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송 : 전북CBS 라디오 <찬양, 찬양이 있는곳에> FM 103.7 (12:05~13:00)
■ 진행 : 유연수 아나운서(편성팀장)
■ 대담 : 이요섭 목사(무주 여올교회)
무주 여올교회 이요섭 목사(사진=전북CBS)
◇ 유연수>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번 한 달 동안 '찬양찬양이있는곳에' 초대석에서는 전북지역 기독교를 중심으로 벌어졌던 독립운동의 자취를 따라가 보는 시간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 무주 4.1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여올교회 전일봉 장로와 그 사건을 조명해 보죠. 여올교회를 섬기시는 이요섭 목사님 나오셨어요 안녕하세요.
◆ 이요섭>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 유연수>먼저 여올교회가 독립운동 당시에도 있었으니 최소 100년이 넘은 교회일텐데 어디에 있는 어떤 교회인지 소개 해주시겠어요?
◆ 이요섭>저희 교회는 무주군 적상면에 있는 교회입니다. 저희 교회는 올해로 창립 116주년이 되었고요, 무주에서는 두 번째로 역사가 오래된 교회입니다. 제가 교회에 부임한 지 이제 3년이 조금 넘었는데, 교회에 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대한민국에 이런교회가 있는지는 미처 몰랐어요. 요 몇 년 사이에 귀농하고 귀촌한 가정 몇 가정 외에는 원래 사시던 마을 주민들은...가정으로 치면 100퍼센트 다 교회를 다니시고 또 지금 적상면에 교회가 네 개 있는데요. 그 중에 세 개 교회가 저희 교회에서 분립되었습니다. 지금도 교인 80여 명이 주일, 그리고 주일 오후, 수요일 예배도 거의 100퍼센트(참석해) 예배를 드리고 있고요. 새벽예배도 많게는 30명 넘게 아주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있는 교회입니다.
◇ 유연수>116주년을 맞는 무주에서 두 번째 오래된 교회라고 하셨는데 첫 번째로 오래된 교회는 어딘가요?
◆ 이요섭>아마 ‘증산교회’일겁니다.
◇ 유연수>여올교회 ‘여올’ 뜻이 뭔가요?
◆ 이요섭>참 이름이 좋지요. 저희 마을이 처음에는 ‘늘갖마을’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도 처음 세워질 때에는 ‘늘갖교회’라고 불렀는데 마을 이름이 나중에 ‘여올마을’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1970년대에 마을 이름을 따서 교회도 ‘여올교회’로 바뀌게 된겁니다.
◇ 유연수>교회가 설립된 이후 당시 교육의 불모지였던 산골마을에 학교도 생기고 교회를 중심으로 부흥을 이뤘다면서요?
◆ 이요섭>맞습니다.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해인 1918년도에 저희 교회에 ‘삼숭학교’가 세워졌고 일제 탄압속에서도 신앙문을 가르치면서 민족의식을 깨우는데에 앞장 섰습니다. 정말 호랑이가 나올 법한 깊은 산골이었지만 일찍이 학교가 세워져서 무주뿐만 아니라 진안, 장수, 그리고 멀리 금산에서도 학생들이 와서 공부하는 배움의 터전이 되었지요.
무주 여올교회의 모습(사진=이요섭 목사 제공)
◇ 유연수>산골마을에 복음이 들어오고...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학교가 운영되면서 일제 탄압 속에도 마을 주민들의 의식이 깨워졌으리라 짐작이 되는데요. 그러다가 삼숭학교가 세워진 다음 해죠. 1919년 서울 탑골공원에서 3.1운동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오지 마을에는 언제 전해지게 된거죠?
◆ 이요섭>그 당시에는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울에서 일어났던 3.1운동의 소식이 1주일 늦게 산골에 전달되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독립선언문도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저희 여올교회 전일봉 장로님이 뜻 있는 동지들을 모아서 4.1만세운동을 계획하게 되었고 무주장날에 거사를 진행하게 되었지요.
◇ 유연수>그러니까 소식은 일주일 뒤에 알려졌는데, (독립만세운동을 하기에)가장 효과적인 날이 언제인지를 고민하다가 ‘장날에 해야겠다.’ 전일봉 장로님을 중심으로 해서 독립운동, 만세운동을 펼쳐나가게 된거고요. 그렇게 해서 역사적인 사건 무주 4.1만세운동이 벌어지게 됐는데 그 날의 사건을 조금만 더 생생히 소개해주시겠어요.
◆ 이요섭>전일봉 장로님이 만세운동을 하시던 때가 (그 분이)23살 때입니다. 삼숭학교를 통해서 민족의식을 깨달았던 장로님은 일본의 부당함을 깨닫고 3.1운동의 소식을 듣고 친한 친구이자 교인들이었던 동지들과 함께 거사 계획을 세웠습니다. 일본 헌병들의 눈을 피해서 사람들이 잠든 깊은 밤에 매일 오막살이에 모여서 이불로 창문을 가리고 밤이 새도록 태극기를 직접 그렸습니다. 그렇게 그린 태극기는 단지속에 넣어서 감나무 밑에 숨겨두고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4월 1일 무주 장날이 되어서 장로님과 동지들은 그 약속한 장소에 모여서 나뭇짐을 실은 달구지와 장짐에 태극기를 숨기고 장꾼들 틈에 섞여서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읍내 장터로 잠입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그리고 장이 한참 서는 오후 2시 경에 전일봉 장로님은 장터 한 가운데 서서 3.1운동이 일어났음을 알리면서 일본을 몰아내고 나라를 되찾자고 힘차게 외쳤습니다. 그 때 군중에서 “옳소!”하는 함성과 함께 박수가 터져나왔습니다. '기회는 이 때다.' 싶어서 숨겨가지고 왔던 태극기를 그 때 들고 나와 "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 유연수>저는 전일봉 '장로님' 이라고 하셔서 나이가 있으실거라고 생각했는데 당시 23살 밖에 되지 않으셨어요. 그 때 당시(4.1만세운동)에도 장로 직분이셨나요?
◆ 이요섭>(그 당시에는)아니었죠.
◇ 유연수>그 때는 성도나 집사의 직분이었는데 나중에 장로가 되신거고 ‘스물 셋의 전일봉 청년’이었군요. 자료를 찾아보니 전일봉 장로님이 장터에서 직접 외쳤던 연설문 내용이 있던데 괜찮으시다면 목사님께서 그 연설문을 대신 낭독해주실 수 있을까요?
◆ 이요섭>(전일봉 장로의 연설문 중에서)친애하는 국민여러분! 저는 적상사는 농사꾼의 아들 전일봉이라는 촌놈올씨다. 지금부터 25년 전 일본놈은 우리나라 국모를 잔학무도하게 살해하더니 15년 전에는 을사보호죠약을 만들어 우리나라 주권을 빼앗아갔고 10년 전에는 우리나라까지 삼켜버려 우리를 나라없는 백성으로 만들더니 그것도 모자라서 금년 정월에는 우리의 임금이시던 고종황제까지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 때 우리민족은 얼마나 울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 위정자들이 외세에만 의존하여 정치를 했던 까닭에 일본놈들이 우리민족을 얕잡아보고 저지를 일이니 이 얼마나 원통한 일입니까?이제 우리는 나라없는 백성이 되어 일본놈들의 종노릇만 하다가 죽어갈 뿐입니다. 그래서 지난 3월 초하룻날 고종황제의 국장을 치르던 날은 서울 탑골공원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목이 터져라 독립만세를 외쳤고 독립선언을 하여 우리 민족의 단결력을 과시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했습니까? 여러분! 이제 우리도 나라를 다시 찾는 일을 합시다.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나서야 합니다.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무주군민 여러분께서 대동단결하여 독립만세를 불러 일본놈들이 이땅에는 발도 붙이지 못하도록 몰아냅시다. 대한독립 만세!
◇ 유연수>낭독을 하시는데 마치 전일봉 장로님이 되신 것 같은 그런 떨림으로 낭독을 하셨어요. 저도 듣고 있는데 주먹이 불끈 쥐어지는 울분이 가득 담긴 그런 연설이었는데요. 독립만세운동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장날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가 거사를 치르셨군요. 사실 어떤 무기를 들고 직접적인 전투를 벌이는 것이 아닌 비무장 상태로 당시 분위기 속에 이런 용기를 내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갈등과 두려움이 있었을까요...거사 이후 전일봉 장로님은 어떻게 되셨나요.
◆ 이요섭>장로님은 독립만세를 외치다 현장에서 체포되셨습니다. 그리고 서울 형무소에 끌려가셔서 8개월 동안 복역하면서 많은 고문과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 유연수>무주에서 서울까지 끌려가셨군요...그러면 8개월 이후에는 석방 되셨고...그 이후에도 꾸준히 애국운동을 전개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신앙생활은 어떠셨나요?
◆ 이요섭>아주 열심히 하셨습니다.
◇ 유연수>전도운동과 병행해서 독립운동도 하셨는데 이 사건 이후로 무주지역에는 4.1만세운동 단일 사건으로 끝나진 않았다면서요?
◆ 이요섭>4.1만세운동 이후에도 약 일곱 번에 걸쳐서 산발적으로 3,500여 명의 군민들이 만세운동을 벌였고요, 밤에도 횃불을 들고 만세운동을 했습니다. 특히 산으로 숨어서 이 산 저 산에서 봉화형식으로 횃불을 밝혀서 만세운동을 했다고 합니다.
◇ 유연수>시골마을에서도 독립을 갈망하는 이 운동이 뜨겁게 일어났다는 사실, 참 대단한 것 같아요. 전일봉 장로님은 거사 이후에도 꾸준히 신앙생활과 애국운동을 하셨는데 광복 5년 뒤 고문의 후유증으로 안타깝게도 짧은 생을 마감하셨다고 들었어요. 국가로부터는 그 공을 인정받았나요?
◆ 이요섭>옥고를 치르면서 생긴 병으로 고생하시면서도 여올교회 초대 장로로 또 무주와 무풍 일대를 다니면서 선교하시고 또 전도하시고 열심히 활동하시다가 1950년 5월 8일 소천하셨습니다. 그리고 1996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이해서 조금 늦게 대통령 표창을 받게 되셨습니다.
◇ 유연수>매 년 이맘 때 즈음에 그 날의 업적과 장로님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나요?
◆ 이요섭>네. 지금도 무주읍내에서는 지남공원에 조금전에 낭독해드린 연설문과 장로님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요. 장로님이 시무하시던 여올교회에도 기념비가 있고, 마을에도 장로님의 동상이 있어서 그 날의 교훈을 잊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또 매 년 4월 1일이 되면 무주군기독교연합회와 무주군청이 연합해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무주장터에서 기념식을 하고 있습니다.
무주군 적상면 여원마을회관 앞에 세워진 전일봉 장로의 동상(사진=이요섭 목사 제공)
◇ 유연수>올 해는 특별히 4.1운동 100주년인데 조금 더 특별하게 준비하시는 내용이 있나요?
◆ 이요섭>조금 안타까운 것이 4.1만세운동은 (무주)군의 자부심이요 긍지라고 할 수 있고 또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정신이 온전히 계승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조금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올 해는 시민단체와 학교와 무주군에 있는 교회들이 연계해서 대대적인 기념식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 유연수>전일봉 장로님도 참 대단하지만 이름없이 쓰러져간 수 많은 선조들을 기리는 이런 의미있는 행사인데요. 많은 군민들, 외부인이라도 방문하셔서 이 날의 행사를 기억하고 후대에 전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나라의 어려움이 있을 때 비겁하게 숨지 않고 그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민족을 이끌고 시대를 일깨운 전일봉 장로님 같은 믿음의 선조들을 통해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 이요섭>요즘 안타까운 것이 한국교회가 세간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지않습니까?그래서 선배님들의 신앙정신을 이어받아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부심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고 사람 앞에도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유연수>네 고맙습니다. 무주 4.1만세운동을 이끌었던 무주 여올교회 전일봉 장로와 그 사건에 대해서 여올교회를 섬기시는 이요섭 목사님과 이야기 나눠봤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찬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