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제국의 항복조인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조리호에 도착한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대신 (연미복에 지팡이를 든 인물)
1945년 9월 2일 오전 9시 8분 미국의 전함 미주리호. 이곳에서 일본제국의 항복조인식이 열렸다. 먼저 맥아더 장군의 짧은 연설이 끝나자 연미복에 지팡이를 짚은 인물이 절뚝거리며 항복문서가 놓여진 책상 앞으로 나왔다.
바로 일본제국의 마지막 외무대신(한국으로 치면 외무부장관)인 시게미쓰 마모루였다. 펜을 잡은 시게미쓰의 손이 떨렸다. "대일본제국이 지다니…." 이 서명 장면은 일본제국의 몰락의 상징이었다.
그는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항복문서에 서명하고는 그 펜을 들고 자리를 떴다. 맥아더 장군의 보좌관들이 화난 얼굴로 시게미쓰가 물러가는 장면을 째려보았다.
조인식 책상에는 항복문서와 함께 '항복 서명용 펜'이 비치돼 있었다. 이 펜은 훗날 미국 버지니아주 노포크에 세워질 맥아더 박물관에 보관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책상 앞에 다가간 시게미쓰는 자기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서명한 뒤 자기 주머니에 넣고 절뚝거리며 가버린 것이었다.
그의 오른발은 어떤 문제가 있었나? 바로 윤봉길 의사가 하늘로 날려버린 것이다.
1932년 4월 29일 훙커우공원 일왕 생일 기념식장 단상에 선 일본 요인들의 뒷모습.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진 곳과 비슷한 위치에서 찍은 사진이다. 왼쪽부터 가와바타 사다쓰구(河端貞次)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다음날 사망),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주중 일본공사(다리 중상),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일본 제3함대사령관(오른쪽 눈 실명),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상하이파견군 대장(1개월 후 사망),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제9사단장(부상).
◇ 윤봉길이 던진 폭탄이 시게미쓰의 오른발을 날려버리다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기념하는 행사가 한참 진행되고 있었다. 오전 11시 40분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윤봉길 의사는 도시락 폭탄은 땅에 내려놓고 어깨에 메고 있던 물통 비슷한 폭탄의 안전핀을 뺐다. 물통은 투척용이고 도시락은 자결용이다.
기미가요 1절이 끝날 무렵, 단상 뒤쪽 19m 떨어진 곳에서 군중과 섞여 있던 윤봉길은 단상 앞으로 달려갔다. 단상을 둘러싼 일본 헌병대의 1차 경계선을 뚫고 5m 앞 기마병 앞에까지 뛰어들어 힘차게 도시락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노무라 중장과 시라카와 대장 사이에 명중했다.
"쾅~!"
당시 식장에 있었던 20살의 상사 직원 이와자키 타로(훗날 니치니치 경제신문 도쿄지국장)의 목격담을 들어보자.
"폭음소리와 함께 직경 약 2m의 새하얀 불덩어리가 빛을 내며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단상에 있는 사람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연기가 걷히자 단상에는 모닝코트를 입고 비단모자를 쓴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일어나려고 기를 썼으나,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이 사람이 훗날 외무대신이 되는 시게미쓰 마모루였다. 또 한 사람이 보였다. 유연하게 걸어서 계단을 내려오려고 하는 카키색 군복을 입은 사람이었다.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이었다. 그는 한두 걸음 내려와서 홍백색 난간에다 왼손을 기댔다. 그 어깨에서부터 팔목에 이르기까지 '푸슛' 하면서 피가 튀어오르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동시에 푹 쓰러지려고 하는 것을 2~3명의 사람들이 달려나가 아래에서부터 부축했다."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으로 사망한 시라카와 대장의 군복을 부관으로 보이는 일본 군인이 살펴보고 있다. 가슴과 찢겨나간 바지통 곳곳에 피가 묻어 있다.
폭탄이 폭발한 것을 확인한 윤봉길은 자결하려고 자기 옆에 도시락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이었다. 폭탄이 터지지 않자 일본 헌병들이 윤봉길에게 달려들어 마구 구타했다. 윤봉길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외쳤다. 윤봉길은 곧 일본군 사령부로 끌려갔다.
이 사건으로 시라카와 상하이파견군 사령관과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가 사망했다. 우에다 중장은 왼쪽 다리를 잘랐고, 노무라 중장은 오른쪽 눈을 잃었다. 주중 공사 시게미쓰는 오른쪽 다리가 날라가 죽는 날까지 10kg에 달하는 의족을 달고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했다.
일본이 패망하자 시게미쓰 마모루는 A급 전범으로 체포돼 도쿄전범재판에서 금고 7년형을 선고받았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1950년 가석방된 이후 정계 막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다 1957년 사망했다.
◇ 롯데의 신격호, 시게미쓰 집안의 사위로 들어가다
큰아들 신동주의 결혼식에서 포즈를 취한 롯데 신격호 회장과 부인 시게미쓰 하츠코씨.
신격호는 1941년 만 19살 나이에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주머니에 있는 돈은 겨우 83엔. 한국에 임신한 아내를 두고 왔던 신격호는 일본에서 중혼을 했다. 이 결혼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그가 머물던 집 주인의 딸 시게미쓰 하츠코가 그의 두 번째 부인이다.
하츠코의 외삼촌이 바로 시게미쓰 마모루 전 일본 외무대신이다. 마모루 입장에서는 윤봉길이란 조선사람에게 다리를 바치고, 신격호라는 조선인에게 조카를 준 셈이다.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극심한 일본에서 신격호가 대기업을 이룬 배경에는 처가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신격호의 일본 이름이 '시게미쓰 다케오(重光武雄·창씨개명)'라니 처가 쪽의 고마움이 느껴진다.
재미있는 것은 아베 수상 가문과 신격호 집안이 각별한 사이란 점이다. 아베 수상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 전 수상과 마모루가 주중 일본공사를 서로 주고 받고 똑같이 A급 전범이란 전력을 갖고 있는 등 친밀하고도 공통된 관계를 맺고 있는 것과 연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