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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 영화톡]50년간 하루도 안 거르고 쓴 어느 무명인의 '사진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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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묻혀 있던 '거리 예술가' 비범한 삶 추적

2007년, 15만 장에 달하는 필름이 우연히 발견된다. 이름만 남긴 그 천재 사진작가는 비비안 마미어(1926~2009). 영화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감독 존 말루프, 찰리 시스켈)는 세상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던 한 비범한 예술가의 행적을 좇는 흥미로운 다큐멘터리다. 추리극 형식을 띤 이 영화를 본 뒤 이명희 영화 평론가와 나눈 이야기를 전한다. [편집자 주]

 

이명희 평론가: 우연히 무명인(無名人)의 기록물을 발견해 그 인물의 진가를 알아내는 과정을 즐거운 다큐멘터리로 선사한 감독에게 찬사를 보내야 하는데, 비비안 마이어라는 신비로운 인물의 인상이 너무나 강하게 남는다.

이진욱 기자: 자료를 보니 이 영화를 공동 연출한 존 말루프 감독은 사진작가, 역사가를 겸하고 있다. 여전히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들을 보존하고 세상에 공개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단다. 비범한 인물은 비범한 인물이 알아보는 법인가 보다. (웃음)

이명희: 죽어서 사진작가로서의 꿈을 이루고, 이제 신화로 재탄생했으니 그녀의 삶은 진정한 의미에서 성공적이다. 비비안 마이어의 삶은 경이로움 그 자체다. 유모, 가정부, 간병인으로 살았다는 사실밖에 알려진 게 없는데, 수십 만 장의 방대한 필름을 남겼고, 살아 생전 그것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다니.

이진욱: 염세주의로 유명한 철학자 쇼펜하우어(1788~1860)는 평생 고독하게 살다가 말년에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으면서 행복한 여생을 보냈다더라. 이런 경우를 보면 주변에서 '나'를 알아 준다는 건 대단한 삶의 동력이 아닐까 싶다. 비비안 마이어는 어떻게 평생 무명인의 삶을 견지했을까?

이명희: 그녀가 남긴 필름은 어림잡아 하루에 8장 이상씩 50년 동안 찍은 양이라고 한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50년 동안 쓴 일기처럼. 모든 일에서 치열하게 극단까지 갈 수 있는 건 진정한 예술가만이 할 수 있는 일 같다.

영화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에 나오는 비비안 마이어의 작품(사진=오드 제공)

 

이진욱: 비비안 마이어와 알고 지낸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그녀는 굉장히 괴팍한 사람이었다. 사진에 광적으로 매달리는 건 익히 봐 와서 알지만, 그녀가 훌륭한 사진을 찍고 있었다는 건 다들 전혀 몰랐다고 한목소리를 낸다.

이명희: 사진계의 에밀리 디킨슨(1830~1886)이라고 불러도 될까? 평생 독신자, 은둔자였으며 세속적인 야심을 거부해 죽고 나서 발굴된 여류시인 에밀리 디킨슨처럼, 비비안 마이어는 신비하고 순수하다. 이는 자기 확신에 차 있고 자긍심 강한 예술가의 의도적인 삶으로 보인다.

이진욱: 에밀리 디킨슨은 당대 상류층이었던 것으로 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서재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지식을 쌓았다던데, 비비안 마이어와는 결이 다르게 다가온다.

이명희: 그렇다. "나는 무명인입니다. 당신은 누구세요? 당신도 무명인인가요? 그럼 우리는 같은 처지인가요? (이하 생략)"라고 시를 썼던 에밀리 디킨슨은 가족도 있었고 경제적 여유도 있었다.

반면 비비안 마이어는 가족도 친지도 없이 고독하게 하류층으로 살다가 죽은 무명인이었다. 그녀의 사진들은 그녀가 한때 세상을 살았다는 증거물이다. 이제는 위대한 역사적 기록, 예술자산으로 바뀐 증거물 말이다.

이진욱: 비비안 마이어가 한참 사진을 찍던 때는 1950~70년대로, 당시 그녀가 살던 미국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헤게모니 국가로서 최고의 호황을 누리던 때다. 미국인들이 '아메리칸 드림'에 취해 중산층으로의 신분상승을 꿈꾸던 때, 비비안 마이어는 거리로 눈을 돌렸다. 개인적으로 그녀가 몹시 특별한 존재로 여겨지는 대목이다.

영화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에 나오는 비비안 마이어의 작품(사진=오드 제공)

 

이명희: 맞다. 미국이 풍요를 구가하던 시절 비비안 마이어는 거리의 약자, 소외계층, 아이든 어른이든 눈물 흘리는 이에게로 달려간다. '미국인들'이란 사진으로 영광을 누린 로버트 프랭크도 그런 사진가였다. 비비안 마이어는 살아생전 철저히 자신을 숨긴 채, 광인에 가까우리 만큼 독야청청 작품활동만을 했던 자유로운 정신이다.

이진욱: 작가 황석영의 장편소설 '여울물 소리'에는 곪아터지기 직전의 조선 후기, 동학도로서 민중의 삶을 기록하고 전파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소설 속 인물이 그 일을 한 데는 물론 당대를 사는 소외된 지식인으로서 뚜렷한 소명의식을 지닌 측면도 있겠다.

하지만 집도, 사랑도 뒤로 한 채 자신의 일을 이어가는 데서는 삶을 예술로 만들어내는 장인의 특별함이 묻어난다. 이 영화를 보면서 황석영의 소설이 떠오른 데는 시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예술의 영역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어느 시대에나 있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다.

이명희: 영화 평론가가 사진을 논하기는 어렵지만, 감각과 유머로 가득찬 사진들, 따뜻하며 세심하고 애정이 넘치는 사진들은 1920년대, 30년대 앙드레 케르테츠가 찍은 몇몇 사진을 떠올리게 했다. '일상의 르뽀'라는 특징도 유사하다.

그녀가 거리의 흑인, 노숙자, 장애인, 아이들, 다친 동물, 깨지고 버려진 물건까지 사소한 것의 내면적 표정과 가슴 뭉클한 풍경들을 잡아내는 관찰력, 타인의 감정과 고통을 사진으로 공유하는 일관성에 놀라게 된다. 자기 자신을 찍은 사진들은 또 얼마나 독창적인가. 비비안 마이어가 얼마나 비범하고 독특한 인물이었는지 알아가는 재미가 영화에 있다.

비비안 마이어가 자신을 찍은 작품(사진=오드 제공)

 

이진욱: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은 그 자체로 시대의 모순을 오롯이 드러내는 듯하다. 미국을 상징하는 마천루를 배경으로 그녀의 앵글 안에 담긴 사람들과 사물 들은 각자의 아픔을 드러내는 표정과 몸짓을 하고 있다. 이 영화는 비비안 마이어의 작품과 주변인들의 증언을 씨실과 날실 삼아 극단의 시대를 살아낸 한 예술가의 정신을 정직하게 직조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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