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부산 사상구 롯데택배 사상터미널 창고에서 택배 노동자들이 일을 하고 있다. 박진홍 기자부산지역에 폭염이 연일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창문이나 선풍기도 없는 찜통 같은 창고에서 일하던 택배 노동자가 결국 쓰러졌다.
동료 노동자들은 더위를 조금이나마 식힐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를 마련해 달라고 촉구하고 나섰다.
29일 오전 부산 사상구 롯데택배 사상터미널.
택배 상자가 성처럼 가득 쌓인 창고 안으로 들어가자, 마치 사우나에 들어온 듯 더운 공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창고 기둥에 붙은 온도계에는 무려 '38.9'라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29일 부산 사상구 롯데택배 사상터미널 창고 내부 온도계에 38.9도라는 숫자가 찍혀 있다. 박진홍 기자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를 지경이었지만, 택배 노동자들은 상자 사이사이에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상자를 화물차에 옮겨 실었다.
창고 외부는 길 건너 낙동강에서 넘어온 바람이 간혹 불어왔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일하는 창고 건물은 한쪽 벽면이 창문 없이 모두 막혀 있어 바람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창고 안에서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선풍기 역시 더운 바람을 내뿜고 있었다.
29일 부산 사상구 롯데택배 사상터미널 창고에서 택배 노동자들이 성처럼 쌓인 택배를 차에 옮겨 싣고 있다. 박진홍 기자지칠 대로 지친 노동자들은 상자를 옮기는 레일에 축 처진 채 기대앉아 잠시 숨을 돌렸다. 집에서 담아 온 시원한 물은 이미 미지근해졌지만, 갈증을 떨치기 위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대부분 라인이 화물차로 가득 차 있었지만, 유독 한 곳만 상자도 화물차도 없이 텅 비어있었다. 전날 오전 쓰러진 A(57)씨 자리였다.
전국택배노동조합 부산지부에 따르면, A씨는 28일 오전 9시쯤 출근해 화물차에 택배 물품을 싣던 중 20분 만에 어지럼증을 느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닥에 쓰러진 A씨 입에서 거품이 나왔고, 결국 A씨는 119구급대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졌다.
지난 28일 부산 사상구 롯데택배 사상터미널에서 쓰러진 택배 노동자 A씨가 119구급대에 의해 병원으로 이송되고 있다. 전국택배노조 부산지부 제공A씨는 '고열로 인한 온열 쇼크'라는 진단을 받고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A씨가 쓰러진 당시 창고 안 온도는 무려 39.4도였다.
A씨 동료 박천용씨는 "주말에 함께 공도 차고, 산악자전거를 탈 정도로 건강한 사람이 결국 더위에 쓰러졌다"며 "창고에서 보통 3시간을 근무하는데, 선풍기나 창문이 하나도 없어 코로나 예방용 마스크를 못 낄 정도로 덥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 화요일부터 선풍기라도 설치를 해달라고 사측에 얘기했는데 대답을 안 하다가, A씨가 쓰러지니 벽에 선풍기를 4개 달았다. 사고는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며 "창문도 정수기도 없는 이곳에서 계속 이대로 일하다가는 같은 사고를 또 겪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29일 부산 사상구 롯데택배 사상터미널 창고에서 택배 노동자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박진홍 기자택배 노동자들은 같은 택배 터미널 안에서도 창고 벽면이 뚫렸는지 막혔는지에 따라 근무환경이 확연히 갈린다고 입을 모았다. 실제로 A씨가 쓰러진 곳은 한쪽 벽이 창문도 없이 모두 막혀 있는 구조였지만,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창고는 벽 없이 사방이 뚫린 구조로 돼 있었다.
전국택배노조 부산지부 서영수 롯데사상지회장은 "노동자들끼리 사방이 뚫린 곳은 '특실', 벽이 막혀 공기가 안 통하는 곳은 '지하'라고 부른다"며 "39도가 넘는데 물도 안 주는 이곳에서 노동자들은 노예보다 열악하게 근무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29일 부산 사상구 롯데택배 사상대리점 창고 모습. 창문 없는 벽면 반대편 공간도 차량과 택배물품으로 둘러싸여 사실상 막혀 있다. 박진홍 기자결국 전국택배노조 부산지부는 이날 오전 A씨가 쓰러진 터미널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측에 창고에 선풍기와 환풍시설 설치는 물론, 에어컨과 제빙기 등이 있는 휴게시설 설치를 촉구했다. 전날 A씨가 쓰러진 창고 벽면에 선풍기를 4대 설치한 사측은, 노조에 선풍기 추가 설치 의사를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택배 노동자가 찜통더위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건 이곳뿐만이 아니다. 부산지역 대부분 택배 현장에는 노동자가 잠깐 더위를 식힐 수 있는 시설조차 없는 실정이다. 폭염 특보가 내려지면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외부 작업을 멈추고 쉬라는 정부 권고 역시, 배송 압박에 시달리는 택배 노동자들에겐 무용지물이다.
29일 부산 사상구 롯데택배 사상터미널 창고에서 한 택배 노동자가 차량 안에 택배 물품을 쌓고 있다. 박진홍 기자
전국택배노조 권용성 부산지부장은 "심지어 건물이 아닌 비닐하우스나 가림막 아래 레일 한두 개 깔아놓고 분류작업을 하는 창고들도 있다"며 "그런 곳에서 일하는 택배 노동자들은 더위에 더해 날아오는 먼지와도 사투를 벌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창고에서 택배를 실을 때도 문제지만, 물품을 배달할 때도 상시 온열 질환에 노출돼 있다"며 "지침대로 쉬다 보면 배달이 계속 밀리고, 1시간 만에 끝날 일이 3시간까지 걸리니 택배 노동자들은 땀이 흘러도 쉬지 않고 배송을 해야 하는 처지"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