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를 잊게 만드는 충북 제천의 청풍호반을 무대로 펼쳐진 제11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지난 18일 6일간의 여정을 마치고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올해 제천음악영화제는 역대 최대 규모, 최다 관객 기록을 모두 새로 썼다. 25개국 103편의 음악영화를 선보인 데 힘입어 3만 3000여 명의 관객을 불러 모은 덕이다. 이번 영화제 기간 제천을 찾은 이명희 영화평론가의 3회에 걸친 글을 통해 생생한 현장 분위기를 전한다. [편집자 주]<글 싣는="" 순서="">
① 스크린 타고 호숫가에 내려앉은 희망의 노래
② "음악이 곧 역사"…스크린 속 뮤지션들의 외침
③ 갈등 누그러뜨리는 음악적 교감 직시한 카메라
제11회 제천음악영화제 대상 수상작인 '킵 온 키핑 온' 스틸(사진=제천국제음악영화제 제공)
올해 제천음악영화제 대상 수상작인 '킵 온 키핑 온'(알란 힉스 감독, 미국)은 93세의 전설적인 흑인 재즈 뮤지션 클락 테리와, 그의 마지막 제자이자 젊은 아시아계 피아니스트이며 시각장애자인 저스틴 카우플린의 각별한 관계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다.
영화를 연출한 감독도 클락 테리의 제자라고 한다. 건강상태가 위중한 클락 테리는 산소호흡기를 착용하고 병석에 누워서도 저스틴에게 음악 스승으로서 멘토가 된다. 저스틴 카우플린도 몽트뢰 재즈페스티벌에서 스승에게 감사를 표하는 곡인 '클락을 위하여'(For Clark)를 연주해 대상을 받는다.
두 천재 뮤지션의 생생하고 감동적인 순간들은 흑인빈민가에서 1920년에 태어난 클락 테리가 재즈의 거장이 되기까지 거의 100년에 이르는 음악과 사회의 역사적 기록과 교차한다. 66년의 나이 차와 세대 차를 초월해 죽어가는 구세대가 젊은 세대를 성장시키는 순수한 열정이 아름답다.
음악을 통해 성장하고 표현하는 청소년들을 그리는 성장영화가 유달리 많았다는 점도 이번 영화제의 특징이다. '막스와 레니'(프레드 니콜라 감독, 프랑스), '비틀즈'(페터 플린트 감독, 노르웨이), '청춘찬가'(다비드 앙드레 감독, 프랑스), '이바라키의 여름'(전성호 감독, 한국), '어바웃 어 걸'(마크 몬하임 감독, 독일) 등이 그 면면이다.
'데싸우 댄서스'(얀 마르틴 샤프 감독, 독일)는 1985년 동독에서 서구의 브레이크댄스에 열광하는 젊은이들과, 시류를 파악하지 못하고 정치적인 이용과 통제에만 몰두하는 구세대와의 갈등을 코믹하게 그려낸 수작이다.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은 프랑스의 프레드 니콜라 감독의 데뷔작 '막스와 레니'는 아랍인과 불법이민자들이 많은 마르세이유 빈민가를 배경으로, 배우가 아니라 마르세이유 주민들이 직접 연기한 저예산영화다. '길에서 더 배우는 게 많다'며 학교도 그만둔 부모 없는 아랍계 소녀 레니가 불법체류자인 콩고 소녀 막스를 만나 진한 우정과 희망을 나누는 이야기이다. 방황하는 레니의 랩 음악은 학교가 아니라 길위의 경험, 진정한 삶을 노래한다.
영화 '미라클 벨리에' 스틸
특히 프랑스 영화 '미라클 벨리에'(에릭 라티고 감독, 프랑스)는 제천음악영화제에서 가장 감동적인 성장영화로 꼽을 수 있다. 청각장애인 가족과 살아가는 중학생 소녀 폴라가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놓아야 하는 가족의 끈과, 동시에 끈끈한 가족애 때문에 생기는 갈등을 코믹하게 그려낸 유쾌한 영화다. 웃다보면 어느 틈에 노래 한 곡에 담긴 성장통이 관객을 몹시 아프게 하고 감동시키는 신기한 마법을 경험하게 만든다. 성장통은 아이에게만 있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각인시키는 까닭이다.
미라클 벨리에가 단순한 구조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서 몇 주 동안 7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모으며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한 것도, 주연배우가 프랑스 세자르 신인여배우상을 받은 것도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세련되고 빠른 스타일과 강한 자극만을 추구하는 영화와는 달리, 가족애, 공동체의식, 참교육 등 근본적인 미덕들에의 회귀 욕구를 자극한다. 이를 통해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가족이 무엇인지 새삼 생각하게 하고 관객도 함께 성장시키는 이 건강한 영화의 원제는 '벨리에 가족'이다.
◇ "하늘의 별이 된 너희들을 결코 잊지 않을게"영화 '열일곱살의 버킷리스트'는 스콜피온즈가 될 뻔했던 아이의 이야기다. 세월호에서 희생된 박수현 군은 중학생때부터 뮤지션의 꿈을 키웠고, 단원고에서 ADHD라는 밴드를 이끌었던 재원이었다. 8명의 멤버 가운데 5명이 세월호 참사로 희생되고 3명만 남은 밴드는 수현의 수첩에서 발견된 버킷리스트 가운데 하나인 '20회 공연'의 꿈을 이루고자 한다. 이를 위해 '브로큰 발렌타인'(Broken Valentine)이란 록그룹 멤버들이 남은 세 명의 멤버를 도와 연습하고 공연하는 과정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았다.
다큐를 만든 윤솔지 감독은 박수현 군의 교복 상의와 박수현이란 이름의 배지를 달고 관객 앞에 섰다. 영화에는 "밴드동아리 리더가 된 것이 가문의 영광"이라 익살을 부리던 수현이를 그리워하는 엄마, 아들이 아침마다 돌아와 연주할 수 있도록 기타를 튜닝해 놓는다는 아빠의 모습도 담겨 있다. 이 영화를 박수현 군의 가족이 함께 보았기에 더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영화 '열일곱살의 버킷리스트' 스틸
'노래로 말하는 사람들'은 비교적 조악하지만, 아마추어 뮤지션들의 증언을 통해 창의적 표현력은 인디문화의 젊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다큐다. 스콜피온즈 공연에 30만 명이 모일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 주는 나라의 장면을 보여준 다른 다큐와는 달리, 뮤지션이고자 하는 청춘에게 오픈 마이크를 마련해 주는 통찰력 있는 카페주인들을 비춘다. 그러나 이들 카페가 하나 둘 문을 닫아야 하는 어려움을 이 다큐는 보여주었다.
자신들의 음원이 6000번 스트리밍 돼도 5000원 밖에 벌 수 없었다는 그들은 이러한 불공정 관행을 주도하는 대기업의 야만을 고발하며, 음악과 예술이 발전하려면 대기업에 '상생'의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외친다.
'못해도 즐기자'라는 다큐 속의 아이들은 표현의 자유라는 놀이터가 창의력에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젊은이들을 배려하는 것이 곧 예술과 창조의 기본이라는 것을 제천음악영화제에서 수많은 영화들은 증명하고 있었다.
글 = 이명희 영화 평론가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