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세 외교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이 28일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 외교장관 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사진=박종민 기자)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지난 1991년 첫 증언이 나온지 24년 만에 타결됐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은 이날 오후 서울 세종로 외교부 청사에서 열린 공동 기자회견을 통해 협상 타결 소식을 알렸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지난 1991년 8월 14일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통해 위안부 피해 사실을 처음으로 증언하면서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같은해 12월 8일 김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 3명이 일본 정부에 제소를 했다.
이듬해 1월 13일 일본 정부의 가토 관방장관이 담화를 통해 일본군이 관여한 사실을 공식 인정했고 며칠 뒤인 1월 17일 미야자와 일본 총리가 방한해 위안부 문제를 사죄했다.
이때부터 일본 정부의 실태 조사가 빠르게 진행됐고 1993년 3월 13일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정부 차원에서의 물질적 보상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히는 대신 철저한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그 결과 같은해 8월 4일 일본 정부의 2차 조사결과와 함께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 등을 인정한 것으로 유명한 '고노 관방장관 담화'가 발표됐다.
또, 1994년도 고교일본사 교과서에는 '위안부' 기술이 들어갔고 같은해 8월 31일 무라야마 당시 총리는 위안부 사죄 담화를 발표하는 등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성과가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보상 문제 등과 관련해 난관이 시작됐다. 1995년 7월 일본은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을 발족했지만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등 위안부 관련 43개 단체는 일시적인 보상금 성격의 기금 발족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평통사) 회원들이 28일 오후 한일 외교장관 회담이 열리는 서울 세종로 외교부 청사 앞에서 ‘위안부 법적 책임 외면하며 침략과 식민지배 정당화하려는 아베 정권, 한일 군사협력 강화하며 일본군 한반도 재침략 용인하는 박근혜 정권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특히, 1997년 1월 일본의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은 교과서에 위안부 기술 삭제를 요구하는 등 일본 우익 세력을 중심으로 위안부 부정 움직임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4년여 만인 2001년 4월 새역모 교과서가 일본 문부과학성 검정을 통과했고 2006년에는 일본 중학교 교과서 본문에서 위안부 기술이 삭제됐다. 이 사이 김학순 할머니 등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제소는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원고 패소 판결이 확정됐다.(2004년)
그럼에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국 정부와 국제사회의 움직임은 계속돼 2007년 7월 30일 미국 하원 본회의에서는 일본 정부에 대해 위안부 문제 책임 인정과 공식 사죄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채택됐다.
2011년 8월 30일에는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 청구권 분쟁을 해결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건 위헌"이라는 우리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나왔고 곧바로 우리 정부는 일본에 위안부 배상청구권 관련 외교협의를 요청했다.
그러나 아베 정부가 들어선 이후 일본의 우경화는 더욱 급격히 진행됐으면 급기야 2013년 2월 7일에는 아베 총리가 국회에 출석해 "사람 납치 같은 강제를 보여주는 증거가 없다"며 위안부 부정을 공식화했다.
이후 2014년 1월, 미국 하원을 통과한 위안부 결의안(2007년)의 준수를 촉구하는 법안이 상.하원을 모두 통과하는 등 국제적 압박이 강화되자 같은해 3월 아베 총리는 "아베 내각에서 고노 담화의 수정을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한발 물러섰다.
아시아태평양전쟁희생자 유가족들이 28일 오후 한일 외교장관 회담이 열리는 서울 세종로 외교부 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무능한 한국정부와 진정성 없는 일본 아베 총리’를 규탄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이 때부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 양국간 외교부 국장급 실무회담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