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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하고 귀엽게 생긴 하얀 곰 ‘산타베어’. 미국에서 22년 동안 4백만 개나 팔리며, 큰 사랑을 받았던 곰인형인데요. 산타베어는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부부가 연말 행사에 들고 입장하기도 했고, TV 뉴스에서 앵커들 사이에 놓여 있을 정도로 미국에서 화제가 됐던 인형입니다.
그런데 이 곰인형을 만든 주인공은 미국인이 아닌 한국인 ‘양지실업 정석주 회장’인데요. 양지실업은 1977년 자본금 1천만 원으로 시작해, 30년 동안 흑자 경영을 이루며 세계 15개국에 봉제완구를 수출했던 건실한 중소기업입니다. 화초를 키우 듯 지극한 정성으로 기업을 경영했다는 정석주 회장.그는 오랜 고민 끝에 30년 만에 종업을 결정했다는데요.
봉제인형으로 30년 동안 흑자 경영을 이룬 양지실업의 창업과 종업까지의 이야기. 정석주 회장을 2월 22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1천만 원으로 시작한 ‘30년 무차입 흑자경영’
▶ 양지실업은 국내보다 해외에 더욱 많이 알려진 것 같은데요, 회사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1977년에 창업을 했는데 근로자 450여명과 함께 연간 매출액 2천만 달러~3천만 달러의 흑자경영을 30년 동안 해왔어요. 창업 초기 3년 동안 어려움이 많았죠. 초기의 어려움을 겪고 나서 나중에야 공장 건평이 1650평 정도로 늘어났지만 처음에는 140평에 1천만 원으로 시작을 했거든요. 140평을 월세로 얻어서 종업원 95명으로 출발을 했어요. 당시에 중견직원들 월급이 10만원~15만원이었고 박정희 정권 때 수출목표가 100억 달러일 때였어요. 현재 우리나라 연간 수출액이 3천억 달러니까 정말 옛날이야기죠.
▶ 그 당시에는 수출역꾼을 한참 부르짖을 때잖아요?
조국 근대화의 기수가 되자! 우리 후세한테 가난을 물려주지 말자! 우리도 잘 살 수 있다! 등등 새마을 운동과 더불어 온 국민이 단합된 모습을 보일 때였어요. 그때는 다른 동남아권에서 공산품을 생산하지 않을 때라 대만과 한국이 경쟁력 측면에서 우위에 있었어요. 그리고 정부의 정책도 수출에 드라이브를 걸 때라서 타이밍도 아주 좋았고 오늘날 이런 위치에 설 수 있었던 스타트 시기였다고 봐요.
▶ 최소 법정 자본금도 안 되는 돈으로 사업을 시작하셨어요?
사업을 하게 되면 고생 줄에 들어가는 거잖아요. 제가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은행이든 국영기업이든 어디든 일체 시험을 치르지 않았어요. 나이 먹고 나서 생각해보니까 그때 얼마나 순진하고 어리석었는지 몰라요. 은행이나 정부투자기관에 취직을 하면 봉급에 안주하게 될 것이고 또 목표를 상실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거예요.
또 학교에서 교수님은 기업을 해야 한다, 특히 제조업을 해야 한다고 강조를 하니까 어린 나이에 거기에 동화가 돼서 취직시험을 안 치렀어요. 그래서 저도 힘들었지만 아내와 아이들이 초창기에 참 힘들었어요. 전부 반대했죠.
▶ 양지실업을 창업하시기 전에 어떤 일을 하셨나요?
섬유계통의 중견기업에서 7년 정도 실무를 익혔어요. 그러고 나서 제 비즈니스를 위해서 3년 정도 트레이닝을 또 받았어요. 제가 섬유과는 아니지만 섬유에 대해서 많이 배웠고 또 수입수출의 업무를 담당했기 때문에 그것도 많이 배울 수 있었어요. 여기에서 배운 것들이 양지실업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좋은 계기였고 한 번의 실패와 포기하지 않는 의지가 있었기에 30년 동안 흑자경영을 할 수 있었던 정신적인 배경이 된 것 같아요.
◇ 실패 속에서 얻은 산타베어의 신화▶ 첫 사업은 어떤 일을 하셨어요?
30대 초반이었는데 인쇄 계통에서 일을 하면서 사업은 잘 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가 산업사회 초창기에 접어들 때라 회사에 부도가 많이 났었어요. 저는 인쇄업을 크게 했는데 어음을 준 회사들이 부도를 맞으니까 지탱하기가 어렵더라고요. 계산을 해보니까 젊은 나이에 잘못하면 이거 큰일 나겠어요. 어느 정도 상당한 궤도에 올려놨었기 때문에 신용을 잃으면 안 되겠어요.
원래는 인쇄업을 정리하고 수출업으로 전환하려고 하던 즈음에 문제가 생겼던 거라서 다시 몇 년 직장생활을 해야 했어요. 그런 과정에서 나의 장점과 단점을 파악하고 세상을 너무 경시한 것 아닌가 하는 반성을 많이 했어요. 그러면서 재충전할 수 있는 시간을 번 거죠. 그 후에 다시 시작을 하려고 하니까 가족들이 반대를 하더라고요. 결국 반대를 무릅쓰고 했지만요.
▶ 70년대만 해도 수출품목으로 가발, 섬유, 신발 등이 주종을 이루었는데 양지실업에서는 산타베어라는 곰인형을 만드신 거로군요?
산타베어를 생산한 것은 1986년부터였어요. 산타베어가 우리 회사 매출의 30%를 차지하는데 워낙 산타베어가 유명하니까 양지실업에서는 이것만 생산하는 걸로 알아요. 한 가지 종목만 하면 큰일 나죠. 위험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시장을 다변화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강아지, 곰 등 아이템 자체만 해도 300여 가지나 돼요. 우리 회사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대개 수출은 두 가지 스타일이 있어요. OEM(주문자상표부착)과 자체개발 수출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세일즈나 시장개척, 자체개발이 어려우니까 대부분 OEM 방식으로 많이들 합니다.
저는 조그만 회사지만 6개월 정도 오더를 받을 때까지만 OEM 방식을 한다고 정책적으로 결정했어요. 왜냐하면 직원들 월급은 줘야 하잖아요. 그러면서 한쪽에서는 집중적으로 완구를 개발했는데 이 완구개발이라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그 나라의 문화수준이 맞아야 하니까요. 당시에 디자인 수준은 굉장히 열악한 상태였고 OEM 방식으로 하면 밥이나 먹고 끝나는 거지 내 스타일의 경영을 할 수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자체적으로 개발을 시작한 거예요.
▶ 안정적인 직업을 택하실 수도 있었는데 굳이 사업가를 하시게 된 이유는 뭔가요?
처음부터 연세대를 가려고 한 게 아니었어요. 가정환경이 어려워서 조건부로 연세대를 갔거든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교수님이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중에 제조업을 하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그래야 학교에서 배운 경영마인드를 투사해서 회사를 운영해 볼 수 있고 또 그것이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이냐, 경영학도로서 그런 것들을 많이 강조하셨어요. 어린 나이에 돈도 없으면서 한 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사실 제가 공부를 좀 했는데 당시 시중은행에서 1년에 25명 정도밖에 뽑지 않을 때라 각 대학에서는 자기 학교에서 몇 명이 은행에 들어갔느냐가 중요한 기준이었어요. 그래서 한국은행을 가라, 산업은행을 가라, 일반 시중은행을 가라, 그러면서 시험이라도 치라고 그랬는데 저는 아예 시험을 치지 않았어요. 어리석은 모험을 한 거예요.
▶ 고향은 어디세요?
고향이 이북이에요. 함경남도와 강원도 접경에 석왕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저희 집이 지주계급이라고 해서 8.15 해방 다음 날 추방을 당했어요. 재산을 팔아서 온 게 아니고 알몸으로 온 터라 서울에 와서 고생 많이 했어요. 부친이 일이라는 걸 평생 안 해보신 분이었거든요. 제가 중간에 탈선을 안 하고 정도를 걸어왔다는 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거라고 생각해요.
◇ 자재 값보다 쌀값 못 갚을 때 마음 졸여▶ 초창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다고요?
당시에 대부분의 회사들이 외국 바이어의 하청을 받아서 OEM 방식으로 수출을 했어요. 하지만 저는 자체적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1년 동안 OEM 방식으로 하고 그 다음에는 자체주문으로 생산을 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샘플을 만들어서 세일한 기간이 1년 걸린 셈이에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소규모라도 자체 생산능력과 세일즈 능력을 갖추었으니까요.
다행히 그동안 사회생활을 하면서 인심을 잃지 않았나 봐요. 원부자재 공급업체들이 무상으로 많이 지원을 해줬어요. 그분들에게 신세를 2년 동안 졌어요. 1천만 원 가지고 시작할 때인데 오더를 20만 달러를 받았어요. 그거 끝난 다음에 바로 40만 달러를 받아서 일단 숨을 돌리게 되었죠.
처음에는 조그맣게 기숙사를 해서 쌀과 부식을 외상으로 먹었어요. 자재 값을 못 갚을 때는 괜찮았지만 쌀과 부식비를 못 갚을 때는 내가 왜 이 일을 시작해서 작아져야 하는지, 근로자들이 알면 큰일이다 싶었어요. 나에 대한 존경심이 생기겠어요? 당시에 저한테는 근로자들의 단합된 힘과 저에 대한 리더십이 큰 무기였는데 외상값을 못 갚았다고 소문이 나면 저를 믿고 따라오겠느냐고요? 그때 오더를 받아서 근로자들 환경을 개선하는데 많은 투자를 했어요.
▶ 그럴 때 산타베어가 효자노릇을 하게 된 건가요?
1985년에 성장하는 과정에서 역할을 해줬어요. 착실하게 창업해서 발전해 나온 거예요. 처음에 발전 템포를 늦췄어요. 사람이란 게 뭔가가 되기 시작하면 욕심이 커져가거든요. 창업정신을 그대로 유지해서 절대로 무리를 하지 말자는 각오로 3년 걸릴 걸 5년에 한다는 생각을 가졌어요. 그래서 30년 동안 빚이 없잖아요. 물론 빌릴 데도 없었지만 친구도 없는 사람한테는 빌려주지를 않아요. 창업한지 4년 만에 1천만 원으로 시작해서 7억 5천만 원짜리 공장을 현금으로 샀어요. 은행융자 10원도 받지를 않았죠.
▶ 무차입 경영이 가능하셨나요?
빚이 10원도 없었는데 반드시 무차입 경영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플랜트 사업 같은 대형사업은 자본도 많이 들고 창업기간도 5년 정도로 걸리는 기간도 길어요. 그럴 때는 차관도 해서 당연히 해야죠. 이자부담이 되더라도 이익이 더 많으면 빚을 얻어다가 사용해야겠지만 저희 같은 노동집약적인 중소기업은 일단 빚이 없는 게 좋죠.
그런데 저는 빚을 안 쓰겠다고 한 게 아니라 안 줬으니까 못 쓴 거예요. 또 빚은 안 얻어도 될 수 있게끔 회사 재무구조가 좋아졌어요. 하지만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성급하게 투자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운영하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예상보다 2년이 더 걸렸어요.
▶ 산타베어가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앵커들이 애지중지하는 캐릭터였다면서요?
1985년도 가을이었는데 바이어가 와서는 중요한 이야기가 있대요. 시간이 보름도 안 남았는데 40만 개를 사가야 되겠다는 거예요. 할 수 있겠느냐고 하는데 크리스마스용도 선적이 쌓여서 스케줄이 아주 빡빡해서 못 하겠더라고요. 그렇다고 일부러 미국에서 이것 때문에 왔는데 못하겠다고 하면 바이어를 놓치는 거잖아요. 결국 그 수량을 적기에 선적했어요. 그래서 산타베어가 12월 초에 미국에 도착했어요. 판매기간이 보름 정도인데 다 팔려서 품절이 되었어요.
그 다음 해에 170만개를 오더를 내리더라고요. 40만 개는 테스트로 판 거고 본격적인 세일즈 프로모션은 다음 해에 하게 되었던 거죠. 크리스마스에 백악관에서 영부인이 주관을 해서 각 주의 어린이들을 초청해서 잔치를 해요. 그럴 때 미국의 각 백화점에서 완구들을 엄청나게 보내면 퍼스트레이디인 낸시 레이건이 올해의 완구를 선정해요.
저희가 거래하는 백화점들도 보냈을 거 아니겠어요. 그 해에 산타베어를 선정한 거예요. 산타베어를 바구니에 담아서 파티장으로 들어가는 사진이 찍힌 거죠. 다음해도 그 다음해도 다른 아이템으로 계속 선정이 되니까 낸시 레이건이 백화점에 전화를 했어요. 직접 생산하는 건 아닐 테니 주문을 넣은 곳이 어디냐고 물어서 산타베어와 함께 찍은 사진과 편지를 저에게 보내왔어요.
그리고 매스컴 프라임타임의 앵커들의 테이블 위에 산타베어가 올라간 이유는 170만개가 다 팔리고 나서 방송에서 난리가 났어요. 그걸로 끝일 줄 알았는데 이 아이템을 살리자고 해서 이번에는 옷을 바꾸어 입히는 거예요. 소방관, 우주복, 영국 근위병 모자 등 다양하게 살려서 22년 간 계속할 수 있었어요. 회사 문 닫는 데까지 한 거죠.
◇ 사람에게는 인격, 곰인형에게는 웅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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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에게 인격이 있다면 곰인형에게는 웅격이 있다고요?
모든 공산품은 살아있는 게 없죠. 그렇다고 봉제완구가 살아있는 거냐고 묻고 싶으실 거예요. 그런데 봉제완구는 살아있는 걸로 생각하고 만들어야 해요. 왜냐하면 이건 아이들이 갖고 노는 거기 때문에 놀면서 마음의 대화를 합니다. 따라서 완구를 만들 때 디자이너는 살아있는 완구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동물로서의 인격을 갖추어야 한다, 심지어 디자이너의 영혼이 들어가야 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해요. 완구의 눈빛을 보면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요. 내가 슬플 때 완구를 보면 나를 위로하는 것 같고 내가 즐거울 때는 완구도 같이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여요. 그냥 막 만들어내는 게 아니에요.
▶ 그래서 ‘인형을 입양시킨다’는 말씀도 하셨군요?
우리는 생명이 없는 죽은 공산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생명이 있는 걸 만드는 거다, 전부 우리의 자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소비자들에게 팔 때는 우리의 자식을 입양시키는 정신으로 팔아야 한다, 물건이 도착했을 때 하자가 있으면 안 되고 소비자가 계속 갖고 놀 수 있게 될 때 영구적인 식구로서 등재가 된다는 정신으로 품질관리를 해야 한다는 거죠.
▶ 공장에 화재도 났었다고요?
안전관리를 소홀히 해서 그런 게 아니냐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지만 봉제완구는 자재가 전부 털이고 솜이다 보니까 인화성이 강합니다. 물론 원단은 가공처리를 해서 불이 붙지 않도록 처리를 합니다. 애들이 갖고 놀다가 문제가 생길 수 있거든요. 전기안전 점검을 하던 도중 안전원의 실수로 생긴 일인데 초기에 발견해서 크게 번지지는 않았어요.
▶ 이제는 쉬고 싶으실 것 같아요.
제 친구들이 돈을 그만큼 많이 벌었으면서 애타게 일을 하느냐고 그래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돈을 보고서 일을 했으면 그렇게 일을 못했을 거예요. 벌써 80년대 중반에 끝냈겠죠. 하지만 중소기업계에 길이 남을 수 있는 모범적인 기업을 하나 만든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일을 했어요.
▶ 중소기업 CEO에게 잡초가 되라는 말씀도 하셨어요.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풀이면 풀인 거지 잡초라는 구분이 없어요. 만약 잡초가 있어서 말을 할 수 있다면 인간들 참 웃기다고 할 거예요. 자기들 중심으로 해석한다고 억울하다고 할지도 몰라요. 장미나 백합은 화려하지만 오래 가지 못해요. 잡초에서 핀 꽃은 보이지 않지만 아름답고 오래 간다고 책에도 써놨는데요.
학술적으로 말하는 중소기업의 의미와 중소기업인의 개념을 버려야 해요. 사농공상이라고 해서 기업인에 대해서 천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걸 불평하지 마라, 남한테 봐달라고 하지 말고 일을 끝까지 열심히 해라,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고객이 얼마나 선호하느냐 아니냐에 달려있기 때문에 그 외에는 신경 쓸 것 없다는 거죠. ◇ 자선과 봉사로 남은 인생 찾고 싶어
▶ 회사 일에만 열중하시다 보면 사모님께서 불만이 있으실 것 같은데요.
제가 태어나서 극장을 3번 가봤어요. 10년에 1번씩 간 셈인데 그것도 집사람 강요에 못 이겨서 갔었죠. 시간을 내려면 낼 수도 있는데 모든 것을 회사에 몰입하다 보니까 우선 정신적으로 피곤하고 가고 싶은 의욕이 안 생기더라고요. 차를 타면 회사 일을 생각했는데 아마 그때 운전을 할 줄 알았다면 노상 사고를 냈을 거예요.
그래서 집사람에게 나 때문에 희생하지 말라고 했어요. 이건 내가 자초한 일이니까 당신은 극장에 가든지 외국여행을 가든지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했죠. 저는 30년 동안 회사업무로 출장을 가도 골프 한 번 쳐보지 않았어요. 예전에 이북에 갔을 때의 일인데 이북에 가족이 있느냐고 하기에 형제가 있다고 했더니 만나겠느냐고 하더라고요. 얼마나 보고 싶었겠어요? 하지만 고맙다고 말하고 사양했어요. 지금은 공무로 왔으니까 나중에 합작투자로 오게 되면 그때 협조해 달라고 하고 사양한 적이 있어요.
▶ 창업은 많이 들어봤어도 종업은 생소한데요.
종업하는 과정에서도 잘 정리를 했어요. 직원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했는데 그 과정에서 돈이 많이 들어갔어요. 퇴직금 이외에 3개월이나 혹은 6개월 정도의 월급을 더 주기도 하잖아요. 물론 이런 것도 잘 해야 하지만 저는 월급을 주면서 직장을 얻을 때까지 기간을 1년 동안 준 적이 있어요. 직장을 못 얻었다고 하면 더 알아보라고 해서 1년 동안 월급을 줬어요.
그래서 그만둔 직원들이 불평이 하나도 없어요. 저 역시도 열심히 일을 했지만 직원들이 번 돈이거든요. 간혹 말로는 그렇게 하면서도 행동을 하지 않는 오너들이 많아서 문제지만요. 저는 유종의 미를 잘 거뒀어요.
▶ 인생은 짧고 남은 시간 동안은 자신의 인생을 찾고 싶다고 하셨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한창 창업 때는 아내가 친정에 가서 1년 정도 있다가 왔으면, 그렇게까지 생각했어요. 피곤하고 지쳐서 집에 들어가면 겨우 발만 씻고 자니까 아내 보기에 미안해요. 차라리 아내가 친정에 가 있으면 나도 덜 미안하고 회사에 열심히 일할 텐데, 그럴 정도로 열심히 일을 했어요. 통행금지가 12시인데 남부순환도로가 생겨서 구로동 쪽으로 오면 차가 없었어요.
그러면 예술의 전당 세우기 전이라서 길에 걸터앉아요. 밤 11시 20분 정도 되는 시간이면 차도 별로 없으니까 턱에 기대앉아서 담배 한대 태우는 거예요. 우면산에서 들려오는 벌레소리가 오케스트라처럼 들리죠. 중소기업 CEO는 정말 외로워요. 그런 노력에 대해서 아내도 동조를 안 해줘요.
▶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저의 능력 범위 내에서 봉사를 하려고 합니다. 그동안 대학생들에게 한 사람씩 학비를 지원해서 졸업시키고 또 장학금도 기부했어요. 적십자나 여러 단체들에게 저희 제품도 수천만 원씩 보내주기도 하고 봉사도 했는데 지금은 다른 각도로 정말로 불우한 아동들에게 피부에 닿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리고 경영대학원에서 강의를 하게 될 것 같은데 건강이 허락되는 한 좋은 일을 하면서 마무리를 하려고 합니다.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박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