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원 기자·국회사진취재단대선이 다가오긴 하나 봅니다. 여야 유력주자를 겨냥한 의혹 보도가 연일 쏟아지는 터라, 정신없이 뉴스를 살피다 보면 정말이지 '혼'이 나갈 지경입니다.
누가 적합할지 마음은 정하셨는지요. 출렁이는 여론조사를 보면 아직 관망하는 분도 많은 것 같습니다. 표심이 어쩌면, 막판까지 계속 흔들릴 수도 있겠네요. 각종 비위 의혹이 어디까지 사실인지 따져봐야 할 테니까요.
하지만 그보다, 후보들 면면을 잘 몰라서 망설이는 분도 많다고 합니다. 특정 이슈에 대한 거친 발언은 뉴스에 잘 나오지만, 개인의 스토리나 성향은 잘 다뤄지지 않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정알못 뉴스, 정치 잘 알지 못하는, 아니 오늘은 정말 '1'도 모르는 '찐 정알못' 분들을 위해 대선 주자 4인방 '인물 분석'에 나섭니다. '비주류'라는 키워드로 이들을 꿰어보았습니다.
평소 관심 많으셨던 분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얘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여 '나는 웬만큼 안다' 하시면 조용히 스크롤 올려서 노컷뉴스의 연관기사를 보셔도 좋습니다.
이재명 : 운동권과 멀었던 '태생부터 비주류'
더불어민주당 대선 주자인 이재명 경기도지사. 윤창원 기자"신경 안 쓰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한 1천개쯤 (번호를) 차단하면 안 들어온다고 합니다"여권 유력 주자인 이재명 경기지사가 지난 4월 이른바 '문자폭탄' 문제에 관해 내놓은 해법입니다. 스마트폰에 발신번호 1천개쯤 차단을 걸어놓으면 무시하기 쉽다는 얘기입니다.
과연 문재인 대통령 극성 지지자, 자칭 '문파(文派)'의 공격을 수년간 경험했던 이 지사다운 반응이었습니다. 친문(親문재인) 주류가 아니었던 이 지사는 이처럼 늘상 더불어민주당 내 '아웃사이더'로 꼽혔습니다.
인권변호사 겸 시민운동가였던 이재명 지사가 정계에 입문한 건 지난 2006년. 초기에 속했던 이른바 '정동영계'가 힘을 잃으면서 그 역시 주류와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치단체장을 줄곧 맡아온 터라 의정 경험이 없고, 중앙 무대에서 현역 의원 중심의 세력을 두텁게 형성하지도 못했습니다.
사실 이 지사의 경우 애초 태생부터 '비주류 DNA'를 타고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경북 안동 깊은 산골에서 화전농의 5남 4녀 중 일곱째로 태어나 '찢어지게'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남들이 중·고등학교 다닐 무렵 공장을 전전했고, 두 차례 자살 기도가 실패한 뒤에야 이 지사는 검정고시로 중앙대 법학과에 합격했습니다. 대학에서도 남들이 민주화를 외칠 때 그는 고시 공부에 전념했습니다.
이 지사가 만약 이때 '팔뚝질' 대열에 합류했다면 사정이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계파가 달라도 '그 시절' 학생운동에 동참했다는 '라떼는' 무용담이 있다면 '우리가 남이가' 하고 품을 수 있는 게 민주당 주류거든요.
"사실 운동권이 되면 장학금을 포기해야 할 가능성이 높았다. 만약 내가 등록금을 낼 수 있을 정도로 가정 형편이 괜찮았다면 선택이 달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학금을 못 받게 된다면 나는 그대로 대학을 중퇴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이재명 지사, 저서 '이재명은 합니다')"물론 '대세론'이 형성된 지금의 이 지사에게는 비주류라는 수식이 별로 어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친노(親노무현) 좌장인 이해찬 전 대표 지원이 결정적이었죠. '못 미덥다'거나 '눈치 보인다'던 친문 인사 상당수가 캠프에 합류하면서 이제는 '신주류'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이낙연 : 탄핵정당 출신이지만 '전화위복'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선 경선 후보. 윤창원 기자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 정치 이력도 원래는 친문 쪽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볼까요. 2004년 참여정부 시절 故노무현 대통령이 몸담았던 열린우리당에 합류하지 않고 새천년민주당에 남았던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이 전 대표는 당시 국회에서 노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발의할 때 이름을 올렸습니다. 친노 세력과 386 운동권 중심 열린우리당이 반대했지만 이 전 대표가 속한 동교동계, 즉 김대중 전 대통령 쪽 계파가 힘을 실으면서 기어이 탄핵안은 통과됐습니다.
그날의 사건은 차기 대선 레이스에서도 이 전 대표의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아군에 총질'했던 전력을 문제 삼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국회 본회의장에서 송영길 의원이 격하게 항의할 때 이낙연 의원이 곁에서 무심히 바라보는 사진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다만 이낙연 의원이 실제 표결에서 찬성표를 던졌는지 반대표를 던졌는지는 아무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무기명 비밀투표로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지난 7월에야 그는 "반대 표결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제가 드릴 말씀은 다 드렸어요. 당시 민주당의 상황을 다들 이해하실 거예요. 민주당에서는 저를 포함해서 몇 사람을 배신자로 간주하고 출당을 거론하고 그랬지 않습니까?(이낙연 전 대표, CBS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아울러 이낙연 전 대표에게는 한동안 '지역 정치인'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전남 영광 출신으로 이 지역에서 국회의원만 내리 4선에, 전남지사까지 지냈지만 유독 '여의도 씬'에선 인지도가 낮은 편이었거든요.
노 전 대통령 탄핵 사태가 헌법재판소 기각 결정으로 마무리된 뒤 20여년 가까이 친문 세력이 민주당 패권을 차지했던 터라 그로서도 운신의 폭이 좁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호남 출신 인사 대다수가 국민의당으로 흘러 들어갈 때 민주당에 남으면서 전화위복의 기회를 맞게 됐습니다.
바로 문재인 대통령 초대 국무총리로 지명된 것입니다. 호남 배려 차원의 '통합 카드'라는 게 당시엔 중론이었지만 최장수 총리로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면서 당내 입지 또한 점차 높아졌습니다.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야당 의원들을 '혼쭐'내면서는 대중적 인지도까지 쌓았습니다.
그렇게 친문 지지층을 포섭하면서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위기가 찾아온 건 올해 초쯤입니다.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 사면을 건의하겠다고 밝혔다가 개혁 성향 지지자 대거 이탈을 초래했습니다. 뒤늦게 발언을 철회했지만 효험이 있을지는 지켜볼 일입니다.
이밖에 여당 경선 득표율 3위 추미애 전 법무장관 또한 이낙연 전 대표와 함께 열린우리당에 참여하지 않았던 탓에 '비주류'로 분류됩니다. 민주노동당 출신 박용진 의원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죠.
윤석열 : 정권 칼잡이에서 보수 구원투수로
국회사진취재단민주당 패권이 친노에서 친문으로 계승되는 동안 보수정당에선 친이계(親이명박)와 친박계(親박근혜) 간 주도권 다툼이 치열하게 전개됐습니다.
물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21대 총선까지 4차례 주요 선거를 내리 참패하면서 이제는 더 이상 계파의 의미가 무색해졌습니다. 사실상 모두가 궤멸한 판이거든요.
그러나 이들로서도 어떻게든 선수를, 구원투수를 찾아야 했습니다. 정권 교체를 희망하는 지지자들의 마음을 담을 일종의 '그릇'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발견한 게 바로 윤석열 전 검찰총장입니다. 문재인 정부가 등용한 사정기관장이었지만 조국 전 법무장관 수사를 기점으로 칼끝을 정권에 들이밀면서 몸집을 불린 인물이고요. 검찰 내부에서도 주류인 '공안라인' 대신 '특수라인'에 속했습니다.
이렇게 그냥 비주류도 아닌 일개 정치 신인이 보수정당 유력 대권주자로 단박에 자리매김한 건 상당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그 뒤 검사 출신 윤석열은 국민의힘 입당도 어느 날 갑자기 마치 압수수색하듯 전격적으로 단행했습니다.
하지만 윤 전 총장은 보수층에 원죄가 있다는 게 한계로 꼽힙니다. 공교롭게도 두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보내는 데 일조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아주 핵심적인 역할이었죠. 최순실-박근혜 특검 수사팀장, 이후 서울중앙지검장으로서 관련 사건을 직접 지휘했습니다.
"연세도 있고 여자분인 두 전직 대통령의 장기구금에 대해서 안타까워하는 국민도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저 역시도 그런 생각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윤석열 전 총장 출마 기자회견)"
이렇게 사면론에 공감한다는 입장을 밝히거나, 박근혜 전 대통령을 불구속 지휘하려 했다는 썰을 은근히 흘리고 나선 배경에서도 주류 보수층의 반발을 누그러뜨리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다만 기반이 탄탄하지 않다는 점에서 세력이 쉬이 흩어질 우려도 있습니다. "부정식품을 선택할 자유가 있어야 한다"거나 "건강한 페미니즘이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의 실언이 겹친 뒤 '손절'한 이들도 적잖습니다.
홍준표 : 당내 견제 탓에 복당도 뒤늦게
국회사진취재단홍준표 의원을 '주류'로 인식하는 분이 많다는 점은 꽤 놀랍습니다. 5선 의원에, 한나라당 대표, 경남지사, 19대 대선 후보, 자유한국당 대표까지 지내면서 항상 전면에 노출됐기에 '착시 현상'이 빚어졌나 봅니다.
그러나 홍준표 의원은 보수정당의 대표적인 비주류 인사였습니다. 개인기가 뛰어나고 스펙이 출중한데도 지금껏 세력을 충분히 규합하지 못했습니다. 오죽하면 당내 지지율 선두를 오가는데도 그를 공식 지지하는 의원이 몇 명 없을까요.
그런 탓에 이렇게 대선 주자 반열에 오르는 데에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지난 총선에서 낙천한 뒤 무소속으로 당선됐지만 곧바로 복당하지 못했던 것도 '당내 견제' 때문이란 해석이 많았습니다.
물론 비주류보다 '비호감'이 더 문제라는 시선도 있었지요. '지난 대선에서 국민적 판단이 끝난 인물을 다시 당의 후보로 세우면 정권 교체는 물 건너 갈 수 있다'는 우려 말입니다. 어쨌든 그의 뒤늦은 복당은 무척 이례적이었습니다.
"통상으로 총선 과정에서 선거가 끝나고 나면 무소속으로 당선된 사람들은 2, 3개월 내에 다 입당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늦어진 것은, 갑자기 집안에 계모가 들어와서 맏아들을 쫓아냈다. 이유도 없이. 그런데 그 기간이 좀 오래 걸렸다. 그런 생각입니다(홍준표 의원, CBS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홍 의원 저서에 따르면 그는 유년기부터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늘 주변만 맴돌았다고 합니다. 무학의 소작농 '흙수저' 가정에서 태어나 국민학교 시절에만 전학을 5차례나 다닌 탓이라고 설명하더라고요.
검사 시절에도 검사 동일체 원칙을 거부하는 '모두 까기'로 유명했습니다. 이른바 '슬롯머신' 사건 수사로 노태우 정부 실세를 구속한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덕분에 훗날 갖게 된 '돈키호테'나 '모래시계 검사' 같은 별칭은 외려 정치적 자산이 됐지만요.
그랬던 홍 의원이 정계에 입문한 건 지난 1996년이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 권유로 신한국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당선됐습니다. 참여정부 때 이른바 '탄핵 역풍'을 뚫고 서울 동북권에서 유일하게 당선되면서 거물급으로 부상했습니다.
비주류의 설움은 그즈음에도 있었습니다. 2006년 서울시장 선거 당시 한나라당 경선에 참여했는데 별안간 등장한 오세훈 후보에게 밀렸거든요. 이는 친이계가 오 후보를 지원하면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이명박 전임 시장이 자신을 지원할 것으로 철석같이 믿었던 홍 의원으로서는 무척 억울했겠죠. 그 앙금이 지금까지 남아있다고 합니다.
이밖에 야권 주자로는 탈당 전력이 있는 유승민 전 바른미래당 대표와 하태경 의원, 구심점 없는 소장파 원희룡 전 제주지사, 친박 내 비주류인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대표와 안상수 전 인천시장, 그리고 문재인 정부 감사원장 출신 최재형 후보가 있습니다. 이 중 누구도 '주류'로 꼽긴 민망하네요.
물론 비주류 출신이라는 점이 지금은 강점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기존의 주류 기득권식 리더십으론 코로나19라는 유례없는 위기를 돌파하기 어렵다는 주장입니다. 덧붙여 주류 권력이라는 게 원래부터도 선거를 거치면서 재편되곤 합니다. '별의 순간'을 잡았던 버락 오바마나 도널드 트럼프도 처음부터 주류는 아니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