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이미지 제공미국에 이어 유럽도 자체 반도체 생산 능력을 강화하기 위한 '반도체법(European Chips Act)' 제정을 추진한다. 미국 상원은 반도체 제조 시설 등에 520억 달러(약 60조 9천억 원)의 보조금을 지원하는 내용의 법안을 최근 처리했다. 지난해 제정된 '미국 반도체법(CHIPS for America Act)'의 후속 조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의 대유행으로 반도체 수급난이 불거지자 '반도체 굴기'를 선언한 중국을 필두로 세계 각국이 '기술 주권' 차원에서 반도체 '자급자족'에 속도를 내고 있다. 반면 정부여당이 추진하는 '국가핵심산업전략특별법'(가칭)은 부처간 이견 등으로 처리가 지연되고 있다.
'반도체 품귀' 겪은 EU "'기술 주권' 차원에서 새 반도체법 추진"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지난 15일(현지시간) 유럽의회에서 한 국정 연설에서 "미국, 중국 같은 경쟁자를 따라잡기 위해 반도체 산업에 힘을 실어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단순히 경쟁력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 주권의 문제이기도 하다"며 새로운 반도체법을 내놓을 것이라고 밝혔다.
현지 외신이 '도박'이라고 표현한 EU의 반도체 '각자도생' 선언은 코로나19에 따른 글로벌 반도체 부족 현상 이후 나온 것이다. 세계 최대 자동차 생산업체인 폭스바겐을 비롯해 유럽의 완성차 제조사들은 지난 1년 동안 여러 차례 생산을 멈췄고, TV·헤드폰 등의 제품도 생산에 차질을 빚었다.
앞서 EU는 지난 3월 역내 국가들의 반도체 시장 점유율을 현 10% 수준에서 2030년까지 20%로 끌어올리기 위한 계획을 발표했다. 유럽 공동의 경제이익을 다루는 'IPCEI'(Important Projects of Common European Interest)는 1차 배터리에 이어 반도체를 2차 프로젝트의 핵심 과제로 지정하고 공동 투자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유럽은 반도체 '자급자족'을 모색하면서도 설계 및 제조 시설에 대한 구체적인 액수의 보조금을 약속한 적이 없다. 인텔이 최대 800억 유로(약 110조 원)의 유럽 투자 계획을 밝히면서 독일·프랑스 등이 유치전에 나선 상황에서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개별 회원국의 투자를 조율할 필요가 있다. 반도체법의 목적은 최신 기술의 유럽 반도체 생태계를 공동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럽 현지에서는 미국·중국처럼 반도체 프로젝트에 공적 자금을 지원해야 한다는 여론에 힘이 실리고 있다. 통신사 최고경영자(CEO) 출신의 티에리 브르통 EU 내부시장 위원은 15일(현지시간) 언론 기고문에서 "단일 시장을 분열시키는 국가 보조금에 대한 경쟁을 피하기 위해 일관된 자금 조달이 가능한 '유럽 반도체 펀드' 기금 조성 등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도체 공급망' 재편 나선 美, 오는 23일 3차 '반도체 화상회의' 소집
지난 4월 백악관에서 열린 '반도체 화상회의'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웨이퍼 실물을 직접 들어보이며 반도체 수급난 해소를 강조했다. 연합뉴스이런 가운데 백악관은 반도체 공급망 재편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를 또 다시 소집했다. 지나 러몬도 상무부 장관과 브라이언 디스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NEC)은 오는 23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반도체 화상회의'를 진행한다. 지난 4월과 5월에 이은 세번째 회의다.
미 정부 관계자는 "이번 회의는 공급망 투명성을 강화하고 동맹국과의 교류를 지속하기 위한 것"이라며 "정부는 수개월 동안 지속하는 반도체 병목현상을 완화하기 위해 기업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반도체·배터리·희토류·의약품 등 4대 핵심 품목의 '공급망'을 100일간 검토한 뒤 지난 6월 미국을 중심으로 한 공급망 재편에 나서기로 한 상황이다. 반도체 화상회의도 코로나19 대유행에 따른 반도체 공급 부족을 해소하고, 반도체 제조시설의 아시아 편중을 해소하기 위한 차원에서 진행됐다.
미국 상원은 이에 발맞춰 지난해 제정된 '미국 반도체법(CHIPS for America Act)'의 후속 조치 일환으로, 반도체 제조 시설 등에 520억달러(약 60조9천억원)의 보조금을 지원하는 내용의 법안을 처리했다. 하원에서는 일부 의원들이 미국에 본사를 둔 기업에만 연방 예산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법안의 최종 통과가 늦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이번 3차 반도체 화상회의에서는 삼성전자 같은 해외 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 여부 등이 논의될 가능성이 있다. 러몬도 장관은 지난 7월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의 동맹국인 한국에 있고 훌륭한 기업인 삼성은 미국에 본사가 없지만 이 산업에서 선두주자"라며 "행정부 내부 정책 토론이 완료되면 바이든 대통령이 최종적으로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두 차례 회의에 모두 초대받았던 삼성전자는 이번 3차 회의에도 참석할 가능성이 크다. 삼성전자는 마침 170억달러(약 20조원)를 들여 미국에 짓기로 한 제2파운드리 공장의 최종 부지 선정이 임박했다. 텍사스주의 테일러시가 후보지 가운데 처음으로 파격적인 세금 인센티브 지급 결의안을 승인한 가운데 기존 공장이 있는 오스틴시도 여전히 검토 대상이다.
미 연방정부 차원의 추가적인 보조금 지급 방안이 가시화되고 있는 만큼 삼성전자는 조만간 최종 부지를 확정해 발표할 전망이다. 업계에서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추석 연휴 동안 의사 결정을 마친 뒤 이르면 이달 안에 발표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정부여당 추진하는 '국가핵심산업전략특별법' 처리는 지연
지난 7월 7일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반도체 기술특별위원회 제6차 회의에 앞서 송영길 대표, 변재일 반도체기술특위 위원장, 문승욱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등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글로벌 강대국들은 이처럼 반도체 '자급'을 위한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분주하다. 더불어민주당도 지난 4월 반도체 업계에 대한 초(超) 파격적인 지원방안을 담은 '반도체 특별법' 발의를 약속했다. 당시 윤호중 원내대표는 "대한민국 미래가 반도체 전쟁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면서 반도체기술특별위원회를 공식 출범했다.
정부여당은 추후 논의 과정에서 반도체에 배터리, 백신, 디스플레이 등을 더해 국가전략기술을 포괄하는 '국가핵심산업전략특별법'(가칭)을 제정하기로 하고, 늦어도 8월까지 법안을 발의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환경 규제 및 수도권 대학 정원 완화 등을 둘러싼 부처 간 이견 등으로 아직 초안도 내놓지 못했다.
민주당 반도체기술특별위원장을 맡고 있는 변재일 의원실 관계자는 "관련 부처와 업계들의 요구가 상충되는 지점이 많다 보니 초안 마련에 어려움이 있는 게 사실"이라며 "당론으로 추진하기로 한 만큼 법안이 나오기만 하면 실제 처리까지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앞으로 더욱 치열해질 국가간 경쟁 환경 속에서 반도체의 전략적 위상을 감안한 국가 차원의 지원책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반도체는 지난 2013년부터 수출 1위 품목에 올랐으며 지난해에는 전체 수출액의 19.4%인 992억달러(약 116조원)를 차지했다.
이창한 한국반도체산업협회 부회장은 "미국, 중국, 유럽 등 주요국이 자국 내 반도체 제조시설 확보와 경쟁력 강화를 위해 산업 육성 정책을 연이어 발표하고 있다"며 "반도체산업이 그 위상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혁신과 함께 정부의 강력한 산업 지원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