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사보다는 재판을, 법률가들의 자극적인 한 마디 보다 법정 안의 공기를 읽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드립니다. '법정B컷'은 매일 쏟아지는 'A컷' 기사에 다 담지 못한 법정의 장면을 생생히 전달하는 공간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중요한 재판, 모두가 주목하지만 누구도 포착하지 못한 재판의 하이라이트들을 충실히 보도하겠습니다. [편집자 주]
황진환 기자
2021.3.15 '서울중앙지법 성폭력처벌법 강간등살인' A씨 공판 |
재판장 "다음 사건 A 피고인 나오세요. 자 우리 재판부 판사가 바뀌어서 공판절차를 갱신합니다. 피고인은 재판받는 동안 진술하지 않거나 각 답변을 거부할 수 있고 이익되는 사실을 진술할 수 있습니다. 주소나 기타 인적 사항 바뀐 거 있습니까?
A씨 "없습니다"
재 "검사님 공소사실 요지 말씀해주시죠"
검사 "이 사건 공소사실은 피고인이 1999년 7월 성명불상자와 함께 흰색 자동차를 운전하던 중 당시 20살이었던 피해자가 A씨의 승용차를 잘못 알고 탑승했고 하차를 요구했지만 A씨는 성폭행하기로 마음먹고 하차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
15일 서울중앙지법 소법정. 피고인의 이름이 불리자 법정 안 대기실에서 푸른색 수의 차림의 중년 남성 A(51)씨가 걸어 나옵니다. 백발에 안경을 낀 채 조용히 고개만 숙이고 있던 A씨. 그가 받는 혐의는 피해자를 성폭행하고 살인했다는 '강간 등 살인' 혐의입니다.
죄명 자체로도 끔찍하지만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가 재판 받는 사건이 무려 22년 전인 1999년에 발생했다는 점입니다. '20년도 더 된 사건인데 왜 이제야 1심 재판이 진행 중인 걸까?' 그 이유를 취재해봤습니다.
◇골프 연습장서 발견된 피해자, 사라진 범인
사건은 22년 전으로 돌아갑니다. 1999년 7월 6일 새벽 1시 무렵 목격자의 신고로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골프 연습장에서 당시 20살이었던 피해자가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됩니다. 머리를 포함한 온 몸은 상처투성이였고 하의가 벗겨져 있는 등 성폭행을 당한 흔적이 명확했습니다.
이 지역을 담당했던 서울 강남경찰서는 바로 수사에 나섰고 유일한 목격자인 골프장 연습장 직원으로부터 몇 가지 단서를 포착합니다. 범인은 흰색 자동차를 타고 왔고 범행 후 이 차를 타고 떠날 때 조수석에 사람이 있던 것으로 보아 일당은 최소 두 명 이상으로 추측된다는 것.
이를 기초로 수사한 결과, 피해자는 밤늦게 차를 기다리고 있다가 외관이 똑같은 흰색 차에 실수로 탔고 이 차의 운전자와 같이 탄 일행들이 피해자를 인적이 드문 골프 연습장으로 끌고 가 이러한 범행을 저지르고 현장을 곧바로 떠났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하지만 이 범행을 누가 저질렀는지 규명하는 데는 끝내 실패합니다. 유일한 목격자는 당시 겁에 질려 차 안에 숨어있던 터라 범인의 얼굴은 물론, 인상착의도 제대로 보지는 못했습니다. 당시는 CCTV조차 보편적으로 설치돼있지 않던 때라 범인의 동선 또한,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유일하게 상황을 기억할 피해자는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건 발생 나흘 만인 10일 숨졌습니다. 이후 결국 범인을 특정할 다른 단서를 찾지 못했고 이 사건은 '미제 사건'으로 분류돼 서울지방경찰청 캐비넷에 들어갑니다. 이때만 해도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그놈'은 영영 잡히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DNA는 남았다…범인은 연쇄 강도살인범
스마트이미지 제공
하지만 그로부터 17년의 시간이 흘러서 사건을 풀 실마리가 발견됩니다. 바로 그 어떤 진술이나 기록보다 명확한 증거인 'DNA' 였습니다. 골프장 사건의 피해자 신체에서 채취한 범인의 DNA가 당시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었던 A씨의 것과 일치하는 결과가 2016년 12월 나오게 된 겁니다.
이는 2010년 'DNA법'으로 불리는 DNA 신원확인정보의이용및보호에관한법률 시행 덕이 컸습니다. 법 시행 후 강력범죄 사건 같은 경우 검찰은 교도소에 복역하는 수형자의, 경찰은 미제사건의 DNA 정보를 각각 데이터베이스화하며 정기적으로 서로 일치하는 DNA가 있는지 교차 분석하는 시스템을 마련했습니다.
2003.1 수원지법 '강도살인' 혐의 A씨 1심 판결 中 |
미리 준비한 청테이프로 손과 발을 묶어 항거불능케 하고 피해자의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어 그 안에 있던 현금 10만 원, 신용카드를 빼앗아 이를 강제로 취했다. 계속하여 피해자에게 "비밀번호를 말하라"고 요구하며 무릎으로 피해자의 가슴과 목 부위를 누른 상태에서 주먹으로 배 부위를 수회 때리기도 했다. (중략) 피해자로부터 신용카드 비밀번호를 알아내려 했지만 실패한 후 수사기관에 대한 신고를 지연하기 위해 청테이프로 피해자의 손과 발 외에 입과 눈을 막고 몸통을 묶어 피해자는 그 무렵 현장에서 경부압박으로 인한 질식으로 사망하여 피해자를 살해했다 |
A씨는 당시 별도로 저지른 강도살인 혐의로 2003년 수원지법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형이 그대로 확정되며 복역 중이었는데요. 수법도 놀랄 만큼 1999년 사건과 유사했습니다.
2001년 8월부터 2002년 6월까지 서울 강남 일대를 차로 돌아다니며 택시나 차를 기다리는 행인들을 태워 돈을 뺏고 끔찍하게 폭행하는 일을 일삼아왔던 겁니다. 이렇게 금원을 갈취한 피해자만 10명을 넘고 이중 2명은 사망에 이르기까지 합니다.
말 그대로 '묻지마 강도살인'을 반복적으로 저지르고 다녔던 셈으로 이러한 정보를 종합적으로 넘어오며 본격 재기 수사가 이뤄졌고 서울경찰청 주요미제사건수사팀은 2017년 초 A씨를 정식 피의자로 입건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