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랭킹 뉴스

한나라당으로 시작해 두쪽 난 새누리당

노컷뉴스 이 시각 추천뉴스

닫기

- +

이 시각 추천뉴스를 확인하세요

19년 전 누가 뭐라해도 난 보수의 상징으로 태어났다. 지금까지 대통령도 두 명씩이나 배출했다. 여의도 정가를 쥐락펴락한 적도 있었다. 한나라당에서 시작해 이제 두 나라가 됐지만.

5共의 느낌을 지우고자 한나라당으로 옷을 갈아입었고, 특히 지난 대선을 앞두고는 새누리당으로 이름까지 고치면서 달려왔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른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조롱의 아이콘이 되었다.

1997년 이회창의 신한국당과 조순의 민주당이 합쳐져 '한나라당'이 태어났다. 전 국무총리와 전 서울시장이 힘을 합친다고 하자 우리당의 인지도는 급상승 했다. 대선 주자는 이회창 후보로 정해졌고 15대 대통령선거에 돌입했다.

 

결과는 낙선.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에게 패했다. 우리당에 있던 이인제 후보가 경선 불복으로 따로 출마한 탓이 컸다고들 한다.

졸지에 야당이 됐지만 의석수는 많았던 탓에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끊임없이 물고 늘어질 수 있었다. 햇볕정책은 결국 '북한에 퍼주기'란 주장이 먹히는 듯 했다.

이도 잠시, 지난 대선 때의 '세풍'과 '총풍'이 드러나면서 위기의 순간을 맞기도 했다. 하지만 1998년 박정희 대통령의 딸 박근혜씨가 입당해 대구 재보궐 선거에 이기고 여의도로 들어왔다.

2000년에 있었던 16대 국회의원 총선에서는 제1당을 유지했다. 이어진 2002년 16대 대선. 우리는 이회창 후보를 또다시 후보로 내세웠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대선은 무조건 이기는 게임이라고 평했다.

그때 노무현 후보가 등장했다. 아무리 '노풍'이 불어도 이회창 후보를 꺾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이회창 후보 두 아들의 병역 면제 의혹이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다. 무소속 정몽준 후보가 노무현 후보와의 '단일화'에서 패하면서 '노풍'은 정점을 향했다.

16대 대통령 선거는 노무현의 승리로 끝났다. 5년의 기다림과 다시 낙선. 이회창 후보는 정계를 은퇴하고 한나라당을 떠났다.

2006.12.7 뉴질랜드 공군 항공을 타고 오클랜드로 가는 중 기압차로 인한 귀막힘 현상을 방어 시범 보이는 노무현 대통령.

 

다시 5년의 야당생활이 시작됐다. 이번에는 대통령의 '품위'를 문제삼았다. "대통령이 대통령 다워야지..."라는 말을 퍼뜨렸다.

아뿔싸, 16대 대선 당시 '차떼기 사건'이 터졌다. 불법대선자금 모금 의혹으로 코너에 몰렸다.

그런데 죽으란 법은 없었다. 새천년민주당이 대통령이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했다고 탄핵안을 제출하려고 했고 우리는 합세해서 탄핵 가결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가 대통령의 손을 들어주면서 그야말로 역대급 '역풍'을 맞았다.

2004년 9월 박근혜 당대표(가운데)와 김기춘 의원(좌)의 모습.

 

신생정당으로 대통령을 보호했던 열린우리당은 2004년 17대 총선에서 152석을 확보하며 국회 과반 의석을 넘어섰다.

반면 탄핵을 이끈 새천년민주당은 9석, 우리 당은 121석. 우린 선거 전보다 무려 18석을 잃었다. 그나마 '천막당사'를 만들어 '차떼기 당'의 이미지를 불식시키려했던 당시 박근혜 대표의 노력 때문이었다.

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2008년, 전직 서울시장 출신 이명박 후보가 급부상하면서 견고했던 박근혜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 몸이었지만 이명박 사람, 박근혜 사람으로 갈라졌다. 이른바 친이-친박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내홍은 있었지만 결국 우리는 이명박 후보를 17대 대통령에 당선시켰고, 18대 총선도 과반 의석을 차지했다.

2007년 8월 20일 한나라당 제 17대 대통령선거 후보 확정을 위한 전당대회에서 이명박 후보가 대선 후보로 선출된 가운데 (왼쪽 두번째부터) 원희룡, 박근혜, 홍준표 후보와 손을 맞잡고 대의원들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승승장구할 것만 같았던 그때 일이 터졌다. 한미 FTA로 촉발된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맞물린 광우병 파동.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급격히 떨어졌다. 나의 지지율도 덩달아 떨어졌다.

그때 다시 나를 일으켜 세워준 사람은 박근혜 의원이었다. 2012년 2월,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꿨다. 당의 상징색깔도 파란색을 버리고 빨간색을 선택했다.

모두가 나의 참패를 예상했지만 19대 총선에서 우리는 전국을 붉게 물들이며 승리했다. 이 기세를 몰아 박근혜 비대위원장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아버지에 이어 딸까지 대통령이 되는 역사를 만든 것이다.

2012년 12월 14일 새누리당 대선후보 시절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

 

첫 여성 대통령, 전직 대통령의 딸, 비극적인 가족사, 국가와 결혼하겠다는 다짐. 모든 것이 순탄해 보이던 그때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다.

300여명의 아까운 목숨을 잃은 대참사에 '컨트롤 타워 부재' 등 여론의 질타가 쏟아졌지만, 대통령은 눈물을 보이며 위기를 모면했다.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이 20대 총선을 앞두고 탈당과 무소속 출마를 선언하기 위해 대구 동구 화랑로 자신의 의원 사무실에 들어서며 지지자들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세월호는 점점 잊혀져가고 20대 총선이 다가왔다. 사람들은 우리의 압승을 예상했다. 하지만 내부는 친박-비박 간의 공천 싸움이 한창이었다. 대통령의 입에선 '배신의 정치'란 말이 등장했고 '옥새파동'까지 일어났다. 결과는 여소야대의 참패였다.

업친데 덮친격으로 마침내 최순실의 그림자가 실체를 드러냈다.

국가와 결혼하겠다는 대통령 옆에 늘 함께 있었던 비선 실세 최순실. 대통령의 연설문을 손보고 청와대를 아무 제지없이 들락날락 거렸다. 소위 막장 드라마보다 더한 일들이 청와대에서 벌어졌음이 하나둘씩 밝혀지고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최순실이 대통령 못지않은 힘을 여기저기에 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2016년 11월 4일 오전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대한 대국민 담화를 시청하고 있다.

 

분노한 국민들은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왔다. 매주 전국에서 수백만의 촛불이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야당은 탄핵 카드를 꺼냈다. 10여년 전 내가 노무현 대통령을 향해 던졌던 탄핵 카드가 부메랑이 돼서 돌아온 느낌이었다.

우리당의 일부, 그러니까 비박계는 탄핵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제는 갈라설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것이다.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와 유승민 의원 등 비주류 의원들이 12월 21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대규모 회동을 가진 뒤 분당을 선언하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날 비주류 의원들은 오는 27일 탈당을 결행하고 총 35명의 의원들이 동의했다고 밝혔다. 윤창원기자

 

2016년 12월 27일이 되었다. 가칭 '개혁보수신당'이라는 이름으로 분당을 결정했다. 19년 전 한나라당으로 시작한 우리는 이제 두쪽으로 갈라섰다.

 




0

0

오늘의 기자

실시간 랭킹 뉴스

상단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