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은희 코치에겐 없지만 심석희 선수에겐 있었던 것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22) 폭행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을 받은 조재범 전 코치가 지난 23일 2심 결심 공판 마친 뒤 경기도 수원지법을 나서고 있다. (사진=박종민 기자/자료사진)
지난 25일 범부처 차원 체육계 성폭력 대책의 시발점이 된 것은 조재범 전 국가대표 코치의 성폭행 피해를 폭로한 쇼트트랙 여자 국가대표 심석희(한국체대)였다. 기다렸다는 듯 체육계 미투가 확산했고 여론이 들끓었으며 범국가적 대책이 몇 차례에 걸쳐 발표됐다.
그러나 체육계 미투는 일찌감치 시작됐다. 2016년 10월 김은희 테니스 코치였다. 피해는 심석희 못지 않았지만 파급력은 미약했다. 김 코치는 국민체육진흥법에서 얘기하는 '국위 선양'을 통해 대중에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기에, 즉 국가대표나 메달리스트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즉 스타 선수가 아닌 무명이었던 까닭이다.
그렇다면 심석희 같은 메달리스트는커녕 국가대표조차 쉽지 않은 일반 선수들, 그들이 처한 상황은 어떤 것일까.
◇ "초등학교 때 팬티를 내리고 엉덩이 맞았어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죠"
대한체육회가 지난 8일 발표한 '2018년 스포츠성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일반 등록 선수의 경우 최근 1년간 성폭력 피해 경험 비율이 2.7%였다. 국가대표 선수(1.7%)보다 월등히 높은 비율이다. 연구를 맡은 이창훈 한남대학교 교수가 성폭력 피해 상황을 특정해 설문지를 구체화했더니, 일반 선수의 피해 비율은 5.4%로 늘어났다. 반면 국가대표 선수는 그대로였다.
이 교수는 "어린 선수들은 자신을 불쾌하게 만들었던 어떤 행위가 성폭력에 해당하는지 인지하지 못해왔던 경우가 꽤 있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성폭력을 당한 적이 있는가' 식의 추상적 질문 대신 '옷을 갈아입거나 쉴 때 노크없이 불쑥 들어온 적이 있는가'를 묻는 식으로 하면 답변률이 쑥 올라간다는 것이다.
올림픽 메달리스트 출신의 한 여성 지도자는 "초등학교 때 굳이 팬티를 내리고 엉덩이를 맞곤 했는데, 그게 잘못됐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면서 "중학생 때부터는 선생님이 '누워보라'고 하자 기분이 너무 나쁘더라"고 털어놨다.
또 다른 선수 출신 지도자는 "어린 남자 선수들 같은 경우는 자신의 성기를 잡아 당기거나 뒤에서 안는다든지 하는 성추행을 장난으로 여긴다"면서 "지금에서야 그때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만, 조금만 엇나갔으면 당시에도 큰 사고가 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 "잘못된 행동에 대한 교육, 실업팀 때까지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다"
(사진=스마트이미지 제공/자료사진)
초·중·고교와 대학 운동부뿐 아니라 성인 실업팀에서도 성폭력에 대한 교육은 받아본 적이 없다는 선수들이 상당수다.
특히 학생들을 관리하는 교육부는 '지도자의 잠재적 범죄 가능성'을 상정하고 지도자만을 대상으로 연 2회 정도 2시간씩 관련 교육을 하는 게 전부다. 교육부는 대한체육회가 온 국민의 지탄을 받을 때에도 뒤에 빠져 있지만, 일반 수 관리에 상당한 책임이 있는 조직이다.
오랫동안 지적돼왔 듯 '인지가 충분히 가능할 정도'의 피해에도 문제 제기는 어려운 게 한국 체육계의 현실이다. 체육인들은 선배와 지도자, 상위 기관까지 인맥으로 엮인 환경에서 운동을 계속할 생각이면 피해를 밝히지 않는 게 그들만의 '족보'라고 한다.
성폭력 범죄 빈도가 높은 합숙 훈련의 경우, 단시간에 높은 성과를 내기 위한 활동이라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집과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선수들은 '격려하기 위해' 자신을 숙소로 부르는 지도자나 선배의 지시를 거스르기 어렵다.
빙상계 성폭력을 지적한 여준형 젊은빙상인연대 대표는 "운동부가 엘리트 체육 시스템으로 돌아가다 보니, 메달을 따야 진학이 되고 선수든 학부모든 메달에 목을 매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유도 선수 출신 신유용 등 최근 미투 운동에 동참한 선수들이 '현역'이 아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은 운동을 포기한 뒤에야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특히 비인기 종목의 경우 인맥으로 얽히는 정도는 더욱 심하다. 기자가 취재 중에도 소문이 파다한 가해자 정보를 얻고도 피해자 대부분이 쉬쉬하는 통에 실체를 알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아시안게임 유도 메달리스트 출신 유성연 한남대학교 교수는 "일반 선수에 대한 폭력, 성폭력 문제는 실제로는 엄청나지만 지도자가 왕인 지금 환경에선 결코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면서 "선배가 가해자인 경우에도 지도자 때문에 말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 "내 울타리 안에 있는 내 새끼라고 생각, 선을 넘는 경우가 생겨"
조재범 코치 성폭력 사건 의혹 관련 진상규명 및 스포츠계 성폭력 문제 재발 방지 촉구 기자회견에서 한 참가자가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 수년 동안 영구 제명 등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대책이 성공하지 못했던 이유는 분명하다. 엘리트 체육 시스템에서 형성되는 지도자와 제자 간 '특별한 관계'를 청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선수 입장에서 지도자는 훈련장에서 종일 부대끼며 부모보다 더 많이 보는 보호자인 동시에, 자신의 운동 인생을 책임져줄 구원자다.
지도자 입장에서도 선수는 단순한 제자가 아니라 자신의 생계를 책임져줄 성과물이다. 제자들이 메달을 따고 진학을 잘 해야 고용이 유지되고 성과급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과를 내야 한다. 폭력이 동반되기 쉬운 이유다.
지금처럼 범정부 차원의 대책이 쏟아졌던 10년 전, 엘리트 체육에서 벗어나자는 것이 '근본 대책'의 골자였다. 그러나 현장 상황은 전혀 달라진 게 없다. "1년 단위로 계약을 맺고, 메달이 없으면 바로 잘린다는 것을 주위에 창피해 말할 수가 없다"고 올림픽 메달리스트 출신 지도자가 말할 정도다.
성적지상주의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울산 교육청의 경우 산하 초중고교 지도자들의 급여 체계 기준 자체가 전국체전을 포함한 전국대회 메달이다. 일단 평가점수가 5.1을 넘어야 지도자 재계약이 이뤄지는데 그 중 금메달 점수가 3.0이다.
사실상 성적이 절대적 기준인 셈이다. 재계약 기준 점수 중 직무 연수 점수가 0.5라는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메달을 따지 못하면 최저임금보다 못한 급여를 받거나 일자리를 내놓으라는 것"이 울산시 교육청 소속 한 지도자의 말이다.
이처럼 지도자가 가르치는 선수와 일종의 운명 공동체를 형성하다 보니, 상대를 독립된 인격체로 대하는 것에 무감각해진다. 극단적인 경우 폭력을 넘어 성폭력에까지 이를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아시안게임 메달리스트 출신 한 지도자는 "조재범 코치의 경우도 그렇지만 어린 시절부터 운동을 가르치게 되면 선수가 '내 울타리 안의 새끼'라는 생각이 강해진다"면서 "일반적인 관계에서는 형성될 수 없는 친밀함이 있는데, 그게 제대로 선을 못 긋고 도를 넘는 행위를 하게 된다"고 짚었다.
◇ "선택지는 단 두개, 누구에게 자녀를 맡기실래요?"심석희처럼 메달을 따고 '국위 선양'을 해야 미투를 해도 주목을 받는 환경은 다시 말하면 또 다른 성적지상주의의 한 단면이다. 제자들이 성과를 내야 인정받는 것은 물론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지도자의 조건과 상통한다. 또 인권 교육이나 (성)폭력 교육을 받지 못한 채 교육당국의 방조 아래 학교장 재량에 따라 '운동이 곧 내 인생' 식으로 몰리는 일반 학생 선수들의 삶과도 연결된다.
이런 점에서 한동현 경상남도체육지도자연합회 사무국장의 질문은 어쩌면 현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존중해주는 대신 성적을 못 올려주는 지도자, 성적은 내주는데 폭력을 일삼는 지도자 둘 중에 누구에게 자녀를 맡기실래요?"
지금 시스템은 학생 선수와 학부모에게 두 개의 선택지밖에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극단적인 두 가지의 선택지는 선수에게 특히나 가혹한 것이다. 인생의 성공을 위해서는 인권 침해를 감내해야 하고, 인간적인 지도자를 택하면 꿈을 이루기는 요원하기 때문이다.
한창훈 한남대학교 교수는 "체육계 (성)폭력 문제에서 특히나 취약한 그룹들에 대한 대책이 나와야 한다"면서 "국가대표급이나 돼야 이슈가 되고 대책이 나오지만, 통계나 사례에서 철저히 사각지대에 위치해 있는 다수의 선수들에 대한 대책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