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 고(故) 백남기(69)씨에 대한 부검영장이 결국 발부된 28일 저녁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고인의 유가족이 부검 반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박종민 기자)
법원이 지난해 민중총궐기 대회에서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져 사경을 헤매다 숨진 농민 백남기(69)씨의 시신에 대한 부검 영장(압수수색 검증 영장)을 발부한 것을 놓고 법조계에서 '권력 눈치보기'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서울중앙지법이 지난 28일 부검 영장을 발부하면서 밝힌 사유는 "사망원인 등을 보다 명확하게 하기 위해 부검을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다만, 법원은 "부검의 객관성과 공정성, 투명성이 확보돼야 한다"며 영장 집행방법에 대해서 이례적으로 구체적인 단서들을 달았다.
우선, 유가족이 원할 경우 서울대병원에서 부검을 실시하고, 유족이 지명하는 의사 등이 부검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또 신체훼손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부검 과정을 영상으로 촬영해야 한다는 조건도 붙었다.
검찰이 처음으로 부검 영장을 청구했을 당시만 해도 법원은 "부검의 필요성과 상당성이 없다"며 기각 결정을 내렸지만, 사흘만에 '조건부 영장'으로 선회하자 비난 여론이 거세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백씨의 유족이 부검을 원치 않는 상황에서 경찰과 부검 절차를 협의하라는 법원의 결정은 검·경에 면죄부를 주고 유족의 의사를 무시한 처사라는 지적이다.
이정렬 전 판사는 29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부검을 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충돌의 책임을 비겁하게 유족들에게 떠넘겨버린 것"이라며 "부검 장소와 절차에 참여할 사람을 정하라는 것은 유족의 의사를 완전히 무시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고 백남기 변호인단' 단장을 맡은 이정일 변호사도 논평을 통해 "법원의 발부 결정은 유가족들의 참여권을 보장하는 형식을 띠고 있지만, 결국 가해자인 경찰에게 또 다시 고인의 시신을 훼손하도록 허락하고 실체적 진실을 외면한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법원이 기계적인 균형을 맞추는 데 매몰돼 결과적으로는 '권력 눈치보기' 결정을 내렸다는 일갈도 나온다.
이 변호사는 "형식적으로는 유가족과 경찰 간 균형을 갖추려는 듯한 외형을 띠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가해 경찰에 대한 수사를 회피해온 검·경에 스스로 면죄부를 찾을 기회를 부여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 전 판사는 "부검을 하는 것이 옳으면 영장을 발부하면 되고, 옳지 않으면 기각하면 된다"며 "하지만 조건을 붙임으로써 이도 저도 아닌 상태가 돼버렸고, 분쟁의 해결이라는 법원의 기본적인 책무를 망각한 판단"이라고 진단했다.
이와 관련해 한 현직 판사는 "과거에는 집행방법을 제한한다 하더라도 유족 참관 정도만 명시했을 뿐 이렇게 여러 가지 조건을 붙인 영장은 처음 본다"며 "양쪽으로부터 욕을 듣는 것이 싫어 눈치를 세게 본 것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후 300일 넘게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사인 규명을 하려면 진료기록만으로도 충분치 않겠느냐"며 검·경의 무리한 부검 시도를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