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대한민국이 ‘메르스(MERS) 공포’에 휩싸였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인 2003년 4월 중국의 심장 ‘베이징’도 ‘사스(SARS) 창궐’로 도시 전체가 공황에 빠졌었다. 당시 기자는 칭화대학에서 어학연수 중이었다. ‘메르스 방역’에 필요한 교훈을 찾고자 베이징의 상황을 날짜별로 되짚어본다. [편집자 주]
중국 경찰은 2003년 4월 21일 일반인의 칭화대학교 출입을 통제하기 시작했다.(사진=변이철 기자)
손바닥으로는 결코 하늘을 가릴 수 없다. 중국 정부는 2003년 4월 18일(금) 결국 대내외적으로 '베이징이 심각한 사스(SARS) 위기 상황에 부닥쳐 있다'고 인정했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 '괴질이 돌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은 3월 초부터다. 그러니 '사스가 급격하게 퍼지고 있다'는 사실을 한 달 이상 '쉬쉬'하며 감춰온 셈이다.
당시 후진타오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은 이날 처음으로 '사스 은폐를 중지하라'고 각 보건당국에 지시했다.
이틀 뒤인 20일에는 중국 당국이 베이징의 SARS 환자 수를 비교적 정확하게 발표하며 상황의 심각성을 인정했다. 이날 발표된 베이징의 감염 환자 수는 339명, 사망자는 18명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엄중한 상황이었다.
곧이어 멍쉐농 베이징 시장이 해임됐고 장원캉 위생부장도 사임했다
소식을 전해 들은 베이징 시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괴담'으로 치부됐던 이야기들이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베이징은 도시 전체가 공황상태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주말이 지나고 한 주가 시작되는 21일(월) 아침이 되자 '공포'는 현실로 다가왔다.
칭화대학 동문 앞에서는 아침부터 실랑이가 벌어졌다. 경찰과 경비원들이 일반인의 대학 출입을 봉쇄한 것이다. 많은 사람이 결국 학교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발걸음을 되돌렸다. 나는 학생증을 보여주고 간신히 교문을 통과했다.
칭화대 캠퍼스는 여느 때와는 달랐다. 오가는 사람들이 적었다. 대학의 활기는 온데간데없고, 오히려 적막감마저 돌았다.
갑자기 지난 금요일의 일이 기억났다.
오후 3시쯤, 수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맞은편에서 경찰차와 구급차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불현듯 머릿속을 스친 생각은 '저렇게 빠른 속도로 대학캠퍼스를 질주하다니…. 분명 무슨 일이 벌어졌군!'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따라갔다. 경찰차와 구급차는 칭화대 부속병원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흰 가운을 입고 마스크를 한 의료진 3명이 급하게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사스를 상징하는 흰 마스크를 보는 순간,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지만, 선생님은 들어오지 않았다. 이윽고 다른 교직원이 들어왔다. 간단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앞으로 관련 규정에 따라, 칭화대학 밖에 거주하는 교사들은 학교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게 됐어요. 자연히 수업시간과 방법도 조정이 불가피한 상황이에요. 일단 1주일 동안 휴강을 한 뒤 다시 학사일정을 통보하겠어요. 당분간 여러분 스스로 공부를 하세요."
이 교직원은 이어 몇 가지 대학본부 결정사항도 통보했다.
"사스 때문에 고국의 가족들이 걱정을 많이 하거나, 본인이 많이 불안하면 귀국해도 좋아요. 그리고 온도계를 나눠줄 테니, 열이 많이 나면 즉시 교직원한테 연락하세요. 그러면 신속하게 후속조치를 취할 수 있어요."
실제로 이 시기부터 많은 외국인 유학생들과 베이징 주재원들의 '베이징 탈출'이 본격화됐다.
교직원의 설명을 듣고, 교실을 나서는데 ‘유학생식당에서 무료로 예방 한약을 나눠주고 있다’는 공고가 눈에 띄었다.
그때부터 베이징 사람들은 온통 ‘사스' 이야기뿐이었다. 서로 안부를 묻거나, 앞으로의 경제 상황을 걱정하는 중국인의 대화를 엿듣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상당수 초중대학은 속속 임시휴교에 들어갔고, 격일제 근무를 하거나, 임시휴무에 들어간 회사도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