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송 : 김현정의 뉴스쇼(권영철의 Why뉴스)
■ 채널 : 표준 FM 98.1 (07:30~09:00)
■ 진행 : 김현정 앵커
■ 대담 : 권영철 CBS 선임기자
영화 '1987'이 60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그렇지만 영화밖 현실은 아직도 과거에 머물러 있다.
고문의 실행자였던 경찰은 지휘부가 반성하면서 거듭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검찰은 아직도 반성이나 사과도 없이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Why뉴스]에서는 <'1987' 박종철 고문치사, 검찰은 왜 제대로 반성하지 않을까?>라는 주제로 그 속사정을 알아보고자 한다.
영화 1987 중. (제공 사진)
▶ 영화 '1987'이 6백만명을 넘어섰나?= 지난 16일 116,340명이 관람해 6백만명을 돌파했다. 다만 17일에는 새로운 영화에 밀려서 3위로 내려갔지만 지금 추세대로라면 700만을 넘겨 천만 영화를 기록할 수 있을지 관심이다.
▶ 경찰은 '1987'에 대해 사과했나?
= 그렇다. 경찰은 이철성 경찰청장을 비롯한 지휘부가 박종철 열사 31주기를 하루 앞둔 지난 13일 서울 용산구 옛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을 찾아 박 열사가 숨진 인권센터 509호에 헌화하고 묵념하며 사과했다.
이철성 청장은 "최근 영화 '1987'을 통해 많은 국민께서 30년 전의 아픈 역사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고 있다"면서 "과거 경찰의 잘못을 성찰하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인권경찰로 거듭나고자 내일 추도식에 앞서 방문하게 됐다"고 밝혔다.
▶ 그렇다면 검찰은 아직 사과 한 적이 없나?= 검찰은 31년이 지나도록 사과를 한 적이 없다. 영화 '1987' 영화를 보면 검찰은 부검없이 화장하려는 경찰을 막고 온갖 회유와 압박에도 부검을 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렇지만 검찰이 잘한건 최환 당시 공안부장 검사가 부검을 하도록 했다는 점 그것이다.
박종철 기념사업회 김학규 사무국장은 '그대 촛불로 살아' 라는 박종철 열사 30주년을 맞아 발간한 책에서 검찰의 책임을 분명히 지적한다.
박 열사의 친구이기도 한 김 국장은 이 책에서 "'고문에 의한 사망' 사실이 밝혀지는 데는 사건을 최초로 언론에 보도한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를 비롯한 많은 언론인들, 처음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박종철의 사망 사실을 확인한 중앙대부속병원의 오연상 내과의, 부검을 집도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황적준 박사 등 검찰과 무관한 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다. 그럼에도 최환 공안부장이 경찰의 시신 화장 기도를 막고 부검을 관철시킨 일은 박종철이 '고문에 의해 사망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잘한 조치'였다"고 밝혔다.
김 국장은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이후 검찰은 자신에게 주어진 수사권마저 사실상 포기하고 경찰 자체 수사에 맡겨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을 축소·왜곡·조작하도록 방조한 것을 시작으로, 1차 수사(1.20~1. 23)나 2차 수사(재수사, 5. 20~5. 21), 3차 수사(5. 22~ 5.29)나 심지어 88년의 4차 수사(1. 13~1. 15) 등 여러 차례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 어느 하나 제대로 된 수사를 하지 않았다"면서 "오히려 경찰의 축소·은폐·조작 기도를 방조하고 협력한 것은 검찰 수사팀이었다"고 질타했다.
▶ 영화 '1987'을 보면 검찰은 고문을 밝혀내는 '선'으로 경찰은 고문을 하고 이를 은폐하는 '악'으로 그려지는데 실제로는 달랐다는 거냐?= 그렇다. 당시 전두환 정권에서 검찰은 경찰이나 안기부에 밀려서 존재감이 미미했다. 그래서 주도적으로 끌고가지 못했다.
영화에서는 검찰과 경찰을 대비하지만 실제로는 관계기관대책회의의 결정에 그대로 따르는 나약한 모습을 보여줬다.
(사진=자료사진)
당시 수사검사였던 안상수 현 창원시장은 1995년에 펴낸 박종철사건 수사검사의 일기 <이제야 마침표를="" 찍는다="">는 책에서 자신이 엄청난 역할을 한 것처럼 묘사하지만 실제로는 고문경관이 처음 구속된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 2명이 아니라 3명이 더 있다는 진술을 받고도 천주교정의구현 사제단이 폭로할 때까지 3개월여 동안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
당시 최환 공안부장은 CBS와의 전화통화에서 "안상수 검사가 자신이 주역인 것처럼 묘사하지만 3개월여 동안 고문 공범 3명을 방치한 것은 직무유기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검찰은 4차에 걸친 수사에서 은폐 조작을 주도한 관계기관 대책회의에 대해서는 아예 처음부터 수사할 의지가 없었고 손도 대지 않았다.
▶ 검찰의 잘못이 제대로 밝혀지지 못한거냐?= 그렇다. 검찰이 당시 뭘 잘못했는지는 이미 많은 기록에 나와있다.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위원회>는 결정문에서 "검찰 또한 사건의 진상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직무를 유기하여 수사를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다가 국민에게 은폐사실이 폭로된 이후에야 추가 공범을 포함 치안본부 관계자 등 은폐에 가담한 책임자를 최소한만 기소하여 결과적으로 관계기관대책회의의 부당한 개입을 방조하고 은폐한 잘못이 있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조국 민정수석도 지난 14일 "31년 전 오늘 22살 청년 박종철 물고문 받고 죽임 당했습니다. 영장도 없이 불법 체포 돼 남영동 끌려가 강요와 함게 물고문 받고 숨졌습니다"라면서 "당시 검경 안기부 합심해서 진실 은폐하려 했습니다. 영화 1987 나오는 것처럼 검사 개인은 진실 밝히는데 중요한 역할 했지만 검찰 전체는 그러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최환 당시 공안부장은 개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검찰 전체는 그러지 않았다는 걸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 당시 검찰수뇌부나 수사관련자들은 어떻게 됐나?= 검찰이 권력의 입맛에 맞게 움직였다는 건 관련자들이 어떻게 됐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서동권 검찰총장은 경질됐지만 노태우 정부에서 안기부장으로 3년 6개월 이상 재직하면서 승승장구했다. 정구영 서울지검장은 잠시 좌천됐지만 노태우 정부에서 청와대 민정수석을 거쳐서 제23대 검찰총장으로 잘나갔다.
최명부 당시 1차장은 그후 검사장으로 승진해서 법무부 검찰국장, 대검 중수부장, 대구 고검장 등으로 요직을 두루 거쳤고, 박 열사의 부검을 관철시킨 최환 당시 공안부장은 그후 대검 공안부장, 서울지검장, 부산고검장 등으로 잘나갔다. 그렇지만 최환 전 고검장은 김영삼 정부들어 '역사바로세우기'를 하고 나서야 요직으로 중용됐다고 해명했다.
신창언 형사2부장은 검사장으로 승진해 제주검사장, 부산검사장을 역임한 뒤 장관급인 헌법재판관으로 임명됐다. 안상수 검사는 일찍 변호사로 개업했지만 정치권에 투신해 15~18대까지 4선 의원을 지냈고 2011년에는 여당인 한나라당 대표를 역임한 뒤 민선 창원시장으로 재직 중이다. 박상옥 검사는 서울 북부검사장과 형사정책연구원장을 거친뒤 대법관으로 재직 중이다.
▶ 검찰은 왜 제대로 반성하지도 사과하지도 않는 거냐?= 첫 번째는 검찰이 당시의 상황조차 제대로 공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반성도 사과도 없는 것이다.
박종철 열사의 형인 박종부씨는 지난 2015년 2월 서울중앙지검에 박종철씨를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된 고문 경찰관 등의 재판·수사기록을 열람·등사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검찰은 공판조서와 공소장, 증거목록을 나열한 리스트 등 일부 문서만 내줬다.
사실상 공개를 거부한 것이다.
이와관련해 검찰의 한 고위관계자는 "수사기록을 공개 한 전례가 없다"면서 "행정정보 공개법과 개인정보 공개법이 충돌하고 있어서 수사기록을 공개할 경우 개인정보 공개법에 걸린다"고 말했다.
▶ 앞으로도 계속 공개를 안하겠다는 거냐?=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검찰은 가칭 '형사기록 열람 공개에 관한 법률'을 추진하기로 했다. 검찰개혁위원회에서 이를 권고했고 검찰은 이를 수용해 입법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금 당장 수사기록이 공개되기는 어렵겠지만 법률이 제정되는 대로 공개될 전망이다.
두 번째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당시 검찰관계자들이 승승장구하면서 핵심요직을 차지하고 있다보니 공개할 엄두조차 못낸 것이다.
검찰의 한 중견간부는 "당시 사건과 관련된 선배검사들이 전직 검찰총장이거나 대법관 헌법재판관 등으로 승승장구 하는 마당에 누가 그걸 공개하자고 할 수 있었겠나?"라고 말했다.
세 번째는 검찰이 칼자루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사건을 배당해서 수사하고 기소하고
구형까지 하는 과정을 검찰이 알아서 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만 바로잡는다면 과거의 잘못이 되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검찰의 1차 잘못은 고문사건에 대한 수사를 형사부에 맡긴 것이다. 검찰의 한 중견간부는 "당시 검찰 수뇌부가 사건수사를 제대로 할 생각이 있었다면 특수부나 공안부에 맡겼을 것"이라면서 "형사부에 맡긴 것은 적당히 알아서 하는 사인"이라고 말했다.
최환 전 고검장도 "1차 수사를 형사부에 배당했다는 소리를 들은 경찰이 환호작약 했다"면서 "당시 공안부나 특수부에 수사를 맡겼더라면 검찰도 공범이라는 비판은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검찰은 그 뒤에도 여러차례 기회가 있었지만 결국은 관계기관대책회의의 결정에 끌려다니며 사건의 축소 은폐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 검찰이 끝까지 사과를 하지 않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당시 검찰로서는 사과하지 않을 이유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지금 검찰로서는 사과하고 반성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박종철 열사의 형 박종부씨는 "불현듯 2015년 박상옥 대법관 청문회 장면이 떠오른다"며, "변명이란게 박상옥은 당시 막내검사로써 따르기만 했다. 안상수는 당시로써는 최선을 다했고 어쩔수 없었다. 참으로 한심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검찰은 당시 왜 축소 은폐 조작에 가담했었는지, 그 지휘라인이 어디며 누구였는지. 지난 2009년에 과거사위의 조사에서 관계기관대책회의의 실체를 규명하고 정부와 검찰에게 유족 및 국민에 대한 사과를 권고했음에도 지난 세월 침묵하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등에 대한 해명과 함께 진정한 사죄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면서 "그것이 촛불혁명의 주역인 국민 앞에서 취할 자세"라고 말했다.
사과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이유는 문무일 검찰총장의 의지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문무일 검찰총장은 청문회와 국정감사 등에서 수사기록 공개에 대해 법을 만들어서라도 할 필요가 있다는 의지를 밝혔다. 수사기록이 공개되면 누가 무얼 잘못했는지가 드러난다.
문 총장은 또 이철성 경찰청장과 함께 영화 <1987>을 본 뒤 "당시 검찰이 못한 부분까지 많이 미화됐다"면서 영화 속 경찰의 부정적 모습을 거론하며 "함께 본 경찰청장에게 미안했다"고 밝혔다.
문 총장은 "당시 검찰이 했다고 들었던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묘사됐다. 너무 미화하는 거 같아서 부담스러웠다"며 "미화가 들키면 창피하지 않겠느냐. 칭찬 받을 때가 가장 위험할 때"라고 17일 있었던 강연회에서 밝혔다.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위원회>이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