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눈길' 스틸컷. (사진=CGV아트하우스 제공)
아픈 역사를 살아간 한 개인은 어떻게 생존할 수 있는가. 일본군 '위안부'를 다룬 영화 '눈길'은 이 질문에 답하는 영화다.
영화는 현재와 과거를 오간다. 소녀 종분(김향기 분)과 노인 종분(김영옥 분)의 곁에는 모두 소녀 영애(김새론 분)가 있다. 현재에 환시로 나타나는 영애는 종분의 기억을 끊임없이 과거로 돌아가게 한다.
가난한 집 맏딸로 태어난 종분은 똑똑한 부잣집 막내딸 영애를 부러워한다. 같은 마을에 사는 이웃이지만 처지가 다른 종분과 영애는 평생 엮일 일이 없을 것만 같다.
탄탄대로일 것만 같던 영애의 인생에 위기가 닥친다.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잡혀가게 된 것이다. 설상가상 오빠 영주(서영주 분)는 강제 징병을 당하고, 영애는 교사의 꿈을 꾸면서 일본 근로대에 자원한다.
어머니가 잠깐 집을 비운 사이, 종분은 일본군들에게 납치돼 열차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그 곳에 있으면 안되는 영애와 만난다. 끝도 없이 펼쳐진 눈길의 풍경. 그 안에서 영애와 종분은 불행을 직감한다.
영화는 결코 피해자들이 위안소에서 겪은 성폭력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들이 겪어야 했던 아픔은 몇 가지 장면으로 대체된다. 끊임없이 쌓이는 군표와 문지방을 드나드는 군화, 군모에 가려진 얼굴 등이 느리고 정확하게 스쳐간다.
공백은 피해자들의 일상으로 채워진다. 묵묵히 방을 청소하거나 콘돔을 물에 빠는 손길은 지극히 평범해 더 끔찍한 비극으로 다가온다. 숨을 쉬는 순간까지 지옥이지만 그곳에서도 삶은 이어진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절망을 대하는 종분과 영애의 자세는 극명히 다르다. 현실을 견딜 수 없는 영애는 삶을 포기하려 하고, 종분은 그런 영애를 끊임없이 붙잡는다.
영애를 살게 하는 것은 종분의 존재다. 수다를 떨고, 빨래를 하고, 노래를 부르고, 선생님이 되어 글자를 가르치고, 독방을 벗어나 서로 함께 하는 순간들이 층층이 쌓인다. 종분 또한 영애를 돌보면서 살아갈 힘을 얻는다.
현재도 마찬가지다. 피붙이 없이 달동네에서 홀로 살아가는 종분을 외롭지 않게 하는 건 10대 소녀 은수(조수향 분)다. 처음 은수는 방황하는 자신을 돌보려는 종분에게 날을 세우지만 점점 마음을 열어 간다. 계단에 앉아 담배 피우며 과거를 털어 놓는 종분에게 은수는 한 마디를 던진다.
"그거 할머니가 부끄러운 게 아니에요. 그 새끼들이 나쁜 거지."
영화는 결코 절망적이지 않다. 돌아온 피해자들이 유교적 사회 분위기에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벙어리 냉가슴 앓듯 또 다른 지옥을 살아갔어도 그렇다.
이유는 하나다. 영화 속 여성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비극과 가난 그리고 절망 속에서도 연대를 멈추지 않는다. 영애와 종분이 서로의 삶을 붙잡았듯이, 이제 종분과 은수는 함께 삶을 공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