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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엄숙한 명령과 계시를 태워 없애는 미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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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시의 미소:허연 시인과 함께 읽은 세계시인선'

 

"시는 엄숙한 명령과 계시를 태워 없애는 미소다."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파스가 한 말이다. 동의한다. 명령이나 계시와는 다른 동네에 시는 존재한다. 시의 미소에 감염된 자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그들은 때로는 열정으로, 때로는 재능으로, 때로는 자멸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감염된 생을 증거했다. 그들은 세상에 없던 것을 처음으로 보았고, 처음으로 들었으며, 처음으로 이야기했다. 그들은 시인들이었다. 지금 우리는 그들이 남긴 묵시록을 읽는다. 시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한생을 보낸 거인들의 미소에 경의를 표한다. ―시인 허연

허연 시인의 시 에세이 '시의 미소'가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은밀하게 만났던 시인에 대한 추억을 썼다. 감명을 준 국내외 시편과 그 시편의 이미지와 맞닿은 회화 또는 판화 작품, 그리고 허 시인의 단상을 적고 있다. 모두 19편의 시가 실렸다.

슐레지엔의 직조공
-하인리히 하이네

침침한 눈에는 눈물도 마르고
베틀에 앉아 이빨을 간다
독일이여 우리는 짠다 너의 수의를
세겹을 저주를 거기에 짜 넣는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중략)

북이 날고 베틀이 덜거덩거리고
우리는 밤낮으로 부지런히 짠다
낡은 독일이여 우리는 짠다 너의 수의를
세 겹의 저주를 거기에 짜 넣는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이 시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단상을 적고 있다. 케테 콜비츠의 판화 3점과 함께.

"그런데 하이네의 나머지 반 토막을 만났다. 우연히 케테 콜비츠의 암울한 6부작 판화 「빈곤-죽음-회의-행진-폭동-결말」을 보았고, 그것이 1844년에 있었던 슐레지엔의 직조공 폭동을 모티프로 삼은 작품이라는 사실과 그 연결고리에 하이네의 시가 존재했음을 알았다. 그 다음부터 ‘하이네’라는 이름의 음가는 낭만에서 저항으로 장르 전환을 했다. 아름다운 유채꽃밭보다 그 옆 선창가에서 그물을 터는 어부의 힘센 팔뚝이 더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진리를 깨닫기 시작했던 스무 살 무렵이었다. 소름이 돋았다."

'시의 미소'에는 릴케의 '이별', 말라르메의 '바다의 미풍', 보들레의 '알바스트로스', 엘뤼아르의 '그리고 미소를' 등 시편에 대한 단상과 관련 회화작품이 실려 있다. 다음은 각 시편에 대한 그의 단상 중 일부를 옮긴 것이다.

세기말 우울이 유럽을 휩쓸 무렵인 1897년 어느 날 릴케는 루 살로메를 처음 만난다. 사실 만났다기보다는 루 살로메가 강림하셨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릴케는 이때 “우리는 어느 별에서 내려와 이제야 만난 거죠.”라는 말을 건넸다고 한다.

말라르메는 현존을 떠나고 싶어 했다. 육체는 슬프고 모든 책은 이미 읽어 버렸으니까. 육신의 한계를 알고,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어 버린 자에게 남겨진 건 무엇이었을까? 탈주밖에 없지 않았을까? 인간의 육체로부터 인간이 구현한 대도서관으로부터 탈주하는 것, 그것이 말라르메의 꿈 아니었을까? 「바다의 미풍」은 그래서 선언문이다

생전 단 한 권의 시집을 냈지만 그 시집으로 온갖 야유와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보들레르. 생의 마지막을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금치산자로 살아야 했던 보들레르가 피운 꽃이 바로 ‘악의 꽃’이었다. 불행한 천재들이 다들 그랬듯 보들레르는 세상에 좀 일찍 온 인물이었다. 그는 긴 날개를 질질 끌며 우울한 파리를 헤맸다. 현대시는 그렇게 거추장스러운 보들레르의 날개에서 시작됐다.

“어쩌란 말인가 밤이 되었는데 / 어쩌란 말인가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데.” 삼엄한 사회 분위기에 대한 저항시를 쓰면서도 ‘사랑’으로 결말을 내고야 마는 엘뤼아르를 그 시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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