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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전쟁중 北 유학했던 베트남 인재들 꼭 만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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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회담, 베트남 외교의 또 다른 성과
베트남 통일 정부 출범 이후 강력 쇄신 필요해..
1986년 12월 전당대회서 도이머이 정책 채택
사회주의 체제 유지하면서 시장경제 받아들여
이후 연 평균 7% 성장 30년 가까이 유지
메트로폴 하노이 호텔, 경호 측면 효율
하롱베이 인천과 비슷. 베트남 주요 공단 多
베트남의 여러 측면, 북한에게 좋은 모델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1 (18:15~19:55)
■ 방송일 : 2019년 2월 27일 (수요일) 
■ 진 행 : 정관용 (국민대 특임교수)
■ 출 연 : 박연관 (한국외대 베트남어학과 교수)


◇ 정관용> 이제 1시간쯤 있으면 김정은 위원장, 트럼프 대통령 회담 그리고 만찬이 시작이 되겠죠. 그 사이에 우리는 베트남에 대해서 공부를 좀 한번 해 볼까 합니다. 베트남 어떤 나라인지 또 북한은 베트남에서 무엇을 얻어갈 것인지 김 위원장은 어떤 곳을 좀 눈여겨봐야 할지 두루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외교통상부 주베트남 한국대사관의 서기관을 지내셨고요. 우리 문재인 대통령 포함해서 역대 대통령 베트남 순방길에 동행해서 통역도 맡으시고 한국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학과의 박연관 교수를 오늘 초대했습니다. 교수님 어서 오십시오. 

◆ 박연관> 박연관입니다. 반갑습니다. 

◇ 정관용> 북미 정상회담 장소 후보로 이런저런 나라들이 거론되다가 베트남이다. 딱 그랬을 때 기분이 좋으셨겠어요? 

◆ 박연관> 일단 베트남 외교의 또 다른 큰 성과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됐죠. 

◇ 정관용> 오늘 베트남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우선 공부를 하면 면적이 얼마나 되고 인구가 얼마나 됩니까? 

◆ 박연관> 베트남의 면적은 33만 제곱킬로미터인데요. 

◇ 정관용> 그러면 한반도를 합친 거의 한 3배. 

◆ 박연관> 1. 5배. 남한의 한 3배 정도가 되겠습니다. 

◇ 정관용> 남한의 3배, 한반도의 1. 5배. 인구는? 

◆ 박연관> 인구는 대략 9700만 명 정도 되고요. 전 세계에서 인구 순위로 보면 한 15위 국가가 되겠습니다. 

◇ 정관용> 베트남이 거의 1억이군요. 

◆ 박연관> 해외에 있는 교포들이 한 450만 정도 되니까요. 베트남어를 쓰는 사람들은 1억이 넘는다고 볼 수 있겠죠. 
도널드 트럼프(왼쪽)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차 북미정상회담 첫날인 27일(현지시간) 베트남 하노이 소피텔 레전드 메트로폴 호텔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 정관용> 대략적인 역사를 좀 정리해 주세요. 베트남이 베트남으로서 처음 통일된 건 언제라고 봐야 됩니까? 

◆ 박연관> 베트남은 신화를 기준으로 하면 40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고요. 

◇ 정관용> 4000년. 

◆ 박연관> 이제 중국의 직접 지배를 기원전 111년부터 대략 한 1100년 가까이를 직접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동남아지역에서는 유일하게 중국의 문화, 이런 정치적 영향을 많이 받았던 곳이고요. 

◇ 정관용> 그래서 유교가 기본이죠, 문화적 전통도. 

◆ 박연관> 그렇습니다. 그래서 독립왕조를 수립한 이후에도 중국식의 관료체제, 과거시험제도랄지 또 문자를 한자로 썼다든지 이런 것들이 우리하고 굉장히 유사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 정관용> 오랫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왕조를 세우고 그리고 또 오랫동안 프랑스 식민지였죠? 

◆ 박연관> 네, 맞습니다. 19세기 후반에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기 시작을 했죠. 그리고 1945년에 이제 독립을 하게 되는데. 

◇ 정관용> 독립한 해는 우리랑 같네요. 

◆ 박연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제 독립할 당시에는 일본으로부터 실질적으로 독립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2차대전을 일으켰던 독일과 일본이 이제 2차대전을 일으켰었는데 그 유럽지역에서 독일이 승전을 하면서 동아시아 지역에 있었던 프랑스 식민지배했던 곳을 일본이 대신해서 들어오게 되거든요. 그래서 45년에 독립을 할 당시에는 일본의 세력으로부터 독립을 하게 됐고요. 그랬기 때문에 그 이후에 프랑스가 다시 한 번 베트남에 대한 식민주권을 주장하면서 베트남에 들어오게 되는데 그것을 베트남 스스로의 힘으로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치게 됩니다. 이게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었고요. 

◇ 정관용> 프랑스가 다시 한 번 침공을 했군요. 

◆ 박연관> 그렇습니다. 

◇ 정관용> 그런데 그걸 베트남이 자력으로 막아냈다? 

◆ 박연관> 그렇습니다. 

◇ 정관용> 그다음에 우리가 흔히 하는 월남전쟁 그거 왜 나게 된 겁니까, 그거? 

◆ 박연관> 이제 디엔비엔푸 전투가 끝난 후에 제네바 협정을 통해서 그 주요국들이 베트남을 2년 뒤에 1956년에 선거를 통해서 독립된 국가로 출범시키겠다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에 이제 미국은 베트남이 총선거를 치른다면 베트남에서 호치민 공산당이 정권을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라고 보고 이 지역에서 공산 세력의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서 1955년에 남쪽 베트남에 친미 정권을 수립하면서 베트남에 개입을 하게 됩니다. 

◇ 정관용> 그렇군요. 

◆ 박연관> 전투는 이제 1964년에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미국하고 북베트남하고의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고요. 1973년 1월에 파리 평화협정을 할 때까지 대략 한 8년 정도의 전쟁을 하게 됩니다. 

◇ 정관용>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베트남 국민들의 자발적 선택에 의한 정권 수립을 미국이 방해한 거군요. 

◆ 박연관> 역사적으로 봤을 때는 그런 측면이 있다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 정관용> 그래서 오랜 전쟁이 있었고 그 사이에 우리가 파병도 했고. 

◆ 박연관> 그렇습니다. 

◇ 정관용> 우리 그때 파병 규모가 꽤 됐죠? 

◆ 박연관> 저희가 연 인원 한 32만 명 정도 베트남전쟁에 참전했습니다. 

◇ 정관용> 그리고 그 전쟁 때 북한도 공식적으로 자기들이 거기 참여했다고 인정은 안 하지만 좀 갔다면서요? 

◆ 박연관> 네. 사실 베트남전쟁에 북한이 참전했다라고 하는 것은 최근에 밝혀진 일들인데요. 과거에는 그런 소문만 무성했었는데 베트남전쟁 당시에 북한군 조종사들이 한 200명 정도 베트남에서 활동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중에 14명은 사망을 해서 박장성이라는 곳에 묘지가 있었는데 2002년에 북한으로 유해는 다 송환이 됐고. 

◇ 정관용> 묘지터는 그대로 있다면서요? 

◆ 박연관> 네. 그건 기념을 하기 위해서 그대로 남겨져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정관용> 그럼 이 현대사를 놓고 보면 베트남은 미국하고 원수지간인 거고 우리하고도 원수지간인 거고 그렇죠? 북한하고는 공식적으로 인정은 안 되더라도 혈맹지간이었던 것이고. 그리고 전쟁 끝난 후에는 베트남도 공산당 정부가 들어섰으니까 북한과 베트남 사이도 좋았겠어요. 그렇죠? 

◆ 박연관> 그렇지 않습니다. 

◇ 정관용> 아니에요? 

◆ 박연관> 네. 베트남전쟁 당시에 북한은 베트남에 대해 많은 지원을 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조종사가 파견이 되기도 했었고 또 66년에서 69년 사이에 북한의 베트남에 대한 원조가 꽤 많았었는데 연간 한 2000만 불 가까운 그런 지원을 했었고 또 베트남으로부터 많은 유학생을 받아들여서 대략 한 2000명 이상의 베트남 유학생들을 교육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굉장히 좋은 관계를 맺었다라고 볼 수 있는데 사실 베트남이 공산화 75년 통일한 이후에 베트남과 캄보디아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고. 

◇ 정관용> 전쟁이 있었죠. 

◆ 박연관> 그렇습니다. 베트남 군대가 베트남에 들어가게 되고. 

◇ 정관용> 캄보디아에. 

◆ 박연관> 베트남 군대가 캄보디아에 들어가게 되고 또 중국과 베트남이 79년에 또 중월전쟁을 하게 됩니다. 

 


◇ 정관용> 중월 국경분쟁이 있었죠. 

◆ 박연관> 맞습니다. 분쟁뿐만이 아니라 전쟁으로 이어졌었죠. 그 중국의 군대가 당시에 지금 랑선성 동당역. 그러니까 지금. 

◇ 정관용> 김정은 위원장이 내린 곳. 

◆ 박연관> 그곳도 이제 군대가 내려왔던 루트 중의 하나였는데요. 그쪽을 통해서 이제 군대가 내려와서 당시에 랑선성의 성도인 곳까지도 다 침입을 했었습니다. 

◇ 정관용> 중국이 점령을 했어요. 

◆ 박연관> 네. 당시에 베트남의 주력 부대는 캄보디아에 가 있었기 때문에 그 전투를 막기 위해서 민병을 일으키기도 하고 정말 처절한 전쟁을 통해서 그 전쟁을 막아냈습니다. 

◇ 정관용> 그런데요? 그 과정에서 북한과 사이가 나빠졌어요? 

◆ 박연관> 네. 북한은 전통적으로 중국하고 사이가 좋은 편이었고요. 

◇ 정관용> 좋으니까 중국 편을 들었군요. 

◆ 박연관> 소련은 동남아지역에서 소련과 굉장히 가까운 그런 노선을 걷고 있었습니다. 

◇ 정관용> 베트남이 친소련이었죠? 

◆ 박연관> 그래서 사회주의권 국가들 중에서 소련과 중국이 패권 다툼을 벌이면서 동남아 지역에서 그런 역학관계에 의해서 베트남과 북한 간의 사이도 소원해지기 시작을 했죠. 

◇ 정관용> 그랬군요. 중국하고 베트남은 그렇게 전쟁까지 하다가 그다음에는 좀 좋아지지 않았나요? 

◆ 박연관> 네. 전쟁까지 했으니까 외교관계를 당연히 단절을 했고요. 1991년에 다시 중국하고 외교관계를 맺었습니다. 

◇ 정관용> 91년부터는 정상적 외교관계가 됐고. 우리가 흔히 도이머이라고 부르는 게 그게 우리말로는 뭐예요? 

◆ 박연관> 도이라는 단어는 바꾸다라는 뜻이고요. 머이는 새롭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새롭게 바꾸다. 그래서 우리말로 하면 쇄신이라는 단어에 제일 가깝습니다. 

◇ 정관용> 그건 언제부터 시작됐습니까, 또? 어떤 배경에서? 누구의 지도자의 결단이었습니까? 뭐였습니까? 

◆ 박연관> 75년에 이제 베트남이 공산화 통일이 되고요. 76년에 이제 통일 정부가 출범을 했습니다. 그리고 북쪽의 이제 사회주의식 경제 체제를 남쪽에도 이식을 하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마는 그러한 결과가 낳은 것은 식량 자립도 못 하고 굉장히 경제적으로 피폐한 그런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또 캄보디아의 군대가 들어가면서 미국이 베트남에 대한 엠바고 정책을 걸어놨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그런 경제협력을 하기에도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 있었고요. 그렇기 때문에 베트남으로서는 정말 전면적인 체제변화가 필요했고요. 1986년 12월 제6차 전당대회에서 도이머이 정책을 당시에 채택을 했습니다. 당시에 당서기장은 응우옌 반린이라고 하는 당서기장이었고요. 그분이 이제 최초의 도이머이 정책을 채택할 당시에는 정치와 경제 모든 분야에서 변화를 하겠다. 

◇ 정관용> 정치까지도? 

◆ 박연관> 네. 최초에는 그렇게 시작을 했습니다. 그분이 하셨던 말씀 중에 "지식인이여, 비판의 펜을 꺾지 말아라" 이런 표현이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과감하게 그런 지식인들의 비판도 받아들이겠다라는 취지가 처음에는 있었으나 그 이후에 이제 소련의 붕괴 그다음에 동유럽 국가들의 몰락. 

◇ 정관용> 사회주의권 붕괴. 

◆ 박연관> 그렇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체제, 정치 자체는 안정을 시켜야 되겠다라는 생각으로 좀 변화하게 돼서 정치체제는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경제체제는 시장경제 체제를 받아들이는 그러한 방식으로 변화가 됐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 정관용> 86년 도이머이 시작의 배경은 또 사실 중국의 개혁개방의 시작 아닐까요? 영향을 받았겠죠? 

◆ 박연관> 다 아시는 것처럼 이제 70년대 말,80년대 초부터 중국의 경제가. 

◇ 정관용> 등소평에 의해서 바뀌기 시작하지 않습니까? 

◆ 박연관> 그렇습니다. 그런 모습을 베트남도 많이 자극을 받았겠죠. 

◇ 정관용> 그리고 86년부터 지금 벌써 삼십 몇 년 아니겠습니까? 그 성과는 놀랄 만하죠? 

◆ 박연관> 그렇습니다. 매년 연 평균 한 7% 가까운 성장을 30년 가까이 이룩해 왔으니까 정말 과거하고 비교해 보면 그 도이머이 정책의 이전과 이후를 본다면 정말 큰 변화를 이끌어냈습니다. 

◇ 정관용> 그렇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미국과도 다시 수교를 하고 그리고 IMF나 월드뱅크 이런 국제적 금융기구와의 관계도 다 문을 열고. 

◆ 박연관> 그렇습니다. 베트남이 도이머이 정책을 86년에 채택은 했지만 본격적으로 이제 효과를 내기 시작한 것은 1989년에 캄보디아에 주둔했던 베트남군이 철군하면서부터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미국하고의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을 했고 1994년에 베트남에 처해졌던 엠바고정책이 이제 폐기가 되고. 
베트남 하노이 전경 (사진=연합뉴스 제공)

 


◇ 정관용> 규제가 해제되고. 

◆ 박연관> 그렇습니다. 그다음에 이제 1995년에 미국하고 수교를 하고 그다음에 2006년에 PNTR, 그러니까 항구적 교역정상화관계를 미국 의회에서 통과를 시킵니다. 그럼으로써 베트남하고 미국하고의 관계가 완전하게 정상화되는 그런 계기가 됐고요. 최근에는 군사 분야에 있어서의 협력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굉장히 관계가 발전했다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 정관용> 중국식 개혁개방 모델과 베트남식 개혁개방 모델을 비교할 때 베트남식 개혁개방 모델이 훨씬 외국 자본에게 개방적이고 이런 특징이 있다고 하던데 맞죠? 

◆ 박연관> 네. 베트남은 전쟁을 오래 했기 때문에 과거에 전쟁 상대국들이 참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과거의 어떤 관계에도 불구하고 도이머이 정책 실시 이후에는 과거를 접고 미래지향적으로 상호 존중에 기초하여 서로가 이익이 된다면 모든 나라와 협력하겠다라고 하는 외교정책을 천명합니다. 그래서 굉장히 개방적인 정책을 실시해 왔고 그것이 오늘날의 베트남의 경제 성과를 만들어낸 중요한 정책적인 방향이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 정관용> 역사적 배경부터 쭉 거슬러 왔는데 지난 한 20~30년. 특히 20년 정도를 돌이켜보면 아주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지금 베트남은 북한보다 미국하고 훨씬 친한 거 아니에요? 

◆ 박연관> 요즘의 국제관계라고 하는 것이 어떤 선언적인 의미의 관계보다는 실질적으로 얼마나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고 서로에게 이익을 얼마나 주고 있는지를 본다면 분명히 북한하고의 관계는 거의 전무한 상태고요. 미국하고의 관계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정상화 관계를 넘어서 군사 분야에 이르기까지 긴밀한 그런 민감한 분야까지 협력할 수 있는 그런 단계로 올라섰기 때문에 미국하고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발전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 정관용> 그리고 우리랑 비교하면 남북한하고 비교하면 베트남하고 우리가 훨씬 친한 거 아니에요? 우리나라 기업 엄청나게 나가 있죠? 

◆ 박연관> 그렇습니다. 베트남의 제1위의 투자 국가가 우리나라. 

◇ 정관용> 한국이죠. 

◆ 박연관> 우리나라이고요. 또 우리 입장에서 우리가 가장 많은 투자를 하고 있는 두 번째 대상국이 중국 다음으로 베트남입니다. 교역에 있어서도 2017년에 우리가 대략 한 640억 불 정도의 교류가 있었거든요. 그중에 우리가 무역 흑자를 본 것이 대략 한 320억 불.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네 번째 교역 대상국이고 세 번째 수출대상국입니다. 그러니 이 경제 분야에 있어서는 정말 뗄 수가 없는 그러한 협력관계가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정관용> 우리나라 수출의 세 번째가 베트남이다. 

◆ 박연관> 그렇습니다. 

◇ 정관용> 그리고 또 제가 들으니까 베트남의 삼성전자 하나가 베트남 전체 수출액의 20%라면서요? 

◆ 박연관> 맞습니다. 

◇ 정관용> 놀라워요. 

◆ 박연관> 그렇습니다. 

◇ 정관용> 우리가 부품을 수출해서 베트남에서 생산해서 세계 각지로 파는 이런 거 아니겠습니까? 

◆ 박연관> 네. 제가 알기로는 우리가 흔히 쓰는 스마트폰의 거의 한 50% 이상이 베트남에서 생산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정관용> 그건 삼성전자뿐 아니라 LG 등등 또 그다음에 섬유, 봉제 다 포함하면 베트남 경제의 거의 주축이 하나가 우리죠? 

◆ 박연관> 그렇습니다. 지금 여태까지 투자 누계를 보면 벌써 500억 불이 넘어서고 있고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1위의 투자국가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 한국의 기업들은 주로 베트남의 SOC 기간산업에 투자를 많이 했고 그다음에 또 제품을 생산하는 그런 제조업 분야에 진출을 해서 실제로 베트남의 경제 발전에 또 일자리를 창조하는 그런 측면에서 굉장히 많은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 정관용> 이제 장소 몇 군데 여쭤볼 건데 오늘 만찬 정상회담 열리는 메트로폴 하노이호텔, 이거 또 무슨 역사적 배경이나 뭐가 있나요? 

◆ 박연관> 메트로폴 하노이호텔은 1901년에 개장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베트남의 근현대사를 같이 한 그런 호텔인데요. 사실 최근에 지어진 베트남의 5성급 호텔에 비교하면 규모가 작고 또 시설이 그렇게 현대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지속적으로 이렇게 리노베이션을 해 와서 굉장히 고풍스럽고 그런 것으로 알려져 있고 또 베트남 개혁개방 초기에는 정말 이렇다 할 만한 호텔이 없었는데 그 당시에는 유일한 5성급 호텔, 하노이에 있었던 그런 호텔로 알려져 있습니다. 

◇ 정관용>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는 호텔을 일부러 선택한 의미도 있겠죠? 

◆ 박연관> 그런 측면도 있겠고 사실 이제 보도가 많이 됐습니다마는 거기가 건축물로 둘러싸여서 M자 모양으로 가운데 정원이 있거든요. 그래서 좀 경호라는 측면에서도 굉장히 효율적인 곳인 것 같고. 또 가볍게 이렇게 산책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마련된 곳이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 정관용> 오늘 김정은 위원장은 호텔에 계속 있었는데 그 수행단은 하롱베이하고 어디를 갔다고요? 

◆ 박연관> 하이퐁. 
한국외대 베트남어학과 박연관 교수 (사진=시사자키 제작진 제공)

 


◇ 정관용> 하롱베이는 관광지잖아요. 

◆ 박연관> 그렇습니다. 

◇ 정관용> 하노이 가까워요? 

◆ 박연관> 하노이에서는 북동쪽으로 대략 한 180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고요. 

◇ 정관용> 이건 바닷가잖아요, 하롱베이는. 

◆ 박연관> 바닷가입니다. 바다 위의 섬들이 한 2000개가 있는 베트남 최대의 관광지입니다. 

◇ 정관용> 관광 명소죠. 그건 이제 관광 산업의 현장을 보러 갔을 거고 하이퐁은 뭐로 유명한가요? 

◆ 박연관> 하이퐁은 하노이에서 동쪽으로 대략 한 100km 정도 떨어져 있는 수도 하노이의 관문 역할을 하는 항구도시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보면 인천시와 같은 그런 비슷한 입지조건을 갖고 있고요. 또 최근에는 우리나라의 LG 등 많은 기업들이 그 공단에 진출해 있고 또 베트남의 아주 주요한 그런 공단들이 많이 설치돼 있는 그런 곳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 정관용> 베트남에도 이런 신흥 공단 지역이 여러 곳 있겠죠? 

◆ 박연관> 네. 수도 인근에도 있고요. 또 삼성이 진출해 있는 박닌성, 타이응우옌성. 그리고 또 남쪽에도 굉장히 많은 공단들이 있고 또 중부지역, 최근에는 또 호치민 주석의 고향인 베트남 북부 중에서는 약간 남쪽에 있는 곳인데 빈딴이라는 곳에도 한국 기업들이 많이 진출하고 있습니다. 

◇ 정관용> 아마도 트럼프 대통령은 지속해서 북한이 비핵화만 하면 베트남과 같은 엄청난 속도의 경제 성장이 가능하다. 이런 얘기를 계속하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 박연관> 그렇습니다. 

◇ 정관용> 또 그런 걸 모르지 않는 김정은 위원장이 정상회담 장소로 베트남을 오케이 했다는 것도 나도 그런 뜻이 있다는 거 아닐까요? 

◆ 박연관> 사실 북한 입장에서는 미국하고의 관계개선을 하는 데 있어서는 그 목적이 개혁개방과 경제 발전이라는 그런 목표를 갖고 있고 또 그런 측면에서 베트남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굉장히 좋은 모델이다라고 하는 생각은 분명히 갖고 있을 것 같습니다. 

◇ 정관용> 그렇죠. 게다가 우리가 베트남에 그렇게 엄청난 투자를 했다는 것. 이런 것도 다 모르지 않을 테니까. 

◆ 박연관> 그렇죠. 

◇ 정관용> 흔히 개혁개방으로 가면 우리의 역할 또 다 상징하는 바가 있는 것 같아요, 베트남이라는 장소가. 

◆ 박연관> 베트남은 남북한 관계에 기여할 수 있는 계기가 있기를 그동안 굉장히 많이 바랐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북한이 과거에 식량난으로 허덕일 때 우리나라가 북한에 식량을 지원했던 적이 있죠. 그때도 베트남이 베트남의 쌀을 한국이 구매해서 북한에 지원해 주기를 바란 적도 있고요. 그렇기 때문에 베트남 입장에서는 북한이 나중에 개혁개방을 한다면 그 베트남의 경험을 또 전달할 수 있는, 전수할 수 있는 그런 좋은 장소이기 때문에 그런 측면에서도 북한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정관용> 아무쪼록 이번 정상회담에서 좀 좋은 성과가 나와서 북한도 베트남처럼 잘 됐으면 좋겠고요. 마지막으로 지금 언론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어디 갈지 모른다, 어디 갈지 모른다. 막 계속 나오잖아요. 그렇게 언론에 거론되지 않은 곳 가운데 최고 전문가시니까 박연관 교수께서 김정은 위원장한테 여기를 좀 가봐라, 이건 좀 해라. 권하고 싶은 게 있으시다면. 

◆ 박연관> 사실 어떤 장소를 갔으면 좋겠다 이런 것보다는 사실 한 가지 이벤트를 좀 했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생각은 있습니다. 

◇ 정관용> 뭡니까? 

◆ 박연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베트남전쟁 당시에 북한이 베트남의 유학생을 데려간.. 2000명 이상 받아들였습니다. 

◇ 정관용> 전쟁 중인데도 그렇게 유학을 보냈군요. 베트남이. 

◆ 박연관> 당시에 호치민 주석은 언젠가는 베트남전쟁이 끝날 것이고 전쟁 이후에 베트남을 이끌고 갈 수 있는 지도자들을 길러야 된다라고 해서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해서 소련, 또 동유럽 그리고 또 북한으로 많은 유학생들을 파견을 했었거든요. 

◇ 정관용> 대단한 지도자입니다. 

◆ 박연관> 미래를 내다보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북한에서 공부했던 사람들은 참 젊은 시절에 북한 정부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으면서 굉장히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을 겁니다. 

◇ 정관용> 그렇겠죠. 

◆ 박연관> 그래서 지금은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을 텐데 이렇게 방문하는 계기에 그런 북한에 대해서 굉장히 우호의 감정을 갖고 있는 그런 유학생들을 초청해서 그런 만남을 갖는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도 굉장히 클 것이고 또 베트남과 북한 간의 관계가 최근에 많이 소원해 있는데 그런 것을 연결시켜줄 수 있는 중요한 그런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지 않겠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 정관용> 게다가 그분들이 아마도 베트남의 개혁개방 현장 일선을 누빈 사람들일 거 아니겠습니까? 

◆ 박연관> 그렇습니다. 

◇ 정관용> 그 경험을 북한에 전수해 줄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죠? 

◆ 박연관> 그렇습니다. 

◇ 정관용> 우리 박연관 교수의 이 제안과 인터뷰를 김정은 위원장한테 꼭 좀 전했으면 좋겠네요. 전쟁 중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이 젊은 인재들을 북한에 유학 보냈다. 그때 유학한 그 사람들. 그 자녀들도 있을 테니까. 김정은 위원장이 한번 만나라. 이 말씀이군요. 고맙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도움말씀 들을게요. 한국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학과의 박연관 교수였습니다. 고맙습니다. 

◆ 박연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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