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희 더불어민주당 의원. (사진=자료사진)
21대 총선을 앞두고 여야 모두 세대교체론이 불거진 가운데 여권 내에서는 87년 민주화항쟁을 이끈 이른바 86세대의 출마 여부를 놓고 논쟁이 일고 있다.
일각에서는 정치 일선에 오래 있었던 만큼 후배를 위해 길을 터줘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선 각자 살아온 삶의 궤적이 다른 만큼 세대 전체에 대한 책임론은 옳지 않다는 반론이 나오고 있다.
세대교체는 여야를 막론하고 모든 선거 때 마다 해결해야 할 숙제였다.
정당이 달라진 모습을 보이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인물 교체가 심심치 않게 이뤄졌기 때문이다.
외부 인재 영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96년 15대 총선에서는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을 이끌게 된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재오, 김문수 등 재야 운동권 인사와, 이회창, 이홍구, 홍준표 등을 영입한 것이 화제였다.
이들은 훗날 국무총리와 대선후보 등을 지내며 외부 수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정치권에 각인시켰다.
2000년대 첫 선거였던 16대 총선에서는 시민사회가 직접 낙천·낙선 운동을 펼치는 등 인적쇄신에 대한 요구가 그 이전보다 컸다.
당시 여당이던 새천년민주당은 고(故) 김상현 전 의원 등 중진 의원들을 중심으로 30%에 가까운 의원들을 낙천시키는 대신 현재 더불어민주당에서 원내대표를 역임한, 당시 30대이던 우상호, 이인영 등 86세대 주자를 대거 전면에 배치했다.
카리스마로 당을 장악한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결단이었다.
같은 시기 야당이던 한나라당의 이회창 총재는 총선시민연대에 "낙천 대상자를 비공개로 통보해 달라"는 등 물갈이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히는 한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회장 출신의 홍성우 변호사를 공천심사위원장으로 앉히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그 결과 김윤환, 이기택 등 중진들을 낙선시키는 대신 원희룡, 임태희, 오세훈 등 젊은 피를 수혈해 여의도에 입성시켰다.
17대 총선에서는 '미니 여당'이던 열린우리당이 47명에 불과하던 현역 의원 중 13명을 교체한 끝에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 등에 힘입어 152석이라는 과반 달성에 성공하기도 했다.
한나라당 역시 148명의 현역 의원 중 60명, 무려 40%를 교체하는 강수를 뒀으며, 당 대표이던 최병렬 전 의원의 불출마를 이끌어내는 모습도 보였다.
한나라당은 이후 18대 총선에서 박희태, 김덕룡, 맹형규 등 친이(친이명박)계와 김무성, 서청원, 홍사덕 등 현역 의원의 39%를, 당명을 새누리당을 바꾼 후 치른 19대 공천에서는 무려 46%를 교체하는 초강수를 둔 끝에 모두 원내 1당 자리를 거머쥐었다.
통합민주당은 18대 총선에서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인 김홍업 전 의원과 박지원 의원 등을 아예 공천 심사조차 하지 않았고, 이인제 의원을 낙천했다.
민주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치른 19대 총선에서도 강봉균, 신건 등 호남 의원을 낙천한데 이어 정세균, 정동영 등 중진 의원들을 험지인 수도권에 출마시켰다.
특히 17대부터 20대까지 모든 총선에서 초선의원 비율이 이긴 정당이 승리한 것으로 나타나면서 세대교체는 당연한 과제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문제는 최근 거론되기 시작한 용퇴론의 대상이 바로 이 세대교체를 통해 16~17대 국회 때 30~40대의 젊은 나이에 정치권의 중심 등장했던 86세대라는 점이다.
86세대의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에는 86세대가 김 전 대통령에 의해 이끌려 청와대와 여의도 등에서 20년 가까이 활동했던 만큼 역량을 발휘할 충분한 시간과 기회가 주어졌다는 주장이 담겨 있다.
최근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민주당 이철희 의원은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서 민주화를 이뤘고 2010년 촛불과 2017년 탄핵을 거치면서 86세대가 다른 어떤 세대 못지않게 성과를 거뒀다"며 "그렇다면 이제 마침표를 찍을 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일찌감치 국회의원이나 광역 지자체장이 됐거나, 장·차관 등 고위 정무직을 지낸 인물들은 충분한 기회를 누렸다는 얘기다.
여기에 86세대가 정치의 민주화라는 분야에서는 성과를 거뒀지만 이후의 흐름인 경제민주화나 공정 등 변하고 있는 시대적 가치에 대해서는 효율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못하다며 새 피 수혈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더불어민주당 확대간부회의. (사진=윤창원 기자/자료사진)
반면 86세대가 대부분 사회적으로 한창 왕성한 성과물을 도출해 낼 50대인 점을 감안할 때 나이와 학번으로 선을 그어서는 안 된다는 반론 또한 만만치 않다.
같은 86세대라고 하더라도 살아온 삶의 내용이 같지 않고, 정치권에서 맡았던 역할이나 성과 등이 다른 만큼 용퇴를 일괄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이다.
86세대이자 초선인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기업으로 치자면 50대 초중반이면 사회적으로는 한창 일 할, 부장이나 초임 이사급에 불과한데 그런 사람들을 전부 싸잡아서 용퇴해야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며 "20대에 와서야 전문성 등을 인정받아 정치권에 들어온 분들도 많다"고 말했다.
또 86세대 보다 더 나이나 당선 횟수가 많고, 중앙 정치 경력도 긴 선배 세대에 대한 정리가 없는 상황에서 어찌 보면 허리 역할을 하고 있는 특정 집단만을 겨냥한 퇴진 요구는 지나치다는 주장도 나온다.
민주당의 한 초선 의원은 "86세대의 퇴진을 기득권의 퇴진이라고 하는데 대통령이나 대선 후보는 물론 당대표도 내지 못한 상황에서 86세대를 기득권 세대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면이 있다"며 "특정 세대를 물러나라고 하기보다는 당에 좋은 신인이 들어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당 지도부는 공천을 앞두고 불필요한 잡음을 일으킬 수 있는 만큼 86세대 퇴진론에 대해서 신중한 입장이다.
인적쇄신을 기치로 한 세대교체론이 자칫 국민들에게 기득권 경쟁으로 비춰질 경우 총선에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당 지도부 관계자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불출마 여부는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이기 때문에 자기 역할이 더 있는지, 없는지 여부도 본인의 몫"이라며 "과거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던 총재 시절과 달리 이제는 경선과 경쟁의 시대인 만큼 당으로서는 인위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