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경기 부양과 지역균형발전을 명분으로 대규모 토건사업에 대한 예비타당성 조사(이하 예타) 면제 대상을 다음주쯤 발표할 계획이다.
하지만 신청 지역의 분위기가 과열된데다 총선을 앞두고 경제성 낮은 사업에 예타 면제를 남발할 경우 '혈세 낭비'만 부를 수 있다는 우려가 터져나온다.
◇SOC 확대 반대하던 文정부, 경기부양 위해 예타 면제 나서관계 당국 등에 따르면 정부는 29일 국무회의를 거쳐 지자체 등으로부터 받은 예타 면제 신청 심사 결과를 발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예비타당성 조사는 정부나 지자체가 국가 재정 지원이 300억원(총사업비 500억원 이상)을 넘는 대규모 재정 투입 사업을 벌일 때 사전에 사업의 타당성을 검증·평가하는 제도다.
비록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예산 집행의 효율성은 물론 사업 선정의 투명성까지 높여서 불필요한 대규모 토건사업을 함부로 벌이지 않도록 하는 국가 재정 사업의 안전장치다.
그런데 정부는 앞서 지난해 10월 '혁신성장과 일자리 창출 지원방안'을 발표하면서 예타 면제를 확대하겠다며 전국 각·시도로부터 신청 사업을 접수받았다.
그 결과 전국 17개 광역시·도가 총 70조원이 넘는 규모의 38개 SOC(사회간접자본) 사업을 신청했고, 정부는 이 가운데 3순위 사업 5개를 제외한 61조 2518억원 규모의 33개 사업을 검토하고 있다.
지자체 제출 예타면제 사업 현황(경실련 제공)
이들을 평가할 기준에 대해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23일 "낙후 지역은 예타 과정에서 경제성 평가에서 불이익을 받기에 지역균형에 한계가 있어 면제를 검토하게 됐다"며 "지역균형 개발 차원에서 예타 면제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실제로 그동안 지방에서는 예타 조사 기준에서 경제성을 기준으로 수도권에 밀릴 수밖에 없다며 불만을 토로해왔다.
현재 예타 평가요소는 경제성(35~50%), 정책성(25~40%), 지역균형발전(25~35%)으로 이뤄졌다.
애초 예타 조사의 근본 목적은 예산 낭비를 줄이기 위한 것이다보니 평가 항목에서 경제성에 가장 무게를 실을 수 밖에 없고, 인구도 자본도 부족한 지방의 사업의 경제성은 자연스레 낮은 평가를 받기 쉽다.
이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0일 신년사에서 "서울, 수도권은 예타 면제가 쉽게 되는 반면, 지역은 인구가 적어서 예타 통과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광역별로 1건 정도의 공공 인프라 사업들은 우선순위를 정해 선정할 것"이라고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한 바 있다.
이러한 정부의 예타 면제 자체는 무리수라고 볼 수는 없다. 관련 법령에도 예타 면제가 가능한 항목 중 하나로 지역균형발전을 적시했고, 이 외에도 '예타 조사의 실익이 없다고 판단되는 사업'이라면 면제할 수 있도록 해석의 여지를 남겨뒀다.
또 예타 조사 결과에 강제성이 없기 때문에 '비용편익비율(B/C)'이 1을 넘기지 않아 비용에 비해 사회 전체의 편익이 적다고 판단되더라도 정부가 의지를 갖고 추진한 사례도 적지 않다.
특히 2008년 이명박 정부 시절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지역균형발전을 이유로 전국 21개 사업에 예타 조사를 면제한 바 있다.
눈에 띄는 점은 정부의 정책 기조 변화다. 그동안 문재인 정부는 인위적 경기부양을 하지 않겠다며 SOC 예산을 매년 줄이고, 대신 복지를 확대하는 정책 기조를 유지해왔다.
그럼에도 집권 이후 부동산 경기 침체로 건설 투자 지표가 계속 하락하고, 일자리 지표에도 빨간불이 들어오자 결국 대규모, 대형 토건사업으로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과거 보수 정부의 경제정책으로 돌아서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총선 앞두고 지역 과열 양상…전문가 "혈세 낭비 우려돼" 한 목소리하지만 정부가 구체적인 면제기준이나 대상사업 규모 등을 제대로 알리지 않은 채 사업 신청부터 받으면서 관련 지역에는 과열 양상도 나타나고 있다.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 B노선 건설을 추진하는 수도권 9개 지자체 지역에서는 약 55만명이 참여해 지지서명운동을 벌이는가 하면, 지하철 7호선 연장을 요구하는 경기 포천시 주민 1만 3천여명이 지난 16일 서울 광화문에 모여 결의대회를 열고 삭발식까지 거행했다.
더구나 내년 4월 총선이 가시권에 들어온 시점에 정치권도 지역 숙원 사업의 예타 면제를 공언하는 등 경쟁에 불이 붙다보니 탈락한 지역에서는 주민들의 거센 반발도 예상된다.
더 큰 문제는 자칫 사회 편익이 충분하지 않은 사업을 지역 안배 등 정치적 고려로 밀어붙였다가 혈세만 낭비한 채 실패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예타 면제 혜택의 덕을 봤다 실패한 대표적 사례가 바로 이명박 정부 시절의 '4대강 사업'이다.
당시 정부는 관련 시행령까지 개정해 '재해 예방 사업'을 예타 면제 대상으로 추가하고, 4대강 사업의 핵심인 보 건설·준설 사업을 여기에 포함시켜 예타 조사의 감시를 피해갔다.
전문가들과 시민사회도 한 목소리로 "졸속 예타 면제 결정으로 혈세만 낭비할 수 있다"며 우려를 표하고 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과 녹색교통운동, 환경운동연합 등 시민사회도 지난 23일 기자회견을 열고 "침체된 경기를 토건 사업으로 부양하려는 내년 총선을 위한 지역 선심 정책으로 볼 수밖에 없다"면서 "예타 면제는 토건 재벌 건설사들에 막대한 혈세를 퍼줄 뿐"이라고 비판했다.
경실련 권오인 경제정책팀장은 "예타는 재정의 누수를 막고 사업을 실효성 있게 하는 안전장치"라며 "예타를 면제했다가 향후 재정의 문제나 누수가 발생해도 단 한 번도 정치권이 책임진 적 없이 국민의 혈세로 막아야 했다"고 지적했다.
또 "예타에서 문제가 됐던 민자사업, 특히 4대강 사업은 거의 다 재정 낭비로 이어졌다"며 "특히 지자체별로 나눠주기 식으로 언급하는 것은 건설 경기를 일으키고 일감을 주려는 의도로만 보인다"고 비판했다.
명지대 권대중 부동산학과 교수도 "당장 용인 경전철 등 수요 예측을 잘못한 사업만 봐도 수천억원의 혈세를 낭비할 수 있지 않느냐"며 "이러한 대규모 예타 면제가 전례로 남으면 웬만한 사업에는 지역 주민들이 예타 면제를 요구할 것"이라며 고 강조했다.
한양대 이창무 도시공학과 교수도 "예타 자체가 사회적으로 필요한만큼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느냐는 종합적인 평가 과정으로, 기본적으로 면제는 바람직한 선택이 아니다"라며 "지역균형발전이나 사업 속도로 요구된다면 간헐적으로 추진할 수는 있지만, 정형화된 틀로 면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또 "지역균형발전이라는 손에 잡히지 않는 사회적 목표에 대한 거름체 역할도 예타의 성격"이라며 "여론몰이로 사업을 끌고 가다 실패해 지역발전에 독이 되지 않도록 오히려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예타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지역별로 몇개씩 면제 사업을 허용하는 방식은 옳지 않고, 차라리 예타를 진행하되 각 사업별로 우선순위를 감안해 재평가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며 "개중 예타에서 경제성이 부족하더라도 사회적 비용이나 타당성이 좀 더 높은 사업을 선정하는 방식으로 진행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