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부장관 겸 대북특별대표. (사진=연합뉴스)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부차관 겸 대북특별대표가 오는 7~9일 우리나라를 방문해 대북접촉을 시도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북한의 냉랭한 반응으로 볼 때 전망은 회의적이다.
◇ 北 최선희 "미국과 마주앉을 필요 없다"…협상 문턱 높이기 비건 부장관의 북한 측 상대역인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은 지난 4일 담화를 내고 "조미(북미) 대화를 저들의 정치적 위기를 다루어 나가기 위한 도구로밖에 여기지 않는 미국과는 마주앉을 필요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미국의 독립기념일이자 비건 부장관의 방한을 앞두고 나온 이번 성명은 미국 내 일각에서 제기된 '10월의 뜻밖의 선물'(October Surprise) 맥락의 북미정상회담 가능성도 '잔꾀' 수준으로 일축했다.
최 부상은 한반도의 긴장감이 다시 고조되고 있음에도 "현 실태를 무시한 수뇌회담설이 여론화되고 있는데 대하여 아연함을 금할 수 없다"고도 했다.
이번 성명의 핵심적 의도는 협상 문턱을 높이려는 것이다. 성명은 '이미 이룩된 수뇌회담 합의', '대조선 적대시 정책', '판을 새롭게 짤 용단' 등을 언급했다.
기존 합의부터 준수하겠다는 의지와 전향적인 셈법 전환 없이는 대화에 나서지 않겠다며 미국의 선 조치를 요구한 것이다.
이는 비건 부장관이 최근 "우리는 아주 견고하고 세부적인 계획을 제시했으며 북한이 우리와 협상에 관여한다면 아주 빨리 진전을 볼 수 있을 것"이라며 북한에 넘긴 공을 되던진 격이다.
◇ 하노이 때보다도 협상조건 상향…전문가 "몸값 높이려 또 거부할 수도"최 부상은 특히 "우리의 비핵화 조치를 조건부적인 제재완화와 바꾸어먹을 수 있다고 보는 공상가들까지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해리 카지아니스 미국 국익연구소 국장이 최근 '스냅백'(비핵화 약속 위반시 제재 원상복귀) 방식으로 영변 핵시설 폐기와 대북제재 30% 해제를 맞교환하자고 예시한 것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지난해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에서 영변 핵시설 폐기를 대가로 일부 제재완화를 요구했던 사실에 비춰 협상 조건이 오히려 까다로워진 셈이다.
최 부상은 하노이 회담 결렬 직후 "앞으로 이런 기회가 다시 미국 측에 차려지겠는지에 대해서는 장담이 힘들다"면서 미국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차버렸다고 비판했던 장본인이다.
정대진 아주대 교수는 "현재 북미가 마주앉을만한 여건 조성은 안 된 상태이며 김정은 위원장은 향후 북미대화가 복원되더라도 거래호가를 높이기 위해 앞으로도 거부 의사를 반복적으로 표명할 가능성 높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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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건 '비둘기파' 불구하고 입지 좁아…대화 제안했지만 구체성은 없어 따라서 비건 부장관은 지난해 12월 방한 때와 마찬가지로 대북접촉에는 실패한 채 '빈손 귀국'할 공산이 크다.
그는 당시 최 부상과의 판문점 회동을 공개 제안했지만 북측은 끝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최근 볼턴 회고록을 통해서도 '비둘기파'(대화·협상파) 면모를 확인했지만 미 행정부 내 소수파인 현실도 함께 드러났다. 그는 최근에도 "외교의 문이 열려있다"며 대화를 촉구했지만 구체적 제안은 담지 못했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최근 국내 토론회에서 "트럼프 대통령쯤에서 정상회담을 하자고 해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비건이 와서 대화가 된 적이 경험적으로 없었고 현실적으로도 그런 구조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 새 외교안보팀과 첫 대북조율은 관심…워킹그룹 등 기조 전환 가능성다만 비건 부장관의 이번 방한은 한미 간 대북조율을 새롭게 할 가능성 측면에서 주목할 곳이 있다.
남북·북미관계가 원점으로 돌아갈 위기를 맞아 코로나19로 중단됐던 한미 간 대면외교가 재개됨으로써 보다 긴밀한 협의가 이뤄질 여건이 마련됐다. 여기에다 한국 측 외교안보 진용이 일신한 상황이라는 점도 기대감을 낳게 한다.
이와 관련,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최근 기자회견에서 미국 측과 한미워킹그룹 개선 논의가 있었음을 공개해 관심을 끌었다.
비건 부장관 방한 때 이에 대한 결론이 도출되는 등 북한에 나름대로 긍정적 신호를 발신할 경우 최소한 한반도 정국의 추가 악화는 막을 수 있을 전망이다.
최 부상의 이번 담화가 직설적 비난이나 막말 없이 비교적 절제된 표현으로 수위를 조절한 것도 비건 방한 이후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