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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최태민 사망 3년 전 '여성 대통령 준비' 밝혀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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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근들 "최태민, 여성 대통령 나올 때 됐다" 증언…90년대 만남의교회 설립 조직화 정황

국정농단 의혹을 받고 있는 최순실 씨 아버지 故 최태민 씨의 사망 전(1994년 1월 사망) 3~4년 동안의 행적이 드러났다.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행적을 감췄던 최태민 씨가 1990년대 교회와 신학교를 연달아 설립하면서 재기를 노린 것으로 확인됐다. CBS가 지난 달 31일 최태민 씨가 설립한 교회 담임목사로 청빙된 목회자 L씨와 단독 인터뷰 했다. L씨는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재단 이사장으로 있던 명동문화재단 교목까지 지냈다. L씨는 현재 대형 교단 소속 목회자로 활발한 사역을 펼치고 있어 신원 보호를 요청해왔다. [편집자 주]

1990년대 초 최태민 씨가 설립한 교회 담임목사였던 L목사가 지난 달 31일 최태민씨와 관련한 일화에 대해 입을 열었다.

 

L 목사는 1980년에서 1983년 사이 대한예수교장로회 종합총회(당시 조OO총회장)에서 핵심 임원을 지냈다. L 목사가 최태민 씨의 존재를 안 것은 1990년 대 초. L목사는 'ㅅ'교회 부목사로 있던 중 잘 알던 목회자로부터 서울 압구정동에 위치한 만남의교회 담임목사 제안을 받는다.

L목사는 "담임목사로 청빙돼 간 교회에서 최태민 씨 존재를 처음 알게 됐다"고 밝혔다. 최태민 씨가 교회 설립자란 사실도 그 때 알았다.

◇ 최태민, 1990년대 초 만남의교회, 동양신학교 연이어 설립…"최순실 함께 예배 드려"

L목사는 만남의교회로 청빙돼 간 1990년 당시 최태민 씨가 종합총회 총회장이었다고 기억한다. 만남의교회는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인근 3층 건물 지하에 들어섰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최태민 씨가 신학교까지 설립하면서 장소가 협소해 교회는 학동으로 이전했다. 지금의 차병원 근처이다.

L목사는 주일에는 예배를 드렸고, 주중에는 신학생들에게 예배학을 강의했다. L 목사는 "당시 박근혜 씨가 이사장으로 있던 명동문화재단 장학생들이 예배를 드리러 왔다"며, "관리자(인솔자)는 최순실 씨였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밝혔다.

명동문화재단 교목이기도 했던 L 목사는 "당시 생활 형편이 어려운 중, 고등학생, 대학생 등 120여 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했었던 것 같다"며, "최순실 씨가 학생들을 인솔해 교회에 예배 드리러 왔다"고 덧붙였다.

故 최태민 씨와 인연이 깊은 예장 종합총회장 전기영 목사는 만남의교회와 동양신학교에 대해 좀 더 또렷이 기억했다.

전 목사는 "박정희 대통령을 연구하는 집이었다"며, "박근혜 대통령도 종종 탁구를 치러왔다"고 말을 보탰다. 전 목사에게 13억 9000만 원을 제시하면서 근화봉사단을 맡아달라고 제안했던 곳도 같은 장소란 말을 전했다. (CBS 10월 30일 자 [단독] 최태민, "박근혜가 대통령 될 테니 근화봉사단 맡아달라" 참조)

청와대 안에서 탁구치는 박근혜 대통령. (사진 = 국가기록원)

 

◇ 최태민, 어린이회관 '근화원'을 '근화교회'로 탈바꿈"

어린이회관 근화원이 근화교회로 탈바꿈 한 것도 이 무렵 일이다. L 목사는 "최태민 씨가 승려들만 갈 수 있는 근화원 간판을 떼고 근화교회를 세웠다"고 밝혔다.

L 목사는 근화교회에서는 어린이회관 직원 120여 명 정도가 예배를 드린 것으로 기억한다. 전기영 목사는 "박근혜 대통령이 근화교회에 예배드리러 오곤 했다"고 전했다.

이와 같은 모든 정황을 종합해볼 때 최태민 씨는 박근혜 대통령을 위해 1990년 대들어 이른바 '교회정치'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군부 등장으로 '자숙'을 요구받았던 최태민 씨가 잇따라 교회와 신학교 등을 설립하면서 재기해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입문을 도우려고 했던 것 아니냐는 추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육영재단 이사장직 외에는 별다른 정치활동을 시작하지 않은 시점이었다.

◇ 측근들에게, "여성 대통령 나올 때 됐다" 말해

최태민 씨는 측근들에게 우리나라도 여성 대통령이 나올 때가 됐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L목사는 이 발언이 그저 남녀평등을 강조하는 말인 줄 알았다.

"이조 500년사를 아느냐. 남자들이 얼마나 여자들을 핍박했느냐. 남자들은 안방에서 밥을 먹지만 옛날에는 여자들은 저 밑에서 밥을 먹고, 겸상을 할 수도 없었고, 얼마나 여자들이 설움을 많이 받았느냐. 앞으로는 정말 여자가 대통령도 돼야겠고 여자가 그동안 고생을 많이 했으니, 여자들이 남자처럼 동등한 시대가 돼야 하지 않을 까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최태민 씨 측근으로 분류되는 전기영 목사 역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뒤 최태민이 찾아와 이제부터 일을 시작한다"며, "앞으로 박근혜 씨가 대통령이 될 게 틀림없는데 도와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이 말대로라면 최태민 씨는 1990년대 초부터 이미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대통령으로 박근혜 대통령을 염두 해두고 비선에서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최태민 씨가 의욕적으로 설립했던 교회와 신학교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 때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은 박근령 씨가 어린이회관 이사장인가 됐다고 그래요. 그 바람에 이거고 뭐고 다 없어진 거에요. 그 다음에 저는 목사니까 거기 있을 수 없어서 OOO에서 개척을 했어요. 그 이후 그 쪽 세상은 몰라요."

최태민 씨는 자신이 꿈꿔온 '여성대통령'을 만들지 못하고 1994년 1월 사망하고, 5월에 사망소식이 세간에 알려졌다.

1980년대 예장 종합총회 모습.

 

◇ 최태민 씨에 이용당한 종합총회 목회자들…"잠시나마 있었던 것 부끄럽다"

헌병대 군종감 출신 조OO 목사가 교단 설립자(1990년대 초 지병으로 사망)로 알려져 있다. L 목사는 "70-80년대까지만 해도 종합총회 출신 목회자가 1000명에 이르는 등 알만한 목회자들은 다 아는 규모 있는 교단이었다"고 전했다.

L 목사는 "종합총회 목회자 1000명 가운데 900명은 최태민 씨가 어떤 존재인지 실제적으로 알지 못했다"며, "잠시나마 거기 있었던 것이 부끄럽다"고 회고했다.

예장 종합총회장 전기영 목사는 "현재 국정농단은 한국교회가 기득권자를 도우려는 기독교가 돼 부패했기 때문이다"라며, "우리 종합총회에만 돌을 던질 것은 아니다"라고 항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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