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비들의 정월 초하루나기는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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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소장 일기자료 최초 공개

화주역(주역괘)은 선비들이 점을 칠 때 많이 활용했다.(사진=한국국학진흥원이 외부에 처음 공개)

 

조선 선비들은 정월 초하루를 어떻게 보냈을까?

한국국학진흥원이 설을 맞아 소장하고 있는 일기자료를 통해 본 선비들의 정월 초하루나기를 23일 공개했다.

◇ 섣달그믐에 제사를 지내다

1733년(영조 9년) 12월 30일 영남 남인을 대표하는 권상일(1679~1759)은 정월 초하루가 아닌 설 전에 가묘(家廟)에 제사를 지냈다.

권상일은 '청대일기'에서 "정성이 있으면 귀신이 있고 정성이 없으면 귀신이 없다"라는 주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설날 아침에 제사를 지내면 세배를 다니느라 세주(歲酒)를 마셔서 마음이 흐트러지기 때문에 정월 초하루 제사는 섣달그믐에 지내고 설날에는 아침 일찍 떡과 탕을 마련해 차례를 지내는 것이 온당하다고 했다.

◇ 설날 과음에 반성, 역질로 제사를 못지내다

설날에는 아침 일찍 조상에게 제사지내고 친척 어른을 방문해 술을 받아 마시거나 사당을 배알하는 것이 선비들의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선비여도 술을 마시면 행동이 흐트러지기 마련이다.

1615년(광해군 7년) 1월 2일 장흥효가 쓴 '경당일기'에는 "과음으로 심지(心志)를 어둡게 하였고 위의(威儀)을 잃었다"라고 반성하는 인간적인 모습이 그려져 있다.

또 역질(전염병)이 돌아 설날 제사를 지낼 수 없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김강계가 쓴 '매원일기'에는 1610년(광해군 2년) 경술년 새해가 되었지만 집안에 역질(전염병)이 돌아 제사를 지내지 못하고 형제들이 사당을 보며 참배만 했다는 기록이 있다.

◇ 선비들도 신년 운세를 보았다?

조선시대 선비들도 새해의 복운을 기원하며 시초첨(蓍草占, 산가지나 서죽으로 셈하여 치는 주역점)을 활용해 운세를 보았다.

1846년(헌종 12년) 서찬규(1825~1905)는 정사년 설날을 맞아 닭이 울 무렵 조모와 부모님께 세배하고 차례를 지낸 뒤 점을 친 내용을 자신의 '임재일기'에 적어 놓았다.

설날을 맞아 자신과 기족, 공동체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선비들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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