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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 리뷰]존엄을 지키기 위한 중년 여성의 투쟁 '갈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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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갈매기'(감독 김미조)

영화 '갈매기' 스틸컷. ㈜영화사 진진영화 '갈매기' 스틸컷. ㈜영화사 진진
※ 스포일러 주의
 
김미조 감독은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를 좋아하고, 그 안에서 '엄마'를 보았다고 한다. 자유로운 두 날개를 가졌지만 육지 곁을 맴돌기만 하는, 멀리 날아갈 기세로 부지런히 날갯짓을 해대지만 결국 다시 그가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게 갈매기라고 한다. 영화 '갈매기'는 한 여성이 부단한 날갯짓 끝에 한 명의 여성이자 인간으로서 존엄을 되찾는 투쟁 과정을 그린다.
 
오복(정애화)는 수산시장에서 생선가게를 운영한다. 큰 딸 인애(고서희)의 상견례를 마치고 기쁜 마음으로 시장에 들른 오복은 생존권을 위해 함께 투쟁 중인 시장 상인들과 술자리를 갖는다. 그리고 동지이자 동료인 한 상인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이후 오복은 자신만의 투쟁에 나선다.
 
영화 '갈매기'는 일평생 스스로를 챙겨본 적 없는 엄마 오복이 험한 사건을 당한 후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세상에 맞서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과정을 섬세하면서도 사려 깊게 담은 작품이다. 자신의 이름이 지워진 채 공동체의 일원으로, 그저 희생만을 하며 살아가던 오복이 이름을 되찾고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는 투쟁의 과정이기도 하다.
 
영화 '갈매기' 스틸컷. ㈜영화사 진진영화 '갈매기' 스틸컷. ㈜영화사 진진
영화에는 '생존권 확보' '단결 투쟁' 등이 쓰인 조끼와 머리띠를 두른 시장 상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시장은 삶을 위한 엄마 오복의 투쟁의 공간이자, 노동자인 오복이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공간이다. 영화가 진행되며 오복이 누군가의 아내이자 엄마이자 딸이라는 것 역시 하나하나 짚어준다. 결국 오복은 가족 공동체의 일원이자, 노동자라는 노동 공동체의 일원으로서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은 지워진 존재다.
 
그런 오복의 삶은 성폭행을 당한 후 균열이 생겨난다. 오복은 피해 사실을 숨긴 채 홀로 끙끙 앓을 뿐이다. 가족인 딸에게 이야기하기까지도 오복에게는 두렵고 힘든 일이었다. 현실의 피해자들도 자신의 피해 사실을 꺼내는 것조차 어려운 게 사실이다.
 
영화는 오복이 당한 성폭행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피해를 전시하려 하지도 않는다. 오복이 성폭행을 당한 후 목욕탕과 집에서 몰래 하혈의 흔적을 지워나가는 모습, 어깨 부근에 남은 멍 자국 등을 통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암시할 뿐이다. 관객들은 그의 행적을 보며 어떤 일이 있었음을 추측할 뿐이다. 감독의 고민과 배려가 엿보이는 장면이다. 또한 카메라 역시 움직임을 줄이고 기교를 덜어냈기에 오히려 오복을 차분하고 진지하게 뒤따를 수 있다.
 
영화 '갈매기' 스틸컷. ㈜영화사 진진영화 '갈매기' 스틸컷. ㈜영화사 진진
이렇게 오복의 발걸음을 따르며 목격하게 되는 것은 피해를 겪은 후 오히려 공동체 속에서 지워지고 소외된 오복이며, 2차 가해 속에 놓인 오복이다. 공동체라는 집단의 구성원이 내뱉는 말들에 의해 짓밟히고 내쳐진다. 가족이든, 시장이든 어느 공동체 안에서 중년 여성의 자리는 없다.
 
오복이 성폭행을 당한 후 그를 향해 쏟아지는 말들 속에는 중년 여성 피해자의 위치가 어떠한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마치 오복의 피해가 남성의 미래, 오복보다 젊은 가해자의 미래, 시장 노동자들의 미래를 막는 것처럼 들린다. 투쟁을 위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참으라고 하는 말은 점잖게 들릴 정도로 그를 향한 2차 가해가 수없이 쏟아진다. 가해자는 적반하장으로 그렇게 사는 게 아니라며 오복에게 큰소리친다.
 
경찰조차 중년 여성 오복의 사건을 조사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심지어 가장 친밀한 공동체라 할 수 있는 가족인 오복의 남편 무일(이상희)은 오복에게 "성폭행은 여자가 응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는 망발을 서슴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현실에서 여성과 성폭력 피해자, 특히 중년 여성 피해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것이 단지 영화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더 끔찍하게 다가온다.
 
그렇다고 영화는 오복을 단순히 끔찍한 일을 겪고도 모두에게 외면당한 불쌍한 피해자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끝내지 않는다. 영화는 마지막 순간을 위해 달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갈매기' 스틸컷. ㈜영화사 진진영화 '갈매기' 스틸컷. ㈜영화사 진진
영화 시작부터 우리는 오복이라는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저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 혹은 생선가게의 주인으로 봤다. 성폭력 피해자로만 그를 마주했다. 그런 오복은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가 되어 '주오복'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가진 존재로서 날아오른다. 오롯이 자신으로서 발 딛고 선 주오복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비극의 순간들을 지나온 것이다.
 
오복이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존재를 온몸으로 발화하는 순간, 그의 이름 석 자가 뚜렷하게 관객들에게 새겨진다. 한 자 한 자 자신을 새겨 넣은 피켓을 들고, '생선가게 언니' '누군가의 아내' '엄마' '딸'로서가 아니라 '주오복'으로서 당당하게 가해자 앞에 선다. 그런 오복의 모습을 마주할 때, 그의 투쟁 여정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벅찬 감정마저 느끼게 된다.
 
영화 속 오복의 투쟁과 그 결과는 현실에 존재하는 수많은 갈매기와 같은 중년 여성들에게 다시 날아오를 수 있는 위로이자 응원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오복의 존재는 아름답고, 그의 투쟁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오복의 영화다. 그렇기에 오복을 연기한 배우 정애화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단단하게 자리 잡고 이야기를 끌고 나가며, 지난한 투쟁을 거쳐 한 사람의 여성이자 인간으로 다시 서기까지 그려낸 장면 하나하나에 정애화의 모든 것이 녹아있다.
 
74분 상영, 7월 28일 개봉, 15세 관람가.
영화 '갈매기' 포스터. ㈜영화사 진진영화 '갈매기' 포스터.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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