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의 한 카페에서 영화 '윤희에게' 임대형 감독을 만났다. (사진=리틀빅픽쳐스 제공)
봄철인 4월까지 눈이 내려, 쌓이면 사람 키를 훌쩍 넘을 정도인 일본 북부 오타루를 배경으로 한다. 편지가 주요한 소재로 나오며, 첫사랑에 관한 멜로다. 영화를 거칠게 요약한 한두 줄만 보면, 일본 영화 '러브레터'(1995)와 '윤희에게'(2019)는 24년이란 시차만 있을 뿐 상당히 겹치는 부분이 많은 영화로 보인다.
그래서 영화의 출발점에 더 호기심이 생겼다. '윤희에게'를 시작하게 한 결정적인 이미지나, 영감을 준 게 무엇인지 궁금했다. 임대형 감독은 오타루 여행을 갔다가 할머니가 운영하고, 동네 할머니들이 단골인 담배 연기 자욱한 카페에 들렀다. 그러다 우연히 "눈이 언제쯤 그칠까요?"라는 한 할머니의 말을 들었다. 눈 내리는 게 일상인 곳인데 저런 말을 하는 이유는 막막함 때문이려나, 도로 생각했다. 그 막막한 정서에서 '윤희에게'가 시작됐다.
또한 '윤희에게'에서는 달(moon)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름에 달을 의미하는 한자(月)를 쓰는 인물이 나오고, 카메라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가늘어지기도 가득 차 오르기도 하는 달을 종종 비춘다. 영어 제목에도 달이 들어갔다. 'Moonlit Winter', 만월이라는 뜻이다.
지난 18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임대형 감독은 그때 경험한 오타루가 인상 깊어, 그 공간을 잘 담아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깊이 사랑했지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며 그저 그리워하는 것밖엔 도리가 없었던 두 사람의 애틋한 감정도 함께. 더불어 영화에서 달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들을 수 있었다.
◇ 담배 연기 자욱한 카페에서 힌트를 얻다임대형 감독은 첫 장편영화 연출작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2016) 개봉 직후였던 2017년 1월 '윤희에게'를 써 내려갔다. 영화의 주 무대는 일본 오타루다. 첫사랑 쥰(나카무라 유코)에게 편지를 받고 딸 새봄(김소혜 분)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윤희(김희애 분)의 이야기다. 임 감독은 오타루에 갔을 때 간 카페에서 인상적인 장면을 봤고, 거기서 '윤희에게'가 출발했다고 말했다.
"어떤 카페에 들어갔는데, 동네 할머니들이 마실 나오는 곳이었어요. 할머니가 운영하시고. 그 할머니들이 다 담배를 피워서 담배 연기가 자욱한 카페였는데, 한 분이 '눈이 언제쯤 그칠까요?'라고 하시더라고요. 여기가 1월부터 4월까지 눈이 오는 곳인데 어떻게 저런 말을 할까? 막막하니까 저런 말씀을 하시나 보다 했어요. 그런 막막한 정서가 제가 생각한 이 영화의 정서와 잘 어울리는 것 같았고, 공간에 대한 인상으로 남았어요. 이 공간을 영화에 담아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고요. 또, 소수자의 목소리를 담은 영화를 찍고 싶었어요. 그런 제 마음속 여러 가지 욕구가 모여서 차근차근 대본의 형태로 나오지 않았나 싶어요."
윤희와 쥰, 각각 한국과 일본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에 관해서도 자세한 설명을 들려줬다. 임 감독은 "한국과 일본이 정말 다른 나라이지만 둘 다 정말 배타적인 민족주의 국가이고 소수자 혐오, 차별이 일상화된 국가이고 또, 남성 중심적인 시스템이 아주 오랫동안 견고하게 확립된 국가인 것 같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했다"라고 밝혔다.
지난 14일 개봉한 영화 '윤희에게' (사진=영화사 달리기 제공)
이어, "이제 페미니즘이 시대정신이고 그래서 저도 창작자로서 부족하지만 지나칠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어떤 만용을 부려본 것"이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 세계적으로 페미니즘 이슈가 시대정신으로 있는데, 동아시아 여성들이 서로 연대하고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라는 언론 시사회에서 한 발언과 일맥상통한다.
할머니들이 주로 이용하는 카페에서 영감을 얻었기 때문일까. '윤희에게'에는 여느 영화에서 보기 드문, 독특한 매력이 있는 할머니 마사코(키노 하나)가 나온다. 쥰의 고모인 마사코는 작은 카페를 운영하며, 짬이 날 때는 SF 소설을 읽는다. 이 또한 임 감독이 영화에서 보고 싶었던 모습을 그려낸 것이다.
'저런 할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에서 출발한 마사코는 자연을 닮은 시선을 가진 인물이다. 임 감독은 "가장 어른스러우면서도, 가장 아이 같은 동심을 가진 분이기도 하다. 막막할 때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 하는 비범한 인물이다. 사회에 별로 없는, 그래서 영화에서라도 보지 않으면 우리가 어디서 볼까 싶은 인물"이라고 부연했다.
◇ 편지로 주고받는 애틋한 마음영화는 "윤희에게. 잘 지내니? 오랫동안 이렇게 묻고 싶었어"라는 쥰의 편지로 문을 연다. 영화 후반부에는 그 편지에 대한 윤희의 답장이 나온다. 편지 형식을 가져온 이유를 묻자, 임 감독은 원래 편지나 일기 같은 사적인 글을 좋아한다고 답했다. 특히 서간체 글을 좋아한다고.
임 감독은 "편지가 아주 중요한 모티프로 활용되는 영화를 초고에서부터 구상했던 것 같다. 정말 내밀한… 그 편지가 향하고 있는 상대방이 아니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둘만의 내밀한 감정이 담긴 글을 그냥 내레이션으로 읽어주면, 뭐랄까 사람들의 마음에 와닿을 거로 생각했다. 누구나 그런 경험은 있을 것이라서"라고 전했다.
쥰이 윤희에게 쓴 편지, 윤희가 쥰에게 쓴 편지는 내용도 다르지만 묻어나는 분위기도 제법 차이가 있다. 전자가 은유적이라면 후자는 꽤 직설적이다. 캐릭터에 따라 다르게 설정한 것이냐고 물으니 임 감독은 "네, 맞다"라며 미소지었다.
한일 혼혈인 쥰은 독신인 수의사로 일본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임 감독은 쥰을 "살아남기 위해 공부도 많이 했을" 인물이라고 표현했다. 반면 윤희는 대학도 가지 못했고 오빠(김학선 분)가 소개해 준 남자(유재명 분)와 결혼했다가 이혼했다. 그사이에 낳은 딸도 있다.
임 감독은 "둘의 캐릭터가 다르기에 편지를 쓴다면 좀 다르게 쓰지 않을까 했다. 윤희는 좀 더 직설적으로, 솔직하게, 꾸미지 않고 썼을 것 같다. 쥰은 조금 더 에둘러서, 조금 더 언어 표현을 유려하게… 자기가 볼 때도 납득해야 하니까 그렇게 쓰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
'윤희에게'는 우연히 한 통의 편지를 받은 윤희(김희애 분)가 잊고 지낸 첫사랑의 비밀스러운 기억을 찾아 딸 새봄(김소혜 분)과 함께 설원이 펼쳐진 여행지로 떠나는 감성 멜로다. (사진=영화사 달리기 제공)
◇ 누가 하든 똑같은 '사랑'"저는 이 영화가 윤희와 쥰의 러브 스토리라고 생각했어요. 명백하게 규정하고 시작했죠. 그렇지 않았으면 제가 이 영화를 찍을 하등의 이유가 없었을 것 같아요." 임 감독은 사랑이라는 감정에서 '누구'가 그렇게 중요한 걸까 생각했다. '누가 하는 사랑이든 크게 다를까. 결국 똑같다'는 시각으로 접근했다.
"윤희와 쥰이 오랫동안 서로 그리워해요. 보내지 못할 편지를 쓰고요. 어떻게 보면 (요새는) 메시지를 그냥 바로바로 주고받을 수 있는 빠른 속도의 시대잖아요. 근데 '이전 시대'의 사랑과 연애라고 하면, 뭐랄까 기다리고 기대하죠. 그런 시간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애틋하고요. 그런 감정을 담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윤희에게'는 12세 이상 관람가다. 한국 나이로 열두 살, 초등학교 5학년부터는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만큼 영화는 깨끗하고 무해한 인상이 강하며, 깊이 있는 멜로임에도 성애 묘사는 나타나지 않는다. 20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던 윤희와 쥰의 재회 때도 두 사람은 아주 짧게 인사를 하고, 조용히 걸을 뿐이다. 어떤 해후를 했는지는 관객의 상상에 맡긴다.
연출 의도가 명백히 있으리라고 추측했다. 확인하고 싶어 물으니, 임 감독은 두 사람이 '마침내' 만났다고 해서 어떤 대화나 성애 묘사를 꼭 보여줘야 할까, 의문이 들었다고 답했다. 20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내며 각자 풍파도 겪었을 두 사람의 표정에서, 그간의 일상에서, 서로에게 쓴 편지에서 관객들은 충분히 보지 않았겠냐는 설명이다. 아마도 '사랑'을.
"저희 영화 대사 중에 쥰이 무슨 꿈을 꿨냐는 고모 질문에 그냥 꿈속에서 같이 있다고 하는 게 있어요. 그냥 같이 있는 것만으로 감동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냥 같이 있는 게 정말 어려웠기 때문에.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과) 쉽게 산책하고 집에도 놀러 갈 수 있는데 왜 이 둘은 그게 그렇게 힘들었을까요. 그게 이 둘의 잘못이 아니고 사회 시스템의 잘못이 분명히 있다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위쪽부터 윤희 역의 김희애, 새봄 역의 김소혜, 경수 역의 성유빈 (사진=영화사 달리기 제공)
둘이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지보다 앞으로 두 사람에게 펼쳐질 삶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첫사랑을 다시 마주치고 돌아온 여행 후, 윤희의 태도가 달라진 이유다. 오빠가 소개한 직장을 그만두고 자기 힘으로 새 일을 찾아보기 시작하는 게 대표적이다.
임 감독은 "과거 멈췄던 시계가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라며 "윤희가 지금까지 자기 자신을 학대하고 벌주면서 살아왔다고 했는데, 그 만남 이후로 (자기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되지 않았을까. 한 번 잘못 꿴 단추를 다시 끼운 게 아닌가. 20년이 지나서 비로소 자기 삶을 시작할 수 있고, 그제야 쥰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 만남은 정말 중요하지만, 만나고 난 뒤의 디테일을 보여주는 것보다 앞으로의 삶을 보여주는 게 목표였다"라고 밝혔다.
◇ 그믐달에서 시작해 보름달이 되는 것처럼수의사로 일하는 쥰이 손님과 만났을 때 "오늘 달이 참 예쁘네요"라는 말이 등장한다. 누구나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연애하자는 의사를 전하는 손님을, 쥰은 거절한다. 한일 혼혈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살았던 본인의 이야기를 꺼내며, 손님에게 혹시 숨기는 게 있다면 계속 숨기고 살라고 한다. 일본인 입장에서는 한국인인데, 한국인 입장에서는 일본인으로 취급받은 쥰은 "이 사회, 저 사회 어디에서도 소속감을 얻을 수 없는 소수자"의 설움과 소외감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임 감독은 "쥰은 살아남기 위해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지금 독신으로 사는데 누군가에게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 일이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편지를 쓰며 윤희에게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을까. 털어놓을 사람이 없으니까"라며 "지금은 거절이지만 뭐랄까 쥰한테도 자기를 사랑해주고 자기를 받아줄 만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장면이다. 아마 이 영화에서 쥰이 자기 존재에 대해 남한테 처음으로 얘기하는 순간일 거다. 물론 좀 슬프지만"이라고 설명했다.
영화에서 '달'이 차지하는 의미가 큰 것 같다고 하자, 임 감독은 "이 영화에서는 달이 순서대로 간다. 쥰이 편지를 보낸 게 앞선 시점인데 거기 떠 있는 달은 그믐달이다. 그다음 한국에서 편지 받을 때 일상에서 보이는 달은 초승달이다. 그믐달→초승달→반달에서 점점 차올라서 마침내 보름달이 되는 과정을 그린다"라고 답했다.
"달이 자기 존재를 숨기고 있다가 점점 지구에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영화 속 인물도 숨기지 않고 자기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그런 이야기인 것 같아요. 여러 가지 중의적 의미가 있죠. 관객분들이 어떻게 해석해서 보실지… 그게(관객들 해석이) 정답일 거 같아요. 달이 차올랐을 때, 보름달이 떴을 때 그 시점이 되게 중요해요. 보름달이 딱 뜨고 그다음부터 펼쳐지는 윤희의 삶. 달이 기울고 차고 그런 게 삶이 아닐까요. 저한테는 영화 찍는 일이 그렇듯이." <계속>
'윤희에게'의 각본을 쓰고 연출한 임대형 감독 (사진=리틀빅픽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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