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진 카이젠 '거듭되는 항거' 중 '물결들'(영상 설치, 8분) 2011/2016
문장 한 줄 한 줄에 압도된 경험이 있는가. 제주 4.3 사건을 다룬 영상 '물결들'에 등장하는 문구들은 8분동안 작품이 끝날 때까지 완전히 몰입케 한다. 그 영상 작품은 제주도의 바다와 해변 하늘과 구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한 젊은 여성이 제주 갯바람에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뒷모습만을 보이며 바다를 바라보며 누워 있다가 나중에 쭉 걷는 모습이 화면에 펼쳐진다. 파도가 넘실거리듯이, 죽은 영혼의 목소리가 현재 우리의 귓전에 울려 퍼지듯이 살아 움직이는 시적인 문자들의 행렬을 만나보자.
모든 귀환은 떠남을 전제한다
모든 떠남은 은밀한 출생의 윤곽을 그린다
모든 은밀한 출생은 들리지 않는 숨
모든 숨은 어떤 증식
모든 증식은 어떤 수축의 연대기를 그린다
(중략)
모든 갈망은 귀환을 야기하며
모든 귀환은 균열을 가져온다
모든 균열은 어떤 도정의 변화
모든 도정의 변화는 어떤 가로지름
모든 가로지름은 어떤 마주침
모든 마주침은 어떤 바람을 품는다
(중략)
모든 윤곽은 불완전한 이야기
모든 이야기는 고통에 대해 말한다
모든 고통은 웅얼거림을 울리게 하고
모든 웅얼거림은 전율을 낳는다
(중략)
모든 비탄은 슬픔의 노래
모든 슬픔은 배상에 대한 탄원
모든 배상에 대한 탄원은 어떤 내지름
모든 내지름은 들어줄 이를 찾는다
(중략)
모든 기억은 망각의 먹잇감
모든 망각은 어떤 감싸안음
모든 감싸안음은 보호하는 방패
모든 방패는 무언의 금지
모든 금지는 어떤 삭제
모든 삭제는 소멸된 과거
모든 소멸된 과거는 상상을 살찌운다
(중략)
모든 귀환은 속삭임으로 둘러싸이며
모든 속삭임은 어떤 생성을 예감한다
(중략)
모든 지나감은 고요한 떠남
모든 떠남은 귀환을 암시한다모두 103행으로 이어진 '물결들'의 시구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순환 고리를 이룬다. 앞 문장의 뒷 단어는 바로 이어지는 문장의 첫 단어가 된다. 그러고보니 '모든 떠남은 귀환을 암시한다'는 마지막 행은 첫 행 '모든 귀환은 떠남을 전제한다'로 꼬리를 물며 이어진다. 작가는 떠남과 귀환, 기억과 망각, 생성과 소멸의 원리를 간직한 바다의 물결들을 지긋이 바라보며 사회 속의 개인, 역사 속의 개인이 가지는 고통을 직시하고 그 고통을 떠나보낸 뒤 생성의 물결로 충만함에 이르렀으리라.
제인 진 카이젠 '거듭되는 항거'중 '물결들', 영상 설치, 8분(사진=삼성미술관 리움 제공)
덴마크 입양아 출신인 제인 진 카이젠은 지난 십여년간의 프로젝트에서 해외 입양, 한국의 분단 상황, 그리고 냉전 속 아시아에 대한 디아스포라적 시각을 가지고 식민주의, 전쟁, 군국주의, 그리고 이산과 관련된 국제정치사가 현재에 미친 영향해 대해 다각도로 탐구해왔다.
'물결들'은 카이젠이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12일부터 열리는 '아트 스펙트럼 2106'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이다. '물결들'은 제주 4.3항쟁에 대한 기억을 다룬 다채널 영상, '거듭되는 항거' 중의 하나이다. 이 작품은 주로 제주 4.3 항쟁을 둘러싼 일들을 조사하고 이에 대해 발언해온 사람들의 목소리로 전개된다. 작가는 이진아 삼성미술관 리움 학예연구원과 인터뷰에서 "이 목소리들을 통해 나는 수십년 간 강요된 침묵의 원인을 밝히고 그 사건의 복잡한 내막에 다가서고자 했다"고 밝혔다.
'거듭되는 항거'는 8개의 각기 다른 영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8개의 영상은 제주 4.3의 다양한 면모를 드러내고 제주도의 현재 풍경, 그 사건을 암시하는 문학적 재현, 생존자들과 친지들에게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기억, 산 자와 죽은 자를 매개하는 무당의 굿, 그리고 민간의 시위 장면을 통해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당시의 트라우마가 현재와 공명함을 보여준다.
이번 '아트 스펙트럼' 전시에 처음으로 선보이는 8번째 영상 '물결들'은 여러 면에서 여러 면에서 이 작품을 완성하는 마지막 영상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작가는 " '거듭되는 항거'를 구성하는 나머지 영상들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로 진행되지만 '물결들'에서는 제주 4.3과 제주도와 나의 관계를 표현한 시를 내가 직접 읽는다. 또한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파도의 특성을 소재로 하여 역사, 기억, 인정, 치유라는 개념에 또 다른 차원을 더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작가는 이어 "나에게 있어서 '물결들'은 분절된 나 자신의 역사를 받아들이고, 개인의 삶의 길이와 인간중심적인 시간의 개념보다 먼저 존재했고 이를 넘어서는 시간적 차원에 대한 인정이기도 하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옥인 콜렉티브, 아트 스펙트랄, 2016
이번 출품작 가운데 '아트 스펙트랄'은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예술이 사회와 맺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작품은 이정민, 진시우, 김화용 3명으로 구성된 옥인 콜렉티브가 출품했다. '아트 스펙트랄'은 사라지는 예술, 유령 같은 예술로 해석된다. 이 작품은 작가 지원 프로그램에도 불구하고 유령처럼 홀연히 사라져 다른 경제활동을 해야 하는 작가들의 고민을 드러낸다. 옥인 콜렉티브가 준비한 마루에는 작가들이 기획한 '사라짐'에 대한 글이 담긴 책자들이 놓여 있다. 이 책자의 필진으로 큐레이터, 예술이론가, 영화평론가, 여성학자, 기자 등이 참여했다. '아트 스펙트랄'에는 큐레이터십과 검열, 청년 빈곤 르뽀, 고령사회 노년의 불안 등 여러 글들이 실려 있다. 작가들은 관객들이 이 글들을 다 읽고 고민을 함께 하며 글로 남겨주기를 바랐다.
'아트 스펙트랄'에 실린 배은아 큐레이터의 글 '퍼포먼스 퍼포먼스 퍼포먼스'의 한 대목을 보자.
"아마도 그들에게 더 설득력 있었던 것은 민주화운동을 이끈 광주비엔날레의 제 10회 기획전에 참가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비정규직과 실업에 허덕이던 많은 시민들이 이 작업에 신청을 했고 아마도 그들에게 더 설득력 있었던 것은 시급으로 계산되는 보수였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 모두를 받아들였다. 100여 명에게 지급해야 하는 시급을 현금 정산할 수 없었던 비엔날레 코디네이터는 퍼포먼스가 있을 때마다 매번 개개인에게 인터넷 뱅킹으로 송금해야 했다. 그것은 그녀의 악몽이 되었을 것이다. 배꼽 인사와 웃음 서비스가 강요되는 한국 사회에서 과연 환대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는 손과 받는 손이 나누어야 할 존엄은 사라지고 그 형식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닌가? 생면부지의 퍼포머들과 경험했던 악수는 일종의 폭력이었을지도 모른다. 손은 사라지고 그 껍데기만 남아 다른 실재를 찾아 떠난다."
이호인, 다리를 건너는 자들, 2016
이호인 작가는 도심의 랜드마크를 그렸다. 롯데월드타워나 한강대교, 국회의사당 등. 그런데 랜드마크가 주는 휘황한 위용보다는 어두운 느낌을 준다. 작가는 한강대교를 그린 '다리를 건너는 자들'(2016)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한강대교는 6.25 때 이승만 대통령이 폭파했던 아픈 역사가 서려 있는데, 그런 것은 잊혀진 채 우리 곁에 우수 조망 야경으로 버젓이 존재한다는 게 씁슬했다. 우리는 정치·사회적으로 한강대교가 또 끊길 수도 있는 그런 처지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게 이 작품이다."
김영은은 소리를 매체로 한 작업을 꾸준히 선보여왔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물질성이 없는 소리의 특성에 주목하고 사물을 측정할 때 사용하는 단위를 소리에 적용하여 소리의 존재를 실체화하려 시도한다. 작가는 사물의 크기를 측정할 때 사용하는 기준인 길이, 높이, 폭을 각각 음원의 재생시간, 음정, 주파수 대역으로 치환한 뒤 미국 아이튠즈 스토어의 대중가요 음원이 한 곡당 1.29달러인 것에 착안하여 29센트어치 재생시간, 음정, 주파수가 빠진 세 가지 버전의 1달러어치 노래를 만들었다.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없기 때문에 존재를 확인하기 어려운 소리를 물질화하려는 작가의 실험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이번 전시에는 박경근, 박민하, 백정기, 안동일, 옵티컬 레이스, 최해리,제인 진 카이젠, 옥인 콜렉티브, 이호인, 김영은 등 10명(팀)이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