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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영웅’ 백선엽6·25전쟁 당시 제1사단장, 제2군단장, 육군참모총장을 지내고 한국군 최초의 대장이 된 ‘전쟁 영웅’.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 제1사단장으로서 1950년 낙동강 방어선의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한국군은 물론 미군에게도 존경받는 ‘살아있는 전설'.
그 무엇보다 미군보다 한 발 앞서 1950년 10월 19일 ‘평양 최초 입성’에 성공한 대한민국 국군의 영원한 자존심.
백선엽 장군(92)에게 쏟아지고 있는 찬사들이다.
2003년 10월 9일 국방일보에 실린 「한미군 선의의 ‘입성’ 경쟁」은 이렇게 시작한다.
“1950년10월 19일.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국군 제1사단이 유엔군 중에서 최초로 평양에 입성했다.”
국방일보는 2009년 10월 12일 「금주의 전투사」 ‘<40> 평양탈환작전 : 국군 1사단, 미군보다 한 발 앞서 평양 입성’ (김광수 육군사관학교 전쟁사교수)에서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6·25전쟁 동안 대한민국 국군이 만끽한 승리의 순간 중 지워지지 않을 장면 중의 하나는 1950년 10월 19일 1사단이 미군보다 한 발 앞서 평양 탈환의 선봉부대가 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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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 장군 스스로도 2009년 출간한 자서전 「군인과 나」 ‘평양 입성, 생애 최고의 날’에서
“일개 월남한 청년이 장군이 되어 1만 5,000여 한·미 장병을 지휘하여 고향을 탈환하러 진군하는 감회를 어찌 필설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122쪽)고 밝혔다.
중앙일보에 2010년 1월부터 1년 2개월 동안 「내가 겪은 6·25와 대한민국」을 연재한 백선엽 장군은 ‘[6·25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1) 대동강의 푸른 물결’(2010년 4월 28일)에서도 이렇게 회고했다.
“미 1기병사단과 합류할 지점은 대동교 입구 선교리의 로터리였다. 그곳에 선착하면 평양 입성의 경주에서 우리가 승리하는 것이었다. 우리 부대가 그곳에 도착한 때는 오전 11시쯤이었다. 미군들은 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가 이긴 것이다.”◈ 칠성전우회 “7사단이 평양 최초 입성”1950년 창설된 7사단 출신들의 모임인 칠성부대 전우회. 칠성전우회가 자신들의 활약상을 담아 만든 동영상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우리 칠성부대는 … 특히 평양지구 전투에서는 1950년 10월 18일 연합작전부대 중 최선두로 평양에 입성하여 김일성대학에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한국전사에 길이 빛날 쾌거를 남기기도 하였습니다.”6·25전쟁 당시 7사단 8연대 3대대 9중대장이었던 김호규 씨도 2010년 2월 16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1사단 15연대는 19일 오전에 들어왔고, 7사단이 하루 전날인 18일 저녁 무렵에 먼저 평양 김일성대학을 점령해 들어갔다. … 지금도 우리는 18일에 행사를 하는데 1사단은 19일에 하고 있다.”
“1사단 전투지역이기는 했지만 당시 1사단은 도하작전을 못하고 있었다. 도하작전에 성공한 부대가 어디냐? 7사단 8연대다. 그러면 7사단 8연대가 평양을 공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7사단 8연대 중에서도 3대대가 제일 먼저 (대동강을) 건너서 강동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특명이 내려져서 다시 돌아서 평양으로 들어갔다. … 다음날인 19일 오전에 1사단이 서남방쪽에서 동평양으로 올라왔다.”실제로 지난 10월 18일 강원도 화천공설운동장에서는 원홍규 제7사단장 주관으로 김호규 씨 등 6·25 참전용사 42명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 최초 입성’ 62주년 기념식이 신병수료식과 함께 열렸다.
◈ 공식적인 역사 기록과 엇갈린 증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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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공식적인 역사 기록은 여전히 ‘평양 최초 입성’의 공을 7사단이 아닌 백선엽 장군이 이끈 1사단으로 돌리고 있다.
국방군사연구소가 1995년 발간한 「한국전쟁(상)」 ‘평양 입성’(531~540쪽)에는 이렇게 기술돼 있다.
“이로써 국군 제1사단은 제11연대와 제12연대를 동평양에, 그리고 제15연대가 본평양을 점령함으로써 평양 탈환 주역의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2005년 육군사관학교가 편찬한 「한국전쟁사 부도(수정판)」 104쪽 ‘평양 입성’에도
“10. 19 오전 (제1)사단 선봉인 제15연대는 율리에서 주력과 떨어져 더욱 깊숙이 북상하여 대동강 상류에서 도하한 후 모란봉을 동북쪽으로부터 공격하여 14:00경에 이르기까지 평양시내의 주요 건물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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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의 '평양 입성' 당시 제2군단장을 지낸 유재흥 장군이 1975년 6월 25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 ‘6·25를 회상한다’에서
“공식적으로 인정은 받지 못하고 있지만 역시 평양에 제일 먼저 도착한 부대는 제2군단에 배치된 7사단의 8연대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지만, '역사적 기록'를 바꾸지는 못했다.
국군을 총지휘했던 정일권 육해공총사령관도 동아일보에 연재한 「비화 6·25 회고록」 ‘<44> 평양 입성 한미군 선두 다툼’(1985년 7월 24일)에서 칠성전우회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몇 가지 의미 있는 증언을 했다.
국군 제1사단이 미군 제1기병사단보다 조금 뒤쳐져 있다는 소문을 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반드시 우리 국군이 평양에 먼저 입성해야 한다’는 특명을 내렸고, 곧바로 최전선 제7사단 전방지휘소를 직접 방문해 김용주 제8연대장으로부터 ‘이틀 후면 평양 입성이 가능할 것 같다’는 보고를 받고 진격 명령을 내렸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정 전 총사령관 또한 이어지는 증언(1985년 7월 25일. <45> “김일성을 생포하라”)에서는 국군의 평양 입성을 제1사단과 제7사단 모두의 공으로 돌렸다.
“(10월 19일) 오전 11시 제1사단 주력이 동평양에 돌입했고, 거의 같은 시각에 제7사단의 제8연대도 김일성대학과 모란봉을 거쳐 평양 서북쪽으로 진입했다. 우리의 간절한 기대는 헛되지 않았다. 우리 국군의 제1사단과 제7사단이 동평양과 서평양을 선두 탈환한 것이다.”◈ ‘평양 최초 입성’의 진실은?
이런 가운데 국방부가 가장 최근에 작성한 기록물에서 ‘평양 최초 입성’ 부대가 백선엽 부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나와 눈길을 끌었다.
국방부 6·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단 블로그 「생생! 6·25」의 ‘유엔군 반격 / 북진 / 37. 적의 심장부를 향한 경쟁’ 편(2010년 4월 23일)은 ‘평양 최초 입성’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국군은 도섭지점을 찾아 급속도하를 감행하여 미군보다 하루 빠른 19일 밤, 제15연대가 드디어 본평양에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국군 제1사단은 제12연대가 동평양에, 15연대가 본평양을 제일 먼저 점령하는 영광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런데 평양 최초 입성과 관련하여 국군 제7사단 8연대가 먼저 평양에 진입했다는 주장도 있어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합니다.”‘평양 최초 입성’의 주인공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는 점을 국방부가 처음으로 공식 인정하고 나온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로도 여전히 6·25전쟁사의 가장 핵심부분 중 하나인 ‘평양 최초 입성’ 기록이 ‘의견이 분분한' 채로 계속 방치돼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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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참전용사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나고 있는 상황에서, 국방부의 이 같은 어정쩡한 태도로 인해, ‘평양 최초 입성’이라는 역사적인 순간이 자칫 영원한 논란거리로 남겨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국방부는 지금이라도 보다 정확한 사실 확인 등을 통해 ‘평양 최초 입성’의 진실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대한민국 국군의 ‘평양 입성’은 6·25 참전용사 모두의 공훈이며, ‘전쟁 영웅 백선엽’도 올바른 역사 기록의 바탕 위에서만 빛을 발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