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평생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성우에서 배우로, 또 다시 가수에서 예능인으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다. 그렇게 시인의 딸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여배우가 되었다.
향년 63세로 눈을 감은 고(故) 배우 김자옥의 이야기다.
배우 김자옥. (자료사진)
◈ 시인의 딸, 대한민국을 주름잡는 여배우가 되다
김자옥은 1951년, 피란지인 경상남도 부산에서 시인 김상화의 2남 5녀 중 3녀로 출생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재능은 빛을 발했다. 서울교대 부속국민학교 재학시절에는 CBS 어린이 전속 성우로 활약했고, 배화여자중학교 재학 중에는 TBC 드라마 '우리집 5남매'로 브라운관에 데뷔했다.
본격적인 연예계 입문은 1970년 MBC 2기 공채 탤런트에 합격하면서 이뤄졌다.
이듬해인 1971년, 서울중앙방송(현 KBS 한국방송공사)로 스카우트되면서 김자옥은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그는 드라마 '심청전'의 주인공으로 발탁돼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70년대 안방극장을 주름잡는 트로이카로 떠올랐다.
이후 김자옥은 드라마와 영화, 라디오를 넘나들며 최고의 전성기를 보냈다. '눈물의 여왕'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애절한 연기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데뷔 5년 만인 1975년, 그는 김수현 작가가 집필한 드라마 '수선화'에 출연해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여자최우수연기상을 거머쥐었다. 이듬해에는 변장호 감독의 영화 '보통여자'로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
어린 시절 재능을 보였던 성우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1974년에는 MBC 라디오 드라마 '사랑의 계절'이라는 프로그램으로 한국방송대상 성우상을 수상했다.
1978년은 단연 김자옥의 해였다. 주연작인 영화 'O양의 아파트', '영아의 고백', '지붕위의 남자', '상처' 등이 연달아 흥행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 해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열린 아시아 영화제에서 우수배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자옥은 명실상부 한국의 70년대를 대표하는 여배우였다.
16일 오후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배우 故 김자옥 빈소가 마련됐다. 2008년 대장암 수술을 받았고 최근 암이 재발해 항암 치료를 해왔으나 14일 저녁 병세가 급속히 악화 돼 중환자실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왔다. (사진공동취재단 제공)
◈ 이혼과 재혼, 그리고 2년의 공백…'소녀'이고 싶었던 배우빛나는 70년대를 뒤로 하고, 김자옥은 혼란한 80년대를 맞는다.
그는 1980년 가수 최백호와 결혼해 연예계를 은퇴했지만 1982년 KBS 드라마 '사랑의 조건'으로 브라운관에 복귀한다.
그러다 결국 1983년 성격 차이로 최백호와 이혼해 3년의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다시 찾아온 사랑은 김자옥에게 새로운 안식처를 줬다. 김자옥은 1년 후인 1984년 그룹 '금과 은'의 보컬리스트였던 가수 오승근과 재혼해 지금까지 금슬좋은 부부로 지내왔다.
제 2의 전성기는 연기가 아닌 노래에서 시작됐다. 김자옥이 1996년에 발표한 곡 '공주는 외로워'가 약 60만 장의 앨범 판매량을 기록하며 신드롬을 일으킨 것. 이를 통해, 김자옥은 비련의 여인 이미지를 벗고 유쾌한 '공주님'으로 변신했다.
짧은 가수 활동은 그의 우울증 극복에도 도움을 줬다.
90년대와 2000년대에도 김자옥의 연기 열정은 뜨거웠다. 2008년 대장암 판정을 받았지만, 그는 항암치료를 받으며 연기를 병행했다.
김자옥은 한 해에 적어도 한 작품, 많게는 두 세 작품씩 배역을 맡아 출연했다. 때로는 따뜻한 엄마로, 때로는 공주같은 노처녀로 분해 브라운관을 누볐다.
예능프로그램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나영석 PD와 함께 한 '꽃보다 누나'에서 '만년소녀' 캐릭터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꽃보다 누나'는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세 번 결혼하는 여자',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과 함께 그의 유작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