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악순환 반복하는 언론 '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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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탄생-격리-피해자 지원' 프레이밍 반복
반복되는 범죄 보도 악순환에 사회 구조적 원인 탐구·피해자 소외
성범죄에 대한 무관심이 만든 'n번방'…기득권 문제 짚어야

텔레그램에 '박사방'을 열고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착취 범죄를 저지른 '박사' 조주빈(25)이 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종로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는 가운데 경찰서 앞에서 조주빈 및 텔레그램 성착취자의 강력처벌을 요구하는 시민들이 손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이한형 기자)

 

여성 성 착취 범죄가 이뤄진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의 신상이 공개된 이후 조주빈의 악마화·신상 보도가 이어지며 디지털 성범죄의 초점이 '개인'으로 옮겨갔다. 이에 'n번방', '박사방'의 공범은 물론 그들을 만들어 낸 근본 원인을 뿌리 뽑을 수 있을지, 피해자를 온전히 보호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여성을 협박해 성 착취 영상물을 텔레그램에서 제작·판매·구입하는 데 수십 만 명이 가담한 성범죄인 이른바 'n번방', '박사방' 사건에 관한 보도가 쏟아지고 있다. 'n번방', '박사방'은 사실상 새로운 문제가 아닌 오래된 병폐처럼 사회에 들러붙어 있는 '성범죄'다.

생산-유통-소비의 반복되는 구조에서 디지털이라는 요소가 끼어들면서 'n번방', '박사방' 그리고 그 이전 '소라넷'이라는 형태의 디지털 성범죄가 생겨났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90년대 나온 PC통신이 있다. 이러한 행위 근저에 있는 '야동 문화'는 여성들의 성을 불법적으로 착취해 만든 불법 촬영물을 일종의 '남성 취향'이 되게끔 이끌었다. 이를 통해 디지털 성범죄가 웹하드, 'n번방', '박사방'과 같이 하나의 '산업'으로 발전했다.

문제는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과 해법이 실질적으로 마련됐는가 하는 점이다.

메신저 텔레그램에서 미성년자를 비롯해 수많은 여성의 성착취물을 제작하고 유포한 혐의를 받는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25)이 25일 오전 검찰 송치를 위해 서울 종로경찰서를 나와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이한형 기자)

 

◇ '악마의 탄생-격리-피해자 지원' 프레이밍의 반복

이번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 신상 공개 이후 보도 행태에서 볼 수 있듯이 범죄가 발생할 때 언론은 범죄자·가해자 개인을 '악마화'하거나 범행과 무관한 가해자의 신상을 세세하게 보도한다. 이러한 보도는 가해자 한 사람에게 주목하도록 만듦으로써 사건의 본질을 건드리지 못한다.

가해자의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녹아들면서 가해자에게는 새로운 '서사'가 생겨난다. 범죄의 재구성 속에 범죄자가 새로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면서 사건도, 사건의 원인도, 피해자도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26만 명의 공범이 존재하는 범죄, 그리고 그 이전부터 반복된 범죄의 뿌리를 살펴볼 수 없게끔 만든다.

언론과학연구(2010년 6월)에 실린 '뉴스 미디어가 재현하는 범죄현실: 아동대상 성폭력 범죄의 프레이밍'에서 양정혜 계명대학교 광고홍보학과 교수는 뉴스 프레임들이 집합적으로 구성하는 범죄 현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흉악한 정신이상자들에 의해 사회질서가 위협을 받았지만 처벌 강화 법규를 마련하고 과학적 수사를 하게 되면 일탈자들을 사회와 격리할 수 있고, 피해자에 대한 지원을 제공해 사회는 다시 질서를 찾고 정상적인 일상으로 복귀한다는 스토리 구조를 공통으로 드러낸다."

양 교수는 "이 같은 프레이밍은 성범죄에 대해 다수 공중이 이미 형성해 있는 선입견, 즉 성폭력범은 모르는 사람, 사이코패스,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으로 강하게 인식시킨다"며 "범죄자는 '우리'와는 다른 낯선 '그들'이며 치안이 부실한 곳에서 아이들을 노리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재확인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성인물을 포함해 몰래카메라 등 각종 성범죄를 공유하는 사이트 '소라넷'. 디지털성범죄아웃(DSO)의 활동으로 지난 2016년 4월 '소라넷' 사이트가 폐쇄됐으나, 제2의 소라넷이 등장해 디지털 성범죄가 유통되고 소비되고 있다. (사진=자료사진)

 

◇ 반복되는 범죄 보도 프레이밍에 사회 구조적 원인 탐구·피해자 소외

언론의 반복되는 범죄 보도 프레이밍이 가진 문제점은 이처럼 사회 구조적인 원인을 파고드는 일에서 멀어지도록 한다는 데 있다. 이번 'n번방', '박사방'처럼 이름만 달리할 뿐 우리 사회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성범죄를 끝내지 못하는 것이다.

한국범죄심리연구(2018) 중 '여성대상 범죄 보도가 범죄와 형벌에 관한 인식에 미치는 영향'에서 이재영 세한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와 유영재 중원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보도의 내용이 개인적 차원에 머무른다면 결국 우리 사회에서 여성 살해 사건이 발생하는 사회 구조적인 원인과 환경의 문제를 탐구하고 이에 대한 사회적 대응을 촉구하는 움직임은 점차 소외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회 구조적인 원인을 짚어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또 다른 문제는 '피해자'에 대한 소외다. 디지털 성범죄를 비롯한 성범죄에는 사회적으로 납득할 만한 피해자인지, 피해자는 과연 순결한지 등을 평가하는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경찰학연구 제19권 제3호(2019) 중 '언론 보도에 나타난 여성 범죄피해자 비난에 대한 연구'에서 이재영 세한대학교 경찰행정학과 조교수는 "피해자에 대한 비난의 표현들은 우리 사회의 가치 체제를 반영하기도 하지만 부정적인 가치체제나 시스템을 유지하는 장치가 될 수 있다"며 "이러한 시스템은 친밀한 여성에 대한 폭력을 허용하는 문화를 형성하는 악순환에 기여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양정혜 교수는 "뉴스 프레임 분석에서 드러나는 또 하나의 발견은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라며 "스스로가 아닌 타인에 의해 말해지는 피해자와 직계 가족들은 시종일관 온정의 손길이 필요한 나약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남아있게 된다"고 말했다.

25일 인터넷 메신저 텔레그램에서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의 성 착취물을 제작 및 유포한 혐의를 받는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25)이 탄 차량이 서울 종로경찰서를 나와 검찰 유치장으로 향하자 시민들이 조주빈의 강력처벌을 촉구하며 피켓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이한형 기자)

 

◇ 성범죄에 대한 무관심이 만든 'n번방'…기득권 문제 짚어야 해

결국 사건을 보도할 때 개인적 차원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사회적 차원에서 문제의 근원을 찾아 다뤄야 반복되는 범죄를 막을 수 있다.

이재영·유영재 교수는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가해자를 옹호하는 범죄 보도 내용은 사건의 본질을 흐리고 오히려 사건의 발생 원인을 피해자에게 돌리거나 가해자의 책임을 약화해 범죄·형벌에 대한 편파적 인식을 생성할 수 있다"며 "보도내용들이 엄격한 기준에 의해 사전에 검토되고 자제돼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보도가 피해자·가해자와 관련한 개인적 차원의 내용에 치중한다면 사건에 대한 사회적 대응을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다"며 "문제가 사회적으로 해결되지 못하고 유사한 사건이 반복적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김하정 언론인권센터 사무차장은 26일 '박사방 사건, 언론은 어디에 주목하는가' 칼럼을 통해 "성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반복됐던 가해자 개인에 대한 비난과 혐오,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는 '사회 구조적' 문제보다 '개인'에 집중하게 했다"며 "보도 과정에서도 가해자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촉구하기보다는 사생활과 관련된 선정적인 보도로 이어졌고, 이는 개선을 위해 힘써야 할 법원·국회 등의 역할을 유보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비판했다.

그는 "본질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운영자 개인 혐의보다 가담한 집단 전체와 시스템을 향해야 한다"며 "분노와 혐오에 가려질 수 있는 구조적인 문제를 들춰내고 국민의 관심이 계속 이어질 수 있는 끈질긴 취재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언론이 '디지털 성범죄'를 공동체의 안전을 위한 관점으로 다루고 있는지 그들의 시선을 지켜볼 차례"라고 말했다.

권순택 언론개혁시민연대 활동가는 "언론은 'n번방' 사건이 한국사회의 성범죄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됐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며 "혜화역에서 '불법 동영상 처벌'에 대한 시위가 벌어졌을 때, 단순히 그 세력이 '급진적인 페미니스트'라며 이야기조차 들어주지 않았던 기득권들의 문제를 짚어야 한다. 그리고 그 같은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어떤 목소리들이 배제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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