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임기 말의 문재인 정부가 베이징 동계올림픽과 한반도 종전선언이라는 버거운 외교안보 숙제를 동시에 떠안게 됐다. 베이징 올림픽은 미국 주도의 '외교적 보이콧' 동참 여부를 놓고 한국의 선택을 묻고 있다. 종전선언은 한반도 교착 국면의 타개책으로 우리 정부가 주도했지만 안팎의 거센 풍랑에 위태로운 형국이다.
美, 베이징 올림픽 보이콧 공세로 신냉전 기류…또 양자택일 요구?
베이징 올림픽은 '평화의 제전'이라는 올림픽 취지가 무색하게 오히려 첨예한 대립의 장이 되고 있다. 미국은 신장 위구르 등 중국 내 인권 상황을 인종 말살을 뜻하는 '제노사이드'(genocide)로까지 규정하고 보이콧에 나섰다. 비록 제한적이고 상징적인 조치이지만 국제정치적 함의는 매우 크다. 자유주의 대 권위주의라는 냉전적 대립구도가 명확하게 그어졌다.
미국과는 동맹, 중국과는 전략적 협력 동반자인 한국으로선 과거 사드(THAAD)나 쿼드(Quad) 때와 같은 선택의 갈림길에 또 다시 서게 됐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동변상련 처지의 나라가 적지 않다는 것. 프랑스가 보이콧 불참을 선언한데 이어 독일과 헝가리 등도 회의적인 태도이다. 중국 견제에 관한 한 미국과 한 몸이던 일본조차 절충안을 모색하며 눈치를 보고 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본부 앞 베이징 동계올림픽 보이콧 시위. 연합뉴스영국 등만 동참, 프랑스 등은 반기…쿼드(Quad)도 日, 인도는 신중
결국 현재까지 보이콧을 선언한 나라는 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등에 불과하다. 이들은 앵글로색슨 연합체라 할 수 있는 '파이브 아이즈'(5-eyes)이다. 같은 동맹이라도 한미동맹이나 미일동맹과는 역사와 연원을 따져볼 때 차원이 다르다. 미국의 최고(最古) 동맹 프랑스조차 호주 핵잠수함 문제를 놓고 오커스(AUKUS·미국 영국 호주 삼각동맹)로부터 소외됐다.
캐나다와 호주는 화웨이와 5G 등을 놓고 중국과 대치 중이기도 하다. 미국의 요구가 아니더라도 중국을 압박할 수단이 필요했다. 이런 역학관계 때문인지 또 다른 중국 포위망인 쿼드는 파이브 아이즈와 달리 단일대오가 허물어졌다. 일본과 인도가 올림픽 보이콧에 소극적인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미중 전략경쟁이 격화돼도 반드시 양자택일만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클릭하거나 확대하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도 이례적으로 빠른 입장 정리…직전 개최국 명분삼아 균형 추구
이런 가운데 우리 정부는 이례적으로 일찌감치 입장을 정리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13일 호주 방문 중 기자회견에서 "(올림픽 보이콧을)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최종 결정은 아니지만 보이콧 불참에 방점이 찍힌 것은 분명하다. 여기에는 직전 동계올림픽 개최국이라는 '이점'이 작용했다. 미국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긴 하지만 충분히 양해시킬 명분이 된다.
물론 이는 명확한 외교 대원칙에 따른 결정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상황 논리를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미중 전략경쟁이라는 거대한 변화에 대처할 국가전략을 세운다는 게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다. 적어도 당분간은 이번처럼 사안별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할 수도 있다.
종전선언 외교지형은 더 복잡…美 미온적, 中 지지, 국내서도 찬반 양분
문재인 대통령은 13일 호주 캔버라에서 스콧 모리슨 총리와 정상회담을 한 뒤 진행한 공동기자회견에서 베이징 동계올림픽 보이콧 논의에 대해 "한국 정부는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한국의 보이콧 불참 배경에는 종전선언에 대한 고려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 모처럼 보낸 우호적 신호를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은 이번에 공식적으로는 사실상 처음으로 종전선언을 지지했다. 종전선언이 성사되려면 미국이 제일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북한 변수를 생각하면 중국의 협조가 필요하다.
종전선언을 둘러싼 외교 지형은 한결 복잡하다. 찬반 입장이 단순히 갈리지 않고 국내에서도 이념적으로 양분됐다. 올림픽 보이콧에 대해서는 한미동맹을 강조하는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도 신중한 입장이다. 그는 14일 관훈토론회에서 "국익에 워낙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제한된 정보만 가지고 말씀 드리긴 좀 어려운 상황"이라며 답변을 피했다.
반면 종전선언에 대해서는 보수진영 전반적으로 강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외부 환경도 녹록치 않다. 중국이 오히려 우호적인 반면 미국은 내심 마뜩찮은 분위기이고 일본은 대놓고 반대하고 있다. 당사국도 아닌 나라의 주장이라 치부할 일이 아니다. 미국 내 일본의 입김을 감안하면 종전선언이 '상징적 선언'이라는 우리 정부 논리가 잘 먹히지 않을 수 있다. 미 공화당 연방하원의원 30여명의 종전선언 반대는 이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北 호응도 장담 못해, 거부하면 큰 낭패…'제2평창' 모멘텀도 약화
뿐만 아니라 북한의 입장도 확실하지 않다. 만약 한미뿐 아니라 중국까지 종전선언 문안에 합의하더라도 북한이 거부한다면 이만저만 낭패가 아니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15일 기자간담회에서 "종전선언에서 바로 이어지는 (제재완화 등) 실질적인 미국의 행동 조치가 담보되지 않는다면 북한은 지금 상황에서 나오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은 최근 추가 대북제재를 단행함으로써 북한을 자극할 우려가 커졌다. 바이든 행정부의 첫 신규 제재가 종전선언 논의 시점에 나온 것이다. 다만 미국 특유의 시스템을 감안할 때 지나친 의미 부여라는 시각도 있다. 서정건 경희대 교수는 "OFAC(미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은 트럼프 시절에도 트럼프가 북한과 대화를 하려고 할 때 자기 마음대로 제재를 가하곤 했다"고 지적했다.
연합뉴스종전선언의 무대로서 '제2의 평창'이 기대됐던 베이징 올림픽이 보이콧 타격을 입은 것도 부정적 요소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우리 정부는 어느 누구도 베이징 올림픽 때 종전선언 하겠다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했지만 정부 내 아쉬운 기색은 역력하다. 주변 정세가 우호적이지 않은 가운데 올림픽이라는 모멘텀마저 사라진다면 동력이 약화될 것이 뻔하다.
종전선언 준비돼도 타이밍 저울질…中 설득에 北 나오면 분위기 반전 가능성
때문에 정부는 한미 간에 종전선언이 준비되더라도 북한에 제시할 최적의 시점을 놓고 저울질 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미중 기류와 코로나19 상황은 물론, 종전선언 문안 자체뿐만 아니라 부대조건 격인 대규모 인도적 지원 여부 등이 함께 고려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은 13일 "미국이 더 담대하게 자국의 (코로나19) 백신을 주겠다고 제안한다면 북한이 대화의 장으로 나올 수 있는 모멘텀이 조성될 수 있다"고 말했다.
가능성이 높진 않지만 중국이 미국의 보이콧 공세를 돌파하기 위한 방편으로 종전선언 카드를 활용할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북한을 설득해 종전선언에 전향적으로 나서게 할 경우 일순 평화 분위기로 반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객관적 여건상 정부의 현실적 목표치는 한반도 상황의 안정적 관리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년 3월 대통령선거와 11월 미국의 중간선거 이후까지 내다보며 긴 호흡의 접근을 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