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학살 흔적 지워지는 제주 성산일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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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기억과 추억 사이 ④] 서귀포시 성산일출봉
터진목서 수백 명 총살…우뭇개동산에선 30여명 학살
악명 높았던 서북청년단…주민 고문에 성범죄까지
4.3 학살터 위로 도로 닦이고, 관광지·주택가 들어서
도로 한편에 세워진 기념비만 애처롭게 서 있어

성산일출봉. 4.3 당시 이 일대에서 성산지역 주민 460여 명이 희생됐다. (사진=고상현 기자)

 

아름다운 풍광 때문에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필수 코스로 자리 잡은 성산일출봉. 4.3 당시 이 일대는 성산지역 주민 467명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희생당한 곳이지만, 현재 그날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도로 한구석에 마련된 4.3 기념비만 애처롭게 서 있을 뿐이다.

◇ 성산일출봉 인근 터진목서 수백 명 총살

23일 오후 서귀포시 성산읍 성산리에 있는 터진목 4.3 학살터. 4.3 당시엔 고성리에서 성산일출봉으로 이어지는 '물길'이 자리했던 이곳엔 현재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잇는 도로가 들어서 있다.

이 물길 위에서 1948년 11월부터 이듬해인 1949년 2월까지 온평리, 난산리, 수산리, 고성리 등 성산면 지역 주민 수백 명이 총살됐다. 푸른 물길은 금세 붉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이날 터진목에서 만난 정순호(74)씨의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도 한날 한시에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아버지가 4.3 광풍을 피해 육지에 갔다는 게 이유였다. 온평리에서 평범하게 감자 농사를 짓던 한 가정은 하루아침에 파괴됐다.

정순호(74)씨가 4.3 당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사진=고상현 기자)

 

"4.3 당시엔 젊은 남자라면 무조건 산사람(무장대)으로 몰아서 잡아갔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육지로 피신한 건데 경찰은 '도피자 가족'이라며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를 끌고 갔어요."

1948년 11월 22일 낮 어머니 등에 업혀 함께 끌려갔던 정씨는 이를 본 큰이모가 "시국이 이런데, 애를 업어 가면 어떡하느냐. 애를 놔두고 가라"고 해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이날 어머니와 할머니, 할아버지는 터진목에서 총살됐기 때문에 3살이던 정씨는 그때부터 큰이모와 이모부 손에서 자라야 했다.

"초등학교 입학하고 나서 우연히 어머니는 4.3 때 희생당하시고, 아버지는 육지로 피신하신 사실을 알았어요. 소풍도 제대로 못 가고 우울한 유년기를 보냈는데. 누구에게 하소연조차 못 하고…." 정씨는 한이 맺힌 듯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 악명 높았던 서북청년단…주민 고문에 성범죄까지

4.3 당시엔 터진목뿐만 아니라 인근 광치기 해변과 성산일출봉에서도 무고한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오조리 주민 30여명이 희생당한 우뭇개 동산. 현재는 성산일출봉 등산길이 조성돼 있다. (사진=고상현 기자)

 

성산일출봉 매표소와 등산길이 조성된 '우뭇개 동산'에선 1949년 1월 2일 오조리 주민 30여 명이 일명 '다이너마이트 사건'으로 집단 총살됐다.

해방 후 일본군이 버리고 간 다이너마이트를 소지하거나 다룰 줄 안다는 이유로 처형됐다. 군경이 자신들을 해할 줄 알고 어처구니없게도 주민들을 집단학살 한 것이다. 당시 오조리 주민들은 다이너마이트를 고기잡이용으로 사용하거나 무장대에 대응하기 위해 소지하고 있었다.

특히 4.3 당시 성산일출봉 인근 성산국민학교에는 서북청년단 특별중대의 사무실이 있어서 주민들의 피해가 컸다. 서북청년단은 광복 이후 북에서 월남한 사람들로 반공 우익 집단이다.

낡은 건물이 옛 성산국민학교. 현재 그 주위로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4.3 당시 악명을 떨쳤던 서북청년대의 사무실이었다. 현재 안내판 하나 없이 방치돼 있다. (사진=고상현 기자)

 

이들은 군복만 입었을 뿐 명찰과 계급장도 없었지만, 학교 옆 감자 창고에 주민들을 마구잡이로 끌고 가 고문과 성범죄를 일삼아 악명을 떨쳤다.

당시 고문을 수차례 받았던 한 주민은 "서북청년단원들이 좌우간 사람들을 잡아놓으면 무조건 두드려 패는 게 일이었고 죽어 나가는 사람도 많았다"라고 증언한다.

◇ 학살 흔적 사라지고 관광명소로 거듭난 성산일출봉

70여 년 전 주민 467명이 희생당한 성산일출봉 일대는 현재 제주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거듭났다. 성산일출봉에 하루에만 6000여명의 관람객이 찾는다.

주민들의 일상적인 학살 장소인 광치기 해안가는 사진 촬영을 하는 관광객들로 붐볐다. 다이너마이트 사건으로 억울하게 주민들이 희생당한 우뭇개 동산은 성산일출봉을 오르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주민 수백 명이 희생당한 터진목 위로 도로가 생겼다. (사진=고상현 기자)

 

특히 주민들의 비명이 끊이지 않았던 성산국민학교 건물 주위로 주택가가 들어섰고, 피로 물들었던 터진목 물길 위로는 길게 뻗은 도로가 생겼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성산일출봉 일대에선 학살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터진목 위로 들어선 도로 한편에 자리한 4.3 기념비는 그날의 비극을 묵묵히 전하고 있다.

다음은 지난 2012년 유가족들의 힘으로 세워진 4.3 기념비 내용이다.

"이곳은 제주 4.3사건 당시 성산읍 양민 4백여 명이 학살당한 곳이다. 그처럼 뼈아픈 역사의 현장은 그간 아무런 표석도 없이 방치됐고, 역사의 현장 일부가 도로로 편입돼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유족들은 다시는 그런 비극의 역사가 재연되지 않도록 조그만 표석을 세운다."
4.3기념비. 그 뒤로 성산일출봉이 보인다. (사진=고상현 기자)

 



제주 4.3 당시 수많은 사람이 군경의 총칼 앞에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제주 땅 곳곳이 이들의 무덤으로 변했습니다. 현재 관광지로 변한 그 무덤엔 4.3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많은 이가 제주에서 즐거운 추억을 남기지만, 71년 전 아픔을 기억하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요? CBS노컷뉴스는 매주 한차례씩 제주의 대표적인 관광지이자 4.3 학살터를 소개하며 4.3의 비극을 기억하겠습니다. 네 번째로 4.3 당시 467명의 주민이 희생된 성산일출봉을 찾았습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오늘도 어머니 유해 위로 비행기 뜨고 내린다
② 피로 물들었던 모래사장 지금은 제주 관광명소로
③ 대량학살 자행된 제주 정방폭포…지금도 울음 쏟아내다
④ 학살 흔적 지워지는 제주 성산일출봉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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