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최숙현 선수가 마지막으로 남긴 카카오톡 메시지 (사진=이용 국회의원 제공)
어려서부터 운동을 시작했다.
중학교 시절부터 감독을 알았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가혹 행위와 폭행이 시작됐다. 실업팀 합류 후엔 더 심해졌다.
선배와 팀닥터도 모두 가해자였다. 대한체육회에 진정서를 제출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숙소, 훈련장, 경기장에서 가해자들을 만나야 했다. 인생의 전부를 걸었던 이곳에서 탈출할 방법이 없었다.
성과중심 엘리트 체육을 추구하는 대한민국에서 팀 내 문제를 밝히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지난해 심석희 선수의 사건 때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전문가들도 모르는 게 아니다. 하지만 바뀌지 않았다.
국내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 국가대표 출신이었던 고(故) 최숙현 선수는 뿌리 깊은 우리나라 체육계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줬다.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팀의 감독, 팀닥터, 선배의 폭언과 폭행에 시달렸던 최 선수는 지난 26일 숙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고 최숙현 선수 (사진=기산면 제공)
"근본적인 문제는 오래전부터 지적됐다. 우리나라 체육계는 소수 엘리트를 육성하는 구조이다 보니 어릴 때부터 엘리트 풀에 가둬 놓고 거기서 성인 선수가 될 때까지 키우는 구조다. 성적을 내려면 그런 시스템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국가인권위원회 김현수 스포츠인권특별조사단장도 이번 사건은 중요하다. 김 조사단장은 우리나라 엘리트체육의 고질적인 병폐를 바로잡지 않으면 피해자는 계속 나올 수 있다고 평가했다.
김 조사단장은 "엘리트로 선발되면 (해당 종목에서) 서로를 다 알게 된다. 어떤 경기장을 가더라도 지도자들끼리 잘 안다. 그런 사람이 임원이 되고, 같은 학교 출신으로 연결된다. 그런 구조에서 문제점을 제기하면 내부에서 배신한 이미지를 받게 된다"고 설명했다. 내부의 그 어떤 문제점도 외부로 알리기 어려운 구조라는 것이다.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가 실업팀 운동선수 1,25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실업팀 선수 인권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신체폭력과 언어폭력이 비일비재하게 이뤄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응답자 중 67%는 신체폭력에 아무런 행동을 하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선배나, 코치, 감독의 보복이 두렵기 때문이다.
신체 폭력에 대응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보복이 무서워서'가 26.4%로 가장 많았고 이어 '상대방이 불이익을 줄까 걱정되어서' 23.1%,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몰라서' 22% 순으로 나타났다.
(사진='실업팀 선수 인권실태조사' 캡처)
"선수는 억울한 일이나 비위 사건을 당하면 종목별 연맹에 문제를 제기하고, 거기서 해결이 안 되면 대한체육회 스포츠인권센터에 접수한다. 그런데 스포츠인권센터는 이걸 해당 연맹이나 협회에 다시 조사하라고 내려보낸다. 그러면 선수 입장에서는 가해자를 다시 만나야 한다."그동안 국내 체육계의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쓴소리를 해오던 스포츠문화연구소 최동호 소장의 생각도 비슷했다.
최 소장은 지금의 구조는 선수들이 대한체육회를 신뢰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사건이 터져도 결국 내부고발자 취급을 받는 구조 속에서는 고 최숙현 선수 사건처럼 무엇도 해결할 수 없다고 보았다.
최 소장은 지금 대한체육회의 제도는 구조적으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게 현실이라고 평가했다.
최윤희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이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 기대주로 가혹 행위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 최숙현 선수의 사망 사건에 관한 경위보고를 받기 위해 2일 오후 서울 송파구 대한체육회를 찾았다. 경위 보고에 앞서 김승호 대한체육회 사무총장(왼쪽)이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인력이 부족하다. 접수가 들어왔을 때 사안을 먼저 판단한다. 해당 시도나 연맹에서 할 수 있으면 이첩하는 사례도 있다. 고 최숙현 선수 사안처럼 중대하면 직접 조사를 한다. 모두 조사할 여력은 없다."대한체육회도 고충은 있다. 대한체육회 관계자는 스포츠인권센터를 설립해서 선수들의 피해사례를 접수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예산과 인력의 한계가 있다고 토로했다.
대한체육회는 고 최숙현 선수 사건이 심각하다고 판단해 여성 전문조사관을 파견해 피해자 측과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경찰 조사가 병행되면서 현실적으로 자체 조사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대한체육회의 설명이다.
독립적인 기구가 필요하다는데 이견은 없다. 2019년 1월 심석희 선수의 성폭력 피해 폭로는 독립기구 신설의 촉매로 작용했다.
문화체육관광부도 지난 4월 체육인의 인권 보호를 위한 스포츠윤리센터 설립에 착수했다. 지금처럼 선수들이 피해를 입지 않게 상설 독립기구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대한체육회의 스포츠인권센터 등 기존에 선수들의 고충을 해결하던 기구는 스포츠윤리센터로 통합된다. 스포츠윤리센터는 올 8월 공식 출범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고 최숙현 선수에게 8월은 오지 않았다.
고 최숙현 선수의 2016년 증명사진. (사진=최숙현 선수 지인 제공/연합뉴스)
"문제가 생기면 그냥 경찰서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딱히 연맹에서 도움받을 것도 없고, 어차피 경찰서로 넘어 갈 거니까요...제도가 있어도 믿음이 없으면 그 제도를 쓰지 못 할 것 같아요. 아무리 익명을 보장한다 해도, 결국은 사건을 해결하려면 가해자와 피해자가 누군지 알아야 해결되잖아요.
예전에 선수가 무슨 일이 있어서 자기 회사에 이야기를 했는데요. 그때는 피해 보는 건 선수였어요. 회사는 감독, 코치 말만 들어줬지. 선수 입장은 잘 안 들어주더라고요. 문제가 안에서 잘 풀릴 거라고 기대할 수 없죠."- 2019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실업팀 선수 인권실태조사'에 실린 익명의 35세 실업선수의 인터뷰 내용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