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년 동안 박근혜 정권에서 벌어진 민주주의 후퇴와 시민 탄압은 1960~70년대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을 놀랄 만큼 빼닮았다. CBS노컷뉴스는 서슬 퍼런 박정희 정권 당시 문화·예술, 노동, 언론 등 각 분야에서 탄압받았던 이들을 찾아 나섰다. 이들의 증언을 토대로 현 정권에서 부활한 유신의 망령을 5차례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주]18년에 걸친 박정희 군사독재 기간 동안 헌법에 보장된 집회·결사의 자유는 철저히 짓밟혔다. 그리고 이는 그의 딸 박근혜 대통령 통치 기간 동안에도 똑같이 재현됐다.
◇ "선언문은 채 읽지도 못하고 끌려갔어"
사진=양춘승 씨 제공
악질적인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됐던 지난 1975년. 서울대 경제학과 4학년 학생이던 양춘승(61) 씨의 머릿속엔 고등학교 때 배웠던 '민주주의'가 계속 생각났다.
"우리가 배운 민주주의가 그게 아니었잖아. 그런 세상이라고 배우질 않았잖아."
유신 체제의 유지를 위해 존재했던 긴급조치. 74년 1월 8일 1호를 시작으로, 마침내는 800여 명에 달하는 지식인과 학생 구속자를 만들어낸 '긴급조치의 종합판' 9호까지 선포됐다.
긴급조치 9호 시대에는 유신 헌법에 대한 비판이 철저히 금지됐고 사전에 허가받지 않은 집회·시위 또한 금지됐다. 이를 위반하는 사람은 영장이 없어도 체포가 가능했다.
이같은 체제에 불만을 품은 양 씨는 동기들과 함께 유신 헌법을 비판하는 선언문을 낭독하기로 결심했다.
"모든 국민에게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보장하는 기본권과 생존권을 보장하라", "구속된 민주인사와 학우들을 즉각 석방하고 학생들을 학원으로 돌려보내라"
서울대학교 학생연합회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민주구국선언문'의 내용들이었다.
1977년 3월 28일. 양 씨는 동기 2명과 함께 캠퍼스에서 선언문 낭독을 실시했다.
"민족사의 맥맥한 흐름 속에서 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에는..."
그러나 선언문을 읽어내려간 지 채 5분이 안 됐을 즈음, 경찰이 들이닥치면서 그 자리에서 동기 2명이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양 씨는 곧바로 도망쳤지만 경찰이 집에 찾아와 부모님을 괴롭혀댄 탓에 한 달 뒤인 4월 자수했다. 그렇게 양 씨는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를 받고 서울 영등포구치소에서 2년 3개월을 복역했다.
박정희 시대에선 국민들이 정권을 비판하거나 반기를 든다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지식인과 학생들이 거리로 나오는 것을 박정희 정권은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서울대에는 중앙정보부 요원들과 경찰서 형사들이 항상 배치돼있는 등 곳곳에 프락치와 감시 요원을 심어 이들을 통제하려 했다.
◇ 아버지 빼닮은 박근혜의 "가만히 있으라"약 40년 후, 박근혜 대통령은 이를 그대로 답습했다.
박정희가 통치의 정당성을 잃어갈수록 탄압의 강도를 높인 것처럼 박근혜 대통령도 정권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솟구쳤던 세월호 참사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발생 이후 5월과 6월 두 달 동안 발생한 집회에서 박 정권은 시민 약 320명을 연행했다.
5월 17일에는 119명, 18일에는 97명, 6월 10일에는 69명, 6월 24일에는 30여명을 각각 연행했다. 이 중에는 18살 짜리 고등학생도 포함됐다.
같은 해 7월까지의 총 연행자 수는 354명에 달했고, 이 가운데 중고등학생 10대 청소년은 33명이었다. 입건율은 98%로, 354명 중 347명이 구속·불구속 입건됐다.
집회 주최 측을 불순 세력으로 규정짓기도 했다. 15년 민중총궐기를 주도했던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을 구속하고 각종 집회·시위는 불법으로 여겼다.
"복면 시위는 무장테러단체 IS(Islamic State)와도 같다." 박근혜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 이후 여당은 즉시 '복면시위 금지법'을 발의하는 데 앞장섰다.
자료사진
시민들이 분노할수록 탄압은 더 강해져 급기야는 집회 참가자들과 캡사이신과 물대포로 대치했다. 이 과정에서 결국 故 백남기 씨가 물대포에 맞아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지만 정권은 이를 끝까지 '불법 시위의 결말'로 포장해냈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집회·시위 탄압도 끊이지 않았다. 지난해 6월, 경찰은 정부 청사 앞 유가족들의 농성장을 찾아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 등 집회 물품을 바닥에 팽개치고 유가족 4명을 연행해갔다.
◇ '일반교통방해죄' 적용하는 수법도 적극 활용현 정권은 이같은 물리적 폭력 외에 고차원적인 수법도 적극 활용했다.
주최 측이 아닌 일반 집회 참가자들도 무더기로 기소하고 이들에게 벌금 폭탄을 내리는 방법이었다. 무더기 기소와 벌금 폭탄은, 집회시위에관한법률(집시법)이 아닌 일반교통방해죄를 적용해 부과했다.
세월호 1주기 범국민 대회'에서 참가자들과 대치 중인 경찰. 자료사진
2015년 4월 18일 416연대가 주최한 '세월호 참사 1주기 추모 범국민대회'에 참석한 정용필(29) 씨는 시청광장에서 1차 집회를 마친 후 "세월호 유가족들이 광화문 광장 북단에서 연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이어 시민들은 "유가족들을 만나러 가자"며 광화문 광장 쪽으로 행진했고 정 씨도 이에 따라 나섰다.
하지만 시청에서 광화문으로 향하는 길목은 경찰이 미리 쳐 놓은 차벽에 막혔고 정 씨는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청계천로를 따라 행진했다.
정 씨는 12월 검찰에 불구속 기소됐고 검찰은 정 씨에게 징역 1년을 구형했다. 정 씨는 지난해 9월 국민참여재판으로 개최된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지금까지 집회·시위 탄압이 이어지는 모습을 보며 박정희 독재의 피해자들은 분노하고 슬퍼했다.
양춘승 씨는 "박정희 시대 때는 한마디로 '야만의 시대'였는데, 딸이 계속 그 야만성을 되돌리려고 하고 있다"며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려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