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 연합뉴스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는 약 12년 전 국내 정신장애인에 대한 인권 침해 소지가 있는 법령과 제도, 관행 등을 개선하라고 권고했다. 10년이 넘게 지났지만 정신장애인이 처한 현실은 여전히 매우 열악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정신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부정적 인식으로 인해 자립의 기회가 막히는 데다, 가족들 또한 이들을 돌보기 위해 결혼을 포기하는 등 돌봄의 무게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20일 인권위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2021 정신장애인 인권보고서'를 발간했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정신장애인의 고용·주거 등 일상생활을 비롯해 정신의료기관 입·퇴원 과정, 치료 상황, 인식 수준, 재난상황 인권보호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정리했다"며 "실태조사와 연구는 물론, 법률 전문가·정신과 의사·사회복지 전문가·현장 실무자·정신장애인 당사자·가족 등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청취했다"고 설명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정신장애인의 수는 계속 증가했다. 2008년 33만 3788명(중증 정신질환자 32만 1753명, 정신장애인 7만 6618명)에서 2017년 42만 7370명(중증 정신질환자 41만 8947명, 정신장애인 9만 2298명)으로 매년 조금씩 늘어났다.
OECD 국가의 정신 및 행동 장애 환자의 평균 재원 기간(2012~2018). 국가인권위원회 제공
반면 이들이 처한 현실은 열악했다. 2018년 기준 국내 정신장애인의 정신의료기관 평균 재원기간은 176.4일로 영국(35.2일), 네덜란드(9.6일), 프랑스(23.0일), 이탈리아(13.6일), 멕시코(28.6일) 등에 비해 매우 긴 편이었다. '비자의' 입원율 역시 32.1%로 높은 편이었으며, 퇴원 후 재입원 비율도 27.4%로 OECD 가입국 평균(12.0%)의 두 배 이상이었다.
심지어 10년 이상 입원하는 환자도 200여 명에 달했다. 인권위가 정신의료기관을 퇴원한 환자 9만 5944명을 대상으로 재원 기간을 조사한 결과 재원일 중앙값은 '31일'이었지만, 6개월 이상 입원하는 환자는 2만 709명으로 약 20%에 달했다.
더불어 정신장애인은 경제적 활동에서도 차별을 당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정신장애인의 월 평균 가구 소득은 180.4만 원으로 전체가구 평균(361.7만 원)의 절반에 그쳤고, 전체 장애인 가구 평균(242.1만 원)에 비해서도 현저히 낮은 수준이었다. 고용률은 15.7%로 장애인 전체 고용률(36.9%)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반면 전체 인구의 취업자 비율은 61.3%이다.
정신장애인 인권침해 유형별 진정접수 현황(2010~2019). 국가인권위원회 제공
주거 형태에 있어서도 정신장애인의 절반 가까이(48.5%)는 단독주택에 거주해 다른 유형의 장애인(평균 39.9%)에 비해 가장 높았고, 아파트에 사는 비율은 38.9%로 장애인 평균(48.4%)에 비해 상당히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반면 정신장애인의 공공임대주택 거주 비율은 16.0%로 장애 유형 중 가장 높았다.
정신장애인의 경우 살고 있는 집의 소유주로 '부모'인 경우가 33.7%에 달하는 등 가족들이 주거 부담을 함께 떠안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전체 장애인 평균이 13.7%인 점을 감안하면 다른 장애 유형에 비해 정신장애인 가족들의 주거 부담이 더 높음을 알 수 있다. 정신장애인 가족의 14%는 미혼으로 조사됐는데, 이 중 30%는 "장애가 있는 가족을 돌봐야 해서 결혼하지 않았다"고 응답했다.
정신장애인 가족의 3분의 2가량이 경제적인 생계 책임, 일상샐활 돌봄, 문제 발생 시 해결, 정신건강 관리 등에 부담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고, 이 중에서도 '경제적 부담'과 '심리적 부담'을 가장 크게 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신장애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사회적 편견도 높았다. 우리 국민의 83.2%는 "누구나 정신질환에 걸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정신질환자 이용 시설이 우리 동네에 들어와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비율은 39.0%에 그쳤다.
이 같은 인식에는 '대중매체'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조사됐다. 인권위가 무작위 추출한 622명을 대상으로 인식도 조사를 한 결과 정신장애인에 대한 편견의 원인 1위는 '대중매체' 였고, '직접 만나본 경험', '정신질환 치료 방법에 대한 설명을 접한 후', '주변 사람들의 태도로부터'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인권위는 "무엇보다 정신장애인과 그의 가족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건 정신장애인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이라며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은 위험하거나 무능할 것이라는 막연한 편견과 그에 기반한 자격증 취득 및 취업제한 법률은 정신장애인의 자립 기회를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보고서를 통해 인권 증진을 위한 4대 기본 원칙과 7대 핵심추진과제, 27개 정책과제를 제시했다"며 국무총리에게 "이에 기초해 정신장애인의 인권 보호와 증진을 위한 범정부적인 정책이 수립·이행되고 관계 법령이 개정될 수 있도록 관련 부처들을 유기적으로 조정하고 통합하라"고 권고했다.
인권위가 제시한 '4대 원칙'은 구체적으로 △인간존엄에 기반을 둔 자립과 자립의 보장 △국가의 정신장애인 인권에 대한 존중·보장·실현 의무 △비차별과 사회통합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지역사회 중심의 정신건강복지서비스 등이다.
인권위는 "우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를 경험하며 우울증과 무기력함과 같은 정신장애가 개인의 나약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사회적 변화와 구조 속에서 야기되는 것임을 이해하게 됐다"며 "그동안 정신장애인을 나와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는 이질적인 타인으로 생각하고 차별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이제는 이해하고 포용하는 마음으로 당사자의 권리를 존중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인권위는 2009년 '정신장애인 인권 보호와 증진을 위한 국가보고서'를 작성해 국내 정신장애인에 대한 인권 침해 소지가 있는 법령·제도·관행 개선을 권고한 바 있다.
이후 2013년 OECD 또한 "정신의료기관 및 시설에 장기적으로 입원하는 치료방식은 치료효과가 높지 않으므로 입원중심에서 지역사회 의료 중심으로 정신보건 모델을 변경하라"고 제언했고, 유엔 역시 "정신장애인의 자유박탈조치를 허용하는 현존 법령조항을 폐지하라"고 우리 정부에 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