 스냅백(조건부 제재완화) 방안에 대해서조차 미온적이다. "스냅백은 이론적으로는 맞다. 이익의 교환구조가 만들어지고, 약속을 어겼을 때 페널티가 있고 다시 원위치시키는 것이니까. 그런데 지금은 스냅백보다는 (북미가) 서로 무엇을 교환할 것인가를 먼저 논의해야 할 때이다. 상호불신 구조가 얼마나 심화됐는가를 좀 직시할 필요가 있다. 북한은 3년 동안이나 핵 모라토리엄을 했지만 미국이 한 번도 인정하지 않는 것에 대단히 섭섭한 감정을 갖고 있다."
김기정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이 지난 12일 서울 강남구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한형 기자Q. 미중 전략경쟁은 어떻게 봐야 하나?
"신냉전이라 부르기도 하던데 그러면 미중 전략경쟁의 본질을 놓치는 것이다. 냉전 때와 달리 지금은 미국과 중국이 경제적으로 상호 의존돼있는 상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미국 자본가들은 중국 시장에 투자를 한다. 이념 대립이 아니라 이익을 놓고 경쟁하는 것이다. 이익론의 관점에서 미중관계를 보면 민주주의나 인권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Q. 미중 간 '전략적 모호성'에 대한 비판이 그치지 않는다. 양자택일을 해야 하나? "선택의 압박이라는 담론에서 좀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앞으로 한국 외교가 가야 할 길의 핵심은 '외교의 유연성'이라고 본다. 창의적, 능동적이어야 하고 때로는 가변적, 기동적이어야 한다. (외교의 목표를) 이익만을, 가치만을 이렇게 단편적으로 삼는 것도 유연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익과 가치를 어떤 방식으로 전략적으로 결합하느냐가 중요하다. 우리는 중국에는 가치를 얘기해야 하고 미국에는 이익을 얘기하는 게 외교의 유연성이라고 본다. (농구의) 피보팅(Pivoting) 같은 것이다."
Q. 전략적 모호성이 꼭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인가? "모호성이라는 말이 기회주의 같은 느낌을 주는데, 그보다는 '전략적 신중함'(Prudence)이라고 하는 게 맞다고 본다. 유럽 많은 국가들이 비슷한 고민을 하고있고 일본조차도 그렇다. 한국과 비슷하게 중간에 낀 국가들의 연대 같은 게 필요할 때가 있으리라고 본다. 이들 국가의 전략적 공통점이 뭔가를 모색해나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Q. 호주의 사례가 많이 거론된다. 빨리 선택하지 않으면 더 힘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냉전시기로부터 승계된 막연한 두려움, 선택을 빨리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런데 우리 국력이 커졌는데 그런 말씀 하시는 분들의 기억은 여전히 7,80년대에 가있어 간극이 있다고 보인다. 국민들의 높아진 자긍심을 외교 전략에 반영하는 구상이 되면 좋겠다."
Q. 한일관계는 여전히 난제 중의 난제로 남아있다.
"봉합은 가능하지만 해결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조급성을 경계하고 의연하게 가야한다. (위안부 등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정부간 합의로 국민의 슬픔을 해결하겠다고 하는 전제 자체가 잘못됐다."
김기정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이 지난 12일 서울 강남구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한형 기자김 원장은 양국관계 악화는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누적된 모순에 따른 것이기에 '포스트 65년 체제'로의 전환이 근본 해법이라고 지적했다. 한일은 국교 복원 과정에서 '반공'을 전략적 이익으로 공유했지만 과거사 청산은 '비합의의 합의'(Agree to disagree)라는 불충분한 합의에 그쳤다. 이후 냉전 종식으로 양국의 전략적 이익 공유는 약화됐고,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청산의 허점은 한국의 국력 신장과 더불어 난제들을 쏟아냈다.
그는 "혹자는 한일관계가 역대 최악이라고 하는데 저는 인정하지 않는다"면서 단교 위기까지 갔던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이 최대 위기였다고 했다. 나중에 집권한 김대중 대통령이 'DJ-오부치 선언'을 했던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 양국관계는 항상 구조적으로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Q. 한일이 새로 공유할 수 있는 전략적 이익은 무엇이 있나? "포스트 65년 체제는 수평적 관계라는 전제 하에 출발한다. 우리가 제안할 것은 동북아 평화이다. 그런데 일본은 자꾸 '반중'(反中)으로 가자고 한다. ('반공'을 공유했던 냉전 때처럼) 한국의 방파제 역할을 요구하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군사동맹으로 가면 안 된다. 한미일 3각 안보 협력은 가능하고 필요하지만 동맹으로 가는 순간 냉전 시대의 진영 구도가 된다. 한반도가 다시 프론트 라인(최전선)이 돼버리는 것이다."
Q.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위협과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을 어떻게 보는가? "G0 시대라고도 부르는 권위가 결핍된 '궐위의 시대', 굉장히 불안정한 시대가 되어간다. 미국이 제대로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느냐, 아니면 각자도생의 시대로 더 증폭되어 가느냐에 대한 일종의 전환기적 사건이 될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 주도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군대 훈련 모습. 연합뉴스Q. 대만 분쟁이 벌어지면 우리나라도 끌려들어갈 가능성이 있나? "가능성이 있다. 그런다고 해서 우리가 대만 문제에 개입을 자초하는 것은 우둔한 것이다. (만약 미중 군사충돌이 벌어진다면) 한국과는 관계없는 다른 곳에서 일어나도록 우리의 공간을 요구해야 한다. 우리의 원칙은 '개입하지 않겠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어려운 문제다."
Q. 한반도평화프로세스에도 공과가 있을 것이다. 반성할 점은 없나?
"아쉬운 점이 뭔가 묻는다면 '밸런스'(Balance)라고 생각한다. 대북정책과 외교정책 사이의 균형이다. 외형적으로 비춰지기에는 남북관계를 먼저 중시했다는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한반도 변화를 추구할 때 국제정치적으로 충분한 설명을 하고 갔어야 했다. 그렇다보니 훼방꾼이 나타났다. 일본이다. 이런 고민은 다음에 어느 정부가 됐든 똑같이 하게 될 것으로 본다."
지난 13일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 판문점 견학안내소에서 주차된 견학 버스의 모습. 연합뉴스김 원장은 정부가 한미공조를 중시하는 바람에 대북 접근에서 과감성이 부족했다는 지적에는 별로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좀 더 과감한 타이밍이 필요한 때가 있었다"면서도 "균형감각이 부족해서 결국 나중에 한반도평화프로세스의 국제적인 담론을 유지하는 데에 대단히 힘들게 됐고 우리만 홀로 남은 듯 보였다"고 했다.
사실 정부가 미국 눈치만 본 것은 아니다. 2019년 하노이 노딜에 이어 6월 북미 정상의 판문점 회동, 10월 스톡홀름 북미 실무접촉마저 무위에 그치자 이제는 교착국면 돌파로 태세 전환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곧이어 2020년 벽두부터 퍼진 코로나19는 이런 시도마저 어렵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