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향년 89세로 별세했다. 1988년 제13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하는 모습. 연합뉴스군부 쿠데타의 주동 세력, 시대의 변화를 읽은 북방외교 실행자, 직접선거로 당선된 첫 대통령, 그리고 보통 사람.
평가가 상반되는 수식어를 동시에 갖고 있는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이 26일 향년 89세로 별세했다.
노 전 대통령은 1932년 12월 대구에서 태어났다. 이후 4공화국에서 육사 동기인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한 뒤, 1979년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며 한국 정치사에 등장했다.
전 전 대통령 집권 후 정치인으로 전향해 2인자로 지내던 노 전 대통령은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정당 대선후보로 나서 '보통 사람의 위대한 시대'라는 슬로건으로 당선됐다. "나 이 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라는 말은 오랫동안 회자됐다.
1987년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태우 대표(왼쪽)가 전두환 대통령과 손을 맞잡고 대의원들의 환호에 답하는 모습. 연합뉴스전 전 대통령과 함께 군부 쿠데타의 핵심인 노 전 대통령이 87년 항쟁 뒤 직선제 개헌의 과실을 취한 배경엔,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의 후보 단일화 실패가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는 슬로건도 이들 민주화 세력의 대척점에 있는 자신의 정체성을 희석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반대파로부터 '물태우'라 불리는 수모를 감수하면서 군사정권에서 민주정권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관리했다. 실제로 그의 재임기에는, 그간 억눌려 왔던 각계의 민주화 요구가 분출되면서 노동계 파업 등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5공 숙청'이라는 명분으로 전 전 대통령을 백담사로 보내면서 사이가 틀어지기도 했다.
재임 중 성과로는 단연 북방외교가 꼽힌다. 노 전 대통령 재임 시기 소련이 붕괴하면서 동구 공산권 사회가 해체됐다. 노 전 대통령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산권 국가를 상대로 외교를 추진해 45개국과 수교를 맺었다. 냉전적 인식에서 탈주한 외교 성과일 뿐 아니라 거대한 중국과 소련이라는 거대 시장을 확보해 현재 대한민국의 수출 경제의 기틀을 잡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시기 경상수지는 연평균 7억6천만 달러 흑자를 기록하기도 했다.
동시에 노 전 대통령은 성장일변도 정책의 한계를 인정하고, 농어촌부채 탕감, 토지공개념 도입, 대기업 비업무용 토지 매각, 주택 200만호 건설 등 복지와 형평 우선주의 기조도 도입했다.
남북 대화가 어느 때보다 활기를 띈 것도 노 전 대통령 재임 때다. 88년 7.7선언(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을 했고 89년에는 여야 4당 합의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마련했다. 91년에는 서울에서 열린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 남북한 화해, 상호 불가침, 교류협력을 골자로 하는 '남북 기본 합의서'가 채택됐다. 그러면서도 88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서, 남북 체제에서 승리한 것도 전세계에 확인시켰다.
1996년 12.12 및 5.18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한 노태우·전두환 전 대통령의 모습. 연합뉴스그러나 전 전 대통령과 함께한 12.12 군사반란 참여와 5.18 유혈진압, 수천억에 이르는 비자금 조성은 노 전 대통령이 피할 수 없는 그림자다. 퇴임 후 이들 혐의로 유죄를 받은 법정에서, 전 전 대통령과 손을 꼭 잡은 노 전 대통령의 모습은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면으로 남아있다.
다만 그는 추징금을 여전히 완납하지 않은 전 전 대통령과는 달리 2013년 말까지 2천 억이 넘는 추징금을 분할해 완납했다. 납부할 추징금 확보를 위해 동생과 소송을 벌이기도 했다. 아들 재헌씨는 재작년 두 차례 광주를 찾아 5.18 민주묘지에 참배하고 희생자 가족들과도 만났다. 재헌씨는 "그만 하라고 하실 때까지 사과하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