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이자 음악 칼럼니스트 김순배가 '디어 클래식'을 펴냈다.그의 이전 저작 '클래식을 좋아하세요?'가 입문서에 가까웠다면, '디어 클래식' 클래식에 관한 좀 더 깊은 시선을 드리운다.
'디어 클래식'은 클래식의 본고장 서유럽은 물론 동유럽, 러시아, 미국, 남미의 음악과 음악가의 생은 물론 비르투오소(연주 실력이 매우 뛰어난 대가)의 명연주와 종교음악까지 아우르며 클래식에 관한 너비와 깊이 모두를 넘나든다.
제1악장을 여는 이야기는 클래식을 창조해낸 음악가들이 주인공이다. 베토벤과 모차르트, 슈베르트 등 클래식의 본고장 서유럽의 대가들은 물론 평생 몽상가(우울)와 정력가(열정)라는 이중 자아에 시달렸던 슈만과, 수사가 되기를 염원했던 리스트의 파란만장한 생애, 현대음악의 씨앗을 틔운 에릭 사티, 대중이 더 열광했던 거슈윈과 탱고라는 남미의 지역음악을 전 세계의 음악으로 거듭나게 한 피아졸라, 그리고 정치와 역사의 파고에 휩쓸린 러시아, 동유럽의 작곡가들까지. 음악 너머 인간의 삶을 겹으로 체험하게 된다.
음악가들의 약전을 따라가다 보면 음악과 음악가의 인생이 아니라, 낭만주의 시대를 지나 볼셰비키 혁명, 양차 세계대전 등 시대의 무늬를 읽게 된다. 클래식의 이방인들이 동경하고 갈급했던 것이 무엇인지, 현대의 결핍이 어디에서 기인하고 있는지도 깨닫게 된다. 현실의 모순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살아야 했던 예술가의 초상들. 실제로 클래식은 당대 가장 치열했던 미술, 문학, 철학 등과 끊임없이 소통했다. 수많은 걸작이 고통의 와중에서 나오는 '백조의 노래'라는 점에서 클래식은 그 자체로, 현대인을 위한 총체적 예술로서의 인문학이라기에 부족함이 없다. '디어 클래식'은 클래식의 역사가 바로 위로의 역사였음을 실감케 한다.
이 책은 음악가의 삶을 통해 클래식에 관한 호기심을 부추긴 뒤, 두 악장을 통해 건반과 선의 향연을 펼쳐낸다. 실제로 작곡가는 악보를 통해 자신의 삶을 표현했고, 우리는 대가의 피나는 노력을 통해 그 음악을 기억하게 된다. 글렌 굴드가 아니었다면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어떻게 기억될까. 소년 카살스가 골동품 더미에서 '무반조 첼로 조곡' 악보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디어 클래식'은 작곡가의 분신이 돼 영원한 음악으로 거듭나게 하는 명연주자의 음악에 대한 해석은 물론 저자 특유의 비유로 음악을 찾아 들어보고 싶게 한다. 예컨대 공식적으로 확인된 음반만 150종이 넘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글렌 굴드의 피아노뿐만 아니라 금관악기, 아코디언 등의 연주 음반을 소개하며, 연주자와 악기에 따라 전혀 다른 빛깔의 음악이 되고, 그곳에 들어가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꾸밀 수 있는 집으로 비유한다.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스무 개의 시선'은 메시앙의 아내였던 이본 로리오의 연주부터 에마르, 베로프의 연주 등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음반에 대한 해석을 넘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북유럽의 하콘 오스트보 연주를 추천하며 '클래식 감상'의 폭을 넓혀준다.
이 책을 마무리하는 장은 우리에게 낯설지만 아주 익숙한 종교음악을 다루고 있다. '디어 클래식'을 읽다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작품이 누군가를 위해 작곡되고 헌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베토벤은 자신의 후원자를 위해, 멘델스존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연주자 친구를 위해, 브람스는 벗을 위해, 리스트는 여인을 위해 수많은 작품을 작곡했다. 그리고 클래식은 결국 지금의 우리가 수신인이 된 셈이다. 클래식은 그렇게 시간을 넘나들며 누군가에게 헌정되는 신의 선물이다. '디어 클래식'은 그렇게 과거, 현재, 미래에도 우리 삶의 배경음악으로 존재할 음악에 대한 경배인 것이다.
책 속으로
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작곡가들은 그들의 영혼을 무엇인가에 담보로 잡힙니다. 뼈저린 가난, 먼저 세상을 버리는 자식들, 이루지 못할 사랑, 현실과의 첨예한 갈등, 전쟁이 몰고 온 아픔, 돌아가지 못할 조국, 헤어나지 못할 육체의 질병, 그 육체보다 먼저 이 세상을 이탈하려는 정신, 마침내 닥치는 때 이른 그들의 죽음. 많은 걸작이 고통의 와중에서 혹은 죽음에 임박할 즈음 나오는 '백조의 노래'인 것을 우연이라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결국 창작은 영혼과 육체를 소진시키는 극한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신비한 일은 그것이 종종 스스로를 달래고 회복시키는 '자기 위로' 혹은 '자가 치료'의 한 방편이 된다는 것입니다. 작곡가 자신을 구원하고 마침내 작품을 듣는 이들도 구원하는. 클래식의 역사는 그래서 총체적인 '위로의 역사'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_ 표지 뒷면
모든 여인은 베토벤에게 불멸을 꿈꾸게 만드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중 아무도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사랑했던 여인은 모두 베토벤과 사랑하는 그 순간 불멸의 연인이었습니다. 대상 모를 편지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불멸의 연인을 확실히 밝혀놓았더라도 그의 마음은 또다시 정처 없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속된 표현을 빌리자면 베토벤은 '진정한 바람둥이'였습니다. 아니면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온전한 사랑을 일생 찾아 헤맨 사랑의 구도자였습니다. 그는 완전한 사랑을 염원했지만 여의치 않은 현실의 모순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살아야 했던 전형적인 예술가의 초상을 보여줍니다. _ 19쪽
'폴로네즈 판타지'는 조용히 그러나 우울하게 마음의 한 자락을 열어 보이듯 시작합니다. 무한한 자유를 향한 루바토의 행렬을 따라 폴로네즈의 친숙한 리듬은 문득 작곡가의 자의식을 흔들어 깨웁니다. 이 도입부를 다루는 피아니스트의 자세는 백인백색입니다. 루빈스타인은 일단은 우아하고 균형 잡힌 여유로, 리히터는 직설적이고 비장하게, 아르헤리치는 거의 웅혼한 느낌으로 분명한 대비를 드러냅니다. 연주자가 향수와 동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금세 드러나는 거죠. _ 154쪽
백건우의 베토벤 소나타 연주에는 특별한 점이 있습니다. 초기로 분류되는 작품들에서 후기의 초월성을 소급해 느낄 수 있는 것이죠. 삶의 전말을 일찍 알아버린 이의 담담한 반추나 관조의 분위기가 짙게 배었다고 할까요. 대신 날것 그대로의 패기나 생생함은 적지만, 중기를 지나 말기에 이르기까지 고통의 터널을 지나 초월의 상태로 변환해가는 작곡가의 초상을 연역법으로 파악하게 만드는 드문 기회가 여기에 있습니다. 쉽게 만날 수 없는 백건우만의 베토벤 독법인 것이죠. _ 175쪽
"독일은 4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자랑스러운 유산으로 지니고 있다. 위대한 기념비는 베토벤의 것이고, 브람스의 협주곡도 그 진지함에 있어서 베토벤과 동급이다. 유려하고 풍부한 감성은 막스 브루흐의 협주곡에 집중되어 있지만 가장 내밀한 '마음속의 보석' 같은 작품은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19세기가 낳은 바이올리니스트 명인 요아힘의 말입니다. 그의 평가가 아니더라도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E 단조'는 오랜 세월 많은 사람들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첫 낭만 협주곡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바이올린 협주곡 역사에서 전환적 의미를 갖습니다. _ 2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