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조국 가족 인권침해 조사 청원'을 공문으로 내려보낸 것을 두고 공방이 이어지는 가운데, 당사자인 인권위가 침묵을 깨고 진실 규명에 나섰다.
인권위가 공개한 공문은 청와대의 기존 해명을 뒤집는 것일 뿐 아니라, 청와대가 국민들에게 인권위의 답변을 왜곡해 발표한 내용이 포함돼 있어 파장이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 "인권위장이 조국 청원 답해달라" 요구에 인권위 거절, 靑 다음날 공문 또 보내
(사진=국가인권위원회 제공)
인권위는 지난 7~13일 날짜별로 청와대와 주고받은 공문의 일시와 내용을 16일 공개했다. 청와대의 해명이 나온 직후 언론들과의 접촉을 일체 피하던 인권위가 이틀 만에 침묵을 깬 것이다.
인권위에 따르면 청와대는 지난 7일 인권위에 대통령 비서실 명의로 "조국 가족 인권침해와 관련한 국민 청원의 답변 요건이 달성됐으니, 최영애 인권위원장이 답변을 해달라"는 협조 공문을 보냈다.
독립 기구인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이 직접 청와대 국민 청원에 답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임에도 청와대가 이를 해달라고 특별히 요청한 것이다.
이에 인권위는 다음날인 8일 회신 공문을 보내 '거부' 의사를 명백히 했다.
인권위는 위원장의 직접 답변이 어려운 것은 물론, 청원자가 익명이기 때문에 진정 제기의 기본 요건도 갖추지 못했다며 불가 입장을 밝혔다.
인권위는 "진정제기 요건을 갖춰 행정상 이송(이첩)이 이루어져 조사개시 요건을 갖춘 경우에만 진정으로 접수해 조사가 가능하다"는 설명과 함께 '국가인권위원회법 제32조'에 따라 진정이 익명이나 가명으로 제출된 경우에는 각하된다는 규정도 덧붙였다.
인권위 관계자는 CBS와의 통화에서 "통상의 경우 인권위법상 각하 형식 요건을 설명하는 단순한 안내를 했다"며 "익명 청원은 조사할 수도 없다. 요건을 갖춰야지 할 수 있다는 규정을 안내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인권위가 이를 통보한 다음 날인 9일, 청와대는 또 다른 공문을 보냈다. 공문에는 "조국 가족 인권침해 관련 국민 청원을 이첩한다"는 내용과 함께 청원 내용이 첨부돼 있었다.
그런데 청와대는 이첩 공문을 보낸 당일 인권위에 전화를 걸어 "착오가 있었다"며 돌연 공문을 폐기해달라고 구두로 요청했다.
이에 인권위는 "부처 간 주고받은 공문은 구두상 폐기가 불가능하며, 정식으로 공문을 보내야 한다"고 이번에도 원론적으로 답변했다.
이로부터 나흘이 지난 13일, 청와대는 인권위에 "9일자 공문이 착오로 송부된 것이므로 폐기를 요청한다"고 공문을 보냈다. 이에 인권위는 당일(13일) 청와대 요청을 받아들여 9일 받은 공문을 반송처리했다.
◇ 뒤로 폐기해달라 수습한 날, 국민앞에서 인권위가 조사할 것처럼 곡해해 발표
강정수 청와대 디지털 소통센터장이 13일 '조국 장관 임명 촉구 및 임명 반대 청원'에 대한 조치를 발표하는 모습. (사진= 청와대 페이스북 캡처)
문제는 청와대가 인권위에 "이첩이 착오이니 폐기해달라"는 공문을 보내며 수습하던 13일, 국민에게는 전혀 다른 맥락의 왜곡된 발표를 했다는 점이다.
청와대는 이날 오전 10시부터 공개되는 엠바고 자료에서 '조국 가족의 인권침해 인권위 조사 청원에 대한 답변'을 대대적으로 발표하며 SNS를 통해 영상을 공개했다.
강정수 청와대 디지털소통센터장은 영상에서 "청원과 동참하신 국민들의 청원 내용을 담아 대통령비서실장 명의로 국가인권위원에 공문을 송부했다"며 "인권위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접수된 위 청원 내용이 인권 침해에 관한 사안으로 판단되면 조사에 착수할 수 있다고 전해왔다"고 밝혔다.
전후 맥락상 이는 명백히 왜곡된 답변이다. 인권위가 청원 답변을 해달라는 청와대의 1차 요구도 정식으로 '불가능하다'고 밝혔고, 2차로 내려보낸 이첩 공문은 회수했음에도 이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인권위는 조사 개시의 원론적인 규정을 안내했을 뿐이었지만, 청와대는 "조사에 착수할 수도 있다"는 표현으로 가능성을 부여했다.
강 센터장은 말미에 "참고로 인권위법 제32조 제1항 제6호에 따라 익명으로 진정이 접수될 경우 진정사건을 각하하도록 규정하고 있어 실명으로 진정을 접수해야 조사를 할 수 있다고 밝혀왔다"고 덧붙였다.
이같은 발표 직후 청와대가 '대통령 비서실장' 명의의 실명으로 인권위에 진정을 접수했다는 보도들이 쏟아졌지만 청와대는 당일 발언을 수정하거나 해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뒤로는 인권위에 공문을 폐기해달라며 수습을 하던 청와대가 당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왜곡된 발표를 한 배경에 의구심이 증폭되고 있다.
애초 청와대가 인권위원장에게 이례적으로 직접 답변을 요구한 것부터, 인권위가 불가 방침을 밝혔음에도 다음날 또다시 이첩 공문을 내려보낸 것 자체가 독립 기관인 인권위에는 상당한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번 논란이 인권위의 독립성을 침해한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가운데 인권위도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청와대가 마치 조국 일가에 대한 인권위 조사를 예고한 것 같은 영상을 내보낸 데 대해 인권위에서는 부담을 느끼고 연이어 긴급 대책 회의를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가 인권위의 의도와 무관하게 곡해된 내용을 발표한 것에 대해 인권위 핵심 관계자는 "제가 해석하고 가치판단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면서도 "다만, 저희는 이런 이런 경우에 조사가 가능하다는 일반적인 절차를 안내했던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