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년간 기부를 해왔었는데 올해에는 기부를 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습니다. 제 기부금이 정확하게 잘 쓰이고 있는지 확인이 안 되고 있기 때문인데…기부를 좀 해달라는 문자는 계속오지만 고민 중입니다."
성탄절을 앞둔 지난 24일 경기 용인의 한 쇼핑몰 앞 (사진=김양수 기자)
정모(50)씨는 지난 2015년부터 한 아동복지 단체에 매월 3만 원씩 기부를 해왔다. 물론 연말연시에는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구세군 자선냄비에도 형편이 닿는 대로 지갑열기를 꺼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온 국민이 '박근혜 하야'를 외치며 촛불집회가 열렸던 지난해 연말에도 기부를 멈추지 않았던 정씨.
그러던 정씨가 올해에는 새해가 다가오고 있는데도 기부를 중단한 것은 물론 거리에서 마주치는 구세군 자선냄비에도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다.
거대백악종 치료비 명목으로 12억 원이 넘는 후원금을 받아 딸의 치료비로 고작 수백만 원만 쓰고 대부분 외제차를 구입 등에 탕진한 '어금니 아빠 이영학' 때문이다.
27일 오전 경기도 수원 도청오거리에 설치된 사랍의 온도탑 (사진=신병근 기자)
지난 27일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랑의 온도탑은 52.2도다. 사랑의 온도탑 1도는 모금액의 1%를 의미한다.
지난달 20일부터 시작된 희망나눔캠페인은 전날 26일차로 올해 목표액 3,994억 원 가운데 2천85억 원이 모였다.
성탄절을 전후로 모금액이 몰리는 것을 감안하면 최근 4년 동안 가장 낮은 온도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발생한 전년동기에도 목표액 3천588억 원 가운데 2천79억 원이 모금돼 58.0도를 기록했다.
2015년 26일차에는 66.1도(목표액 3천430억 원/모금액 2천266억 원), 2014년 26일차에는 69.4도(목표액 3천268억 원/모금액 2천269억 원)을 각각 기록했다.
2014년을 기점으로 사랑의 온도탑 수은주가 조금씩 떨어지는 추세를 보였지만 올해 모금 추이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때보다도 더 심각한 상황이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이와 관련해 올해 들어 이영학·새희망씨앗 사건 등 기부금을 유용한 사건들이 국민들의 공분을 사면서 기부에 대한 신뢰가 전반적으로 낮아졌다고 분석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사랑의 온도탑 수은주를 높이기 위해 관리운영비를 홈페이지에 팝업 공지하는 등 기부자가 궁금해 하는 부분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다.
◇ 감정적 기부, 자선단체 불투명성, 선정적 보도…기부문화 확산 걸림돌최근에는 '기부포비아(기부에 공포를 느끼는 현상)'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어금니 아빠' 이영학 (사진=이한형 기자/자료사진)
지난해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기부 문화가 한 차례 크게 위축된 상황에서 올해 불우아동 돕기 기부금 128억 원을 유용한 '새희망씨앗' 사건과 딸의 희귀병 치료를 도와달라며 모은 후원금 12억 원을 챙겨 탕진한 '이영학 사건' 등이 연이어 발생해 기부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커진데 따른 것이다.
이와 관련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 전국 성인남녀 2천38명을 대상으로 한 '나눔 실태 및 인식 현황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1년 동안 기부 경험이 없다'고 답한 964명 중 23.8%가 기부를 하지 않는 이유로 '기부를 요청하는 시설, 기관, 단체를 믿을 수 없다'라고 답했다.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강철희 교수는 국민들의 감정적 기부, 자선단체의 불투명성, 대안 없이 사건을 증폭시키는 선정적 보도 행태 등이 기부포비아 현상을 불러왔다고 진단했다.
강 교수는 "기부하는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기부하지 않고 왜, 어디에, 얼마를, 언제, 어떻게 하려는지 고민해야 한다"며 "자선단체들도 투명성과 책임감을 높이고 언론도 선정적 보도를 자제하고 대안 제시에 주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건전한 기부문화 정착과 확산을 위해 주제별 기부, 제도 강화 등의 대안도 제시됐다.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이봉주 교수는 "기부금 사용내역을 기부자에게 세세히 공개하고 특정 개인이나 사례보다는 빈곤문제 해결 등 보다 포괄적으로 주제별 기부를 활성화해야한다"고 조언했다.
이 교수는 그러면서 "기부금이나 자선단체에 대한 운영 등에 관한 법률과 회계 등의 제도를 보다 강화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