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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미령 "전유성 씨는 '기인'이 아니라 '자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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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0-18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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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똑소리 나는 팔방미인, 가수 진미령

1975년에 데뷔해 신인 가수상까지 받았던, 33년차 가수입니다. 하지만, 노래하는 모습보다 요리하는 모습이 어쩐지 더 익숙하게 느껴지는 사람입니다.

워낙 손 맛 좋기로 유명해서 각종 잡지나 방송을 통해 요리솜씨를 뽐냈고, 자신의 이름을 걸고 홈쇼핑을 통해 꽃게장을 판매하기도 했기 때문인데요. 바로 똑 소리 나는 팔방미인 진미령 씨입니다.

무엇을 하든 ‘제대로! 확실히! 완벽히!’ 하는 여자, 진미령…. 그녀가 3년 만에 다시 음반을 들고 무대 위를 올랐습니다.

어쩌다 보니 우연한 기회에 가수가 되어버린 사람, 하지만 가수이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 세상 사람의 시선에서 조금쯤 비켜나 자유롭게 사랑하며 사는 사람! 매력적인 가수 진미령 씨, 그녀의 똑 소리 나는 인생 얘기를10월 17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봤습니다.

◇ 방송 데뷔 35년, 팔방미인의 비결은 꾸준한 체력 관리

 

▶ 나이를 잊으신 것 같아요. 10년 전과 체중이 같다고요?

계속 관리하는 거죠. 운동은 제가 헬스를 시작한지 8년이 넘었거든요. 그래서 꾸준하게 한 결과로 킬리만자로도 갔다 온 것 같아요. 그 산에 갔단 온 것도 하루 이틀 해서 된 게 아니고 8년 전부터 꾸준하게 했기 때문이에요.보통 운동을 하면 러닝머신을 하는데 저는 러닝머신 운동을 하면 종아리에 툭 불거져 나와요. 그래서 트레이너한테 이건 못하겠다고 했더니 그런 사람이 가끔 있다고 스텝퍼를 하라고 그래요. 그걸 꾸준히 해서 산도 그 다리 힘으로 갔다 온 것 같고 또 힙 선과 다리 선이 예뻐진 것 같아요.

▶ 방송 데뷔가 75년도니까, 35년째 되셨더라고요. 그동안 가수로, 사업가로, 요리 프로그램 진행자로, 연기자로, 책 저자로 정말 열심히 사셨어요.지난 7월 새 앨범 ‘홀로이’를 내고 본업인 가수로 돌아오셨어요. 가수로서 그동안 공백기가 있었나요?

공백기가 없었는데 다들 그런 느낌을 받으셨나 봐요. ‘내가 난생 처음 여자가 되던 날’을 내놓고 나서 이번에 3년 만에 ‘홀로이’가 나온 거예요. 그렇지만 내가 난생 처음 여자가 되던 날로 꾸준히 방송활동은 했거든요. 무대에 계속 올랐는데, 표현들을 3년 만에 무대에 다시 올랐다고 하니까 조금 쑥스럽기도 하고, 무대에 자주 올랐는데 왜 그러지? 만약 그렇게 느낀다면 내가 다른 가수보다는 조금 소홀했나 보다, 라는 생각은 들었죠.

▶ 가수들이 1년에 한 번씩 앨범을 내나요?

부지런히 내는 사람들이 1년은 아니고 2,3년마다 내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트로트라는 노래가 PR을 하다 보니까 제가 회사에 소속되지 않은 독립군이잖아요. 사실 트로트는 3,4년을 PR을 해요. 그래야만이 많은 사람들의 귀에 응, 그래~하고 아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신인가수나 선배들인 송대관, 태진아 같은 분들은 1년에 2번도 내시는데 보통 트로트 하시는 분들 보면 3,4년은 민다고 그래요.

그런데 판 내는 게 보통 작은 돈이 아니에요. 이 홀로이 앨범도 꽤 많이 들었어요. 앨범 내는 데만 5천만 원이고 PR까지 하면 1억 정도 들죠.제가 미국에서 돌아와서 1990년도에 ‘아하’라는 노래로 제 데뷔를 했거든요. 그때 ‘아하’ ‘여자 나이 서른’ ‘남자의 꿈’ ‘낯익은 모습’ ‘내가 난생 처음 여자가 되던 날’ 이후에 나온 거니까 6번째 앨범이네요.

▶ 가수, 사업가, 요리 프로그램 진행자, 연기자, 이 중에서 진짜 본 보습은 뭔가요?

노래 부르는 자리에 가서는 가수이고 요리하는 자리에 가서는 요리하고, 판을 내려고 하면 돈이 있어야 하잖아요. 꽃게 팔아서 판 만들고.(웃음) 그런데 제가 가수이기 때문에 가수라는 걸 지워본 적이 한 번도 없거든요. 언제든 좋은 노래가 있으면 만들어야내야 하는 게 제가 할 일 같아요.

▶ 앨범 컨셉이 ‘섹시’에요.

그런 의도로 한 건 아니에요. 물론 언제 찍은 사진이냐고 다들 물어보시는데 지난 6월에 찍었으니까 4개월 됐죠. 녹음하면서 찍었어요.

◇ ‘2주 만에 판이 나와’ 눈 뜨고 나니까 가수가 됐어

▶ 가수로 데뷔하게 된 과정이 재미있어요. 어쩌다 보니 그냥 데뷔하게 되었다고 하던데요?

제가 화교학교를 나왔잖아요. 고등학교를 화교학교로 졸업하면 한국에 아직 화교대학교는 없어요. 그래서 한국 대학교를 가는 화교생들에게는 고려대, 성균관대 등 몇몇 대학교의 교환학생으로 들어가는 거죠. 그런데 저는 한국 대학교를 가기 위해서 화교학교를 간 게 아니에요. 기왕 중국공부를 했으니까 중국공부를 마쳐야 하는데 대만으로 유학을 갈 사람들은 대만대학교에 보내요.

거기 입학식이 9월 1일이에요. 우리는 3월인데 외국은 9월이거든요. 그래서 졸업을 3월에 하고 8월 25일까지 대만대학교의 기숙사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 사이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놀 수는 없잖아요. 게다가 노래하는 걸 좋아했어요. 옛날에 시민회관 소극장에서 어린이합창단을 뽑았을 때 혜화동에서 중앙청까지 전철이 없으니까 버스로 혼자 가서 오디션을 봤어요. 그래서 어린이 시민합창단에 가입을 했어요.

그랬는데 엄마가 8월까지 빈둥거리는 것도 그렇고 뭘 하다가 갈 거냐고 물으세요. 저도 고민하다가 엄마 친구 분이 ‘카추샤의 노래’를 작곡하신 이인권 씨 부인이셨어요. 우리 딸이 8월에 가는데 그때까지 몇 달 동안 놀게 할 수는 없고 노래한다고 하니까 너희 남편한테 보내서 노래 연습 좀 시킬까? 그렇게 된 거예요.

그래서 갔어요. 갔더니 내가 지금 나이가 몇 살이고 네가 몇 살인데 나 같은 사람한테 노래 연습하면 안 된다고 2,3달이라도 젊은 작곡가한테 연습을 해야지, 그렇게 소개를 해 주신 분이 장욱조 씨였어요. 그때 장욱조 씨가 오아시스 레코드사에 소속되어 있었어요. 이인권 선생님이 저를 데리고 장욱조 선생님한테 가셔서 부인 친구 딸인데 곧 대만 간다고, 매일 오게 해서 소일거리라도 시키라고 가수 할 애는 아니라고 해서 매일 다녔어요.

할 줄 아는 노래가 뭐냐고 해서 포크 송으로 된 팝송을 매일 피아노 연주에 맞춰서 1,2시간씩 연습하는 거예요. 그러고 끝나면 안녕히 계세요, 인사하고 집에 갔죠.그러던 차에 얼마 안 돼서 우리나라 최고의 매니저인 ‘타미’라는 사람이 오아시스 레코드사에 왔어요. 정훈희, 장미화, 이현 등 굵직한 가수들은 다 매니저를 하고 계셨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신인가수를 찾는 거예요. 그때 유명한 가수들이 대마초에 연루돼서 방송이 중지가 되었던 거죠. 그래서 신인을 찾으러 나선 건데 타미 아저씨의 말에 의하면 조그맣고 새카맣게 생긴 애가 팝송을 하더래요. 그래서 죽 지켜보다가 오아시스 손 사장님한테 올라가서 밑에서 노래하는 애는 누구냐? 하니까 손 사장님이 이인권 씨가 소개를 한 아이인데 곧 대만 갈 애라고, 왔다 갔다 노래나 하라고 데려다 놓은 아이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손 사장, 내가 지금 신인을 찾고 있는데 쟤를 붙잡고 판을 부탁한다면 며칠 만에 판을 낼 수 있소?” 이렇게 딜을 했대요.“타미 씨가 한다면 2주 만에 판을 내주리다.” 그러고 내려와서 장욱조 씨하고 얘기하는데 그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나는 사실 가수가 꿈이라고는 생각 안 해 봤거든요. 어렸을 때 노래하라고 하면 솔 들고 노래는 잘 했어도 가수가 돼야지, 하는 생각은 안 해 봤어요. 원래는 외교관이 되고 싶어서 정치외교를 공부하려고 했죠. 그래서 장욱조 씨가 엄마한테 전화를 하셨어요. 이러이러해서 이런 사람이 한다는데 맡겨보시겠느냐고, 2,3달 만에 올려놓지 못하거나 본인이 못하겠다면 대만 가게하고 어쨌든 8월을 넘기지 않겠다고 했대요.

그러니까 우리 엄마도 그럼 해 보시라고, 엄마도 딸이 가수가 된다는 대리만족이었을 거예요.그런데 마침 운이 그쪽으로 따라주어서 그런지 그때 장욱조 씨가 팝송 연습을 시키면서 ‘잊지는 못할 거야’ 자기 노래도 함께 연습을 시켰어요. 그 노래로 연습했으니까 그걸로 판이 나온 거예요. 그 판을 들고 TBC에 가니까 생긴 것은 아직 어린데 노래가 너무 진하단 말이에요.

사랑도 한 번 안 해 본 것 같은 아이가 숏 컷을 치고 “별을 보고 달을 보면 생각이 나겠지요~” 부르니까 쟤가 무슨 별을 보고 달을 보면서 생각을 하겠느냐는 의견들이 나왔어요. 그래서 빨리 노래를 만들 수 없겠냐고 해서 김기욱 씨가 ‘말해줘요’ 라는 노래를 이틀 만에 만들어냈어요.

“사랑한다고 말해줘요. 나 그대를 알아요~”그 판도 데뷔곡은 ‘말해줘요’인데 처음 나온 판은 ‘잊지는 못할 거야. 아쉬움’으로 첫 판이 나온 거죠. 오아시스 레코드사에서도 일사천리로 빨리 돌아가고 그래서 눈 뜨고 나니까 가수가 됐다니까요. 그렇게 가수로 취입을 해 놓고 타미 아저씨가 김 세레나 씨에게 갔어요.

그때 김 세레나 선배님이 대한극장에서 리사이틀이 있었어요. “누이, 내 신인 가수인데 누이 리싸이틀에 집어넣어 줘.” 그래서 대한극장 무대에 서서 ‘Mother of mine' 'My way' 노래를 했어요. 그때는 취입은 해놓고 테잎은 나와 있는 게 없으니까요. 그래서 대한극장에서 김 세레나 선배 리싸이틀 무대도 섰고 그때 김영호 단장님도 알았죠.

또 그때는 전부 극장 쇼 무대였잖아요. 그러니까 ‘말해줘요’ 하면서 TV프로그램 하면서 극장 쇼 김영호 단장을 알고, 한 번 김 세레나 리싸이틀에 섰던 경력이 있으니까 하춘화 선배 등 다른 가수들 쇼에도 올라갈 수 있었어요. 그렇게 해서 가수가 되니까 8월도 되기 전에 화교학교를 다닌 중국말을 하는 신인가수, 깜찍한 소녀가수라는 둥 매스컴에서 말을 예쁘게 띄워줘서 결국 대만대학교를 놓치고 말았어요. 그래서 노래를 하게 되었어요.

▶ ‘그때 대만학교에 가서 외교관을 할 걸’ 하는 생각은 안 해 보셨어요?

그런 생각도 했었어요. 우리 친척이랑 화교학교에 같이 다녔는데 그 친척은 대만 국제대학교에 가서 클래스메이트랑 결혼을 했어요. 대만에는 대북, 대중, 대남, 이렇게 세 군데로 나뉘어요. 타이난, 타이종, 타이페이 이렇게 부르는데 타이난에서 8손가락에 드는 갑부집 아들과 결혼을 한 거예요. 그러니 여자가 봤을 때 나도 대만 대학 갔으면 부자 신랑 만나서 나도 떵떵거릴 텐데 하고 그때 한 번 살짝 후회해봤어요.

그 애는 부자가 되었고 나는 이름만 날리니까,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언제부터인가 나는 가수 잘 한 거 같아.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누리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다 먹잖아요. 물론 돈이 많으니까 그 친구도 나만큼 하겠지만 아이를 낳고 한 가정의 며느리로서 부인으로서 그냥 주부인 거잖아요. 그런 거 생각하면 가수 잘 한 거 같아요.

◇ 부모님 덕에 입학한 화교학교 ‘나는 토종 한국인’

 

▶ 당시 스타 분들이 어떤 분들이 계셨어요?

이현, 장미화, 이수미, 정훈희 저 할 때 나오셨던 분들은 조용필, 최헌, 윤수일, 혜은이, 이은하, 윤시내 씨 등 굉장히 굵직한 가수들과 같이 무대에 선 거예요.

▶ 많은 분들이 진미령 씨가 화교인 것으로 알고 있어요.

부모님 전부 한국분이세요. 순수 토종 한국인인데 데뷔 때부터 화교학교 출신 가수 진미령 이랬는데 아직까지도 그렇게 알고 계신 분들이 많아요. 절대 아니고 화교 친구가 많은 가수 진미령입니다.

▶ 화교학교를 어떻게 다니게 되신 거예요?

저희 어머님이 자식 중 하나는 외국말을 공부시키고 싶어 하셨어요. 또 부모님이 재미있는 게 우리 엄마가 명동에 나가셨다가 뒷길로 가셨는데 당시에는 ‘달러 골목’이 있었잖아요. 그래서 미도파 앞에서 죽 걷다 보니까 명동에 중국 화교학교인 초등학교가 있더래요.

아직도 있어요. 지나가시다가 화교학교? 여기도 괜찮겠다고 생각하시고 무턱대고 들어가셨대요. 대부분 한국말을 하는 분들이니까 어떻게 왔냐고 물어봤겠죠. 사실은 내 딸을 이 학교에 보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딸을 이 학교에 보낼 수 있느냐고 하니까 왜 보내려고 하느냐 그랬겠죠.

중국말도 가르치고 싶고 남편이 옛날에 하얼빈에서도 살아서 중국말도 잘 하니까 여기에 보내고 싶다고 했는데 마침 잘 맞는 선생님이 아주 꼼꼼하게 절차를 알려주셔서 제가 그곳에 간 거 아닙니까.‘니 하오 마’도 모르고 가라고 하니까 갔어요. 그랬는데 명동에 초등학교가 있고 중, 고등학교는 연희동에 있어요. 고등학교는 연희동에 한 군데밖에 없어서 지방 아이들이 다 서울에 와서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기숙사가 있었어요. 저도 기숙사에 있었고요. 그러니까 아이들과 빨리 말을 배울 수 있었죠.

▶ 아버님이 HID 북파공작원 대장이셨다고요?

예, 맞아요. 저희 오빠가 1,2살 때였으니까 꽤 오래된 이야기죠. 저희 아버님이 회고록을 내셨는데 그때 어떤 잡지 기자가 오더니 저한테 심각하게 전유성 씨가 북파공작원의 딸이라는 걸 알고 결혼했냐고 묻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더 이상 말은 안 했어요. 바로 대령 예편하셔서 공무원으로 생활하시다가 정년퇴직하셨어요.

▶ 고향은 어디세요?

저는 서울이고 엄마는 개성이고 아버님은 함경북도에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함경북도 도지사로 정년퇴임하셨고요.

▶ 어린시절 어떤 아이였어요?

그냥 말 잘 듣는 꼬마였던 것 같아요. 어렸을 때는 군것질 하지 말라고 엄마가 그러잖아요. 길거리에 다니면서 파는 게 많았어요. 그러면 엄마가 먹지 말라고 그럴 거 아니에요. 오빠와 언니는 손 붙잡고 다니는데 나는 작다고 안 데리고 다녔대요. 그러니까 쫓아다니면서 오빠, 언니가 뭘 먹는다고 하면 엄마한테 이르는 거예요. 그래서 더 안 데리고 다녔겠죠.(웃음)

◇ 절대미각은 집안 내력, ‘간장 게장’으로 선보여

▶ 진미령 씨 음식 솜씨 좋은 건 세상이 다 아는 얘기인데, 절대 미각을 가졌다는 말도 있어요.

어렸을 때부터 식구들이 어디를 나가면 여러 가지를 시켜요. 5,6가지를 각자 한 개씩 시켰어요. 제가 2남 2녀의 셋째였거든요. 그래서 음식을 시키면 다 제각이니까 맛을 봐요. 또 매주 일요일이면 부모님과 함께 외식을 했거든요. 저희 아버님이 대령 예편하셔서 처음에 공무원 하신 게 삼척시장, 속초시장, 강릉시장, 목포시장, 경기도청 기획관리실장 하시면서 함경북도 도지사로 정년퇴직하셨거든요.

그래서 아버지 덕에 많이도 다녔어요. 목포에 가면 아직도 친구들이 있고요. 집이 부유해서 힘들 게 자라지는 않았어요. 아버지가 서울에 오시면 매주 일요인은 외식을 했죠. 한 주는 중식은 외백이라는 곳에 가고 일식은 조선호텔에 있는 향진에 가고. 아무튼 음식에 대해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워낙 좋아하셔서 그때부터 혀가 남달랐겠죠.

최고의 식당만 가고 맛있는 것도 먹고 하니까 동네 식당에 가면 맛이 없는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집에서 음식을 하게 되고, 또 엄마가 몸이 약해서 외할머니가 저를 키우셨어요. 외할머니가 순수 개성 분이신데 저를 한 살부터 열 몇 살 때까지 키우셨다고 해요.

진미령이라는 것도 저희 외할머니 성이 진씨세요. 그래서 화교학교에 들어가서이기도 하지만 성이 ‘진’이라는 것도 한 몫을 한 거예요. 제 원래 호적 이름은 ‘김미령’이에요. 그래서 음식에 대해서는 어렸을 때부터 먹다 보니까 집에서 만들게 된 거죠.

할머니가 하는 개성요리 만드는 거 옆에서 보고 자란 거예요. 우메기라든지 약과, 강정 등 할머니가 1년 내내 음식만 하시잖아요. 그리고 할머니가 간장게장을 그렇게 맛있게 잘 담그셨어요. 홈쇼핑에서 할 때도 어떤 아이템으로 갈까 해서 간장게장으로 정한 거죠. 공장을 갖고 있는 사람과 지금까지 파트너로 일을 하는 거지 이름만 걸고 하는 건 아니에요.

▶ 음악과 요리 중에 어떤 게 더 좋으세요?

둘 다 좋고 둘 다 할 거예요.(웃음)

▶ 요리에 욕심이 정말 많으세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프랑스 요리학교 ‘꼬르동부르’에 다니셨어요?

‘꼬르동’이 리본이라는 뜻이고 ‘부르’는 푸른색이라는 뜻이에요. 푸른색 리본이라는 뜻이죠. 역사와 전통이 대단한데 제가 학교 다닐 때 108년 되던 해에 입학을 했고 지금은 112년 된 학교에요. 우리나라 숙대에 들어왔어요. 그렇지 않아도 제가 꼬르동부르에 가서 공부를 하려고 했죠.

이곳을 어떻게 알았느냐 하면 유성이 형하고 100일 동안 배낭여행을 유럽으로 갔었어요. 저희가 파리에 베이스캠프라고 해서 유학생 아파트를 얻었는데 그 아파트에 있던 학생 하나가 꼬르동부르에 다니는 학생이었어요. 그래서 꼬르동부르라는 학교를 프랑스에 가서 알았고 그 학생한테서 그 학교를 알았어요.

나도 거기 가서 공부하고 왔으면 좋겠다, 그러면 불어도 자연히 늘 수 있잖아요. 1년 동안 투자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마침 그 해에 숙명여자대학교에서 꼬르동부르와 자매 결연을 맺어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거예요. 제가 1기 졸업생이에요.1년 과정인데 프랑스 요리만 갖고 있는 레시피만 해도 300가지가 넘어요.

꼬르동부르를 다니고 프랑스 요리를 하면서 한국요리만큼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에요. 그래서 집에서도 쉽게 할 수 있는 프랑스 요리라는 책을 내려고 하는데 출판사들이 요즘 다들 안 되니까 아직은 못 내고 있는데 언젠가는 책을 낼 거예요.

◇ ‘자유인 기질’ 전유성 씨와 나는 닮은 꼴

▶ 진미령 씨 하면 덩달아 같이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요. 바로 전유성 씨인데 서로 전혀 다른 듯 보이는 두 사람이 부부로 살고 있는데요.

다들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아마도 성격이 맞았던 것 같아요. 남들이 보는 전유성 씨는 기인인데 제가 보기에는 기인 아니에요. 내 눈에는 평범해 보이는 거예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 기인이라고 생각 안 하거든요. 기인이 아니라 자유인이죠.

자고 싶을 때 자고, 물론 자유직이니까 그럴 수 있겠죠. 자기가 일이 없는 날 낮술도 먹고 그러거든요. 시간이 있으니까 마시는 구나, 할 일이 없으니까 마시는 구나 그렇게 보여요. 또 지리산에 뱃살 뺀다고 갔잖아요. 얼마나 배가 나왔으면 가고 싶었을까, 다녀오라고 했어요.

결혼해서 허리가 38까지 갔었거든요. 그래서 항상 헐렁한 남방을 입고 다녔어요. 결혼해서는 정말 매끼마다 세계의 각국 요리를 다 해줬어요. 요리하는 걸 워낙 좋아하니까요.그렇다고 전유성 씨가 예뻐서 매일 해 준 건 아니고 친구들이나 후배, 선배들이 자주 놀러왔어요. 그 사람들이 오면 해 주는 거예요.

그래서 많은 분들이 왔다 갔다 하다가 와, 형수님 요리 잘 한다. 맛있다. 하는데 어느 날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요리책 좀 냅시다, 그렇게 맛있다는데...그래서 맨 처음에 낸 게 ‘유성아 뭐 먹고 싶니’라는 에세이집이었는데 그 책이 많이 나갔어요. 그런데 그 책을 본 사람들이 그림 없이 설명만 되어 있으니까 컬러로 요리 책자를 만들어보라고 해서 ‘진미령의 행복한 식탁’이 탄생한 거예요.

그 다음에 ‘설거지보다 쉬운 인터넷’이라는 책도 나왔고 마지막이 ‘라이브 쿠킹 잉글리쉬’ 어린이들과 같이 할 수 있는 요리를 하는데 레시피나 재료 이름은 영어로 되어 있는 거죠.

▶ 전유성 씨와 혼인신고를 하지 않으셨다면서요?

혼인신고 안 했죠.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갈라서, 싸워 말어가 없는 거예요.제가 혼인신고를 안 하고 산다는 TV 프로그램을 녹화해놓고 방송이 나간 날 검색어 순위 1위로 올라왔었어요. 이게 연령대로 분석해 놓은 게 있거든요. 30대 남자들이 가장 많이 검색을 했어요.

나 때문이 아니라 혼인신고 안 하고 어떻게 살 수 있었는가? 혼인신고 안 하고도 살 수 있는가? 이런 게 궁금했을 거라는 제 추측이지만 30대 초반 남자들이 진미령이 혼인신고 안한 게 왜 궁금했겠어요? 그 얘기는 그만큼 요즘 젊은이들은 혼인신고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더라고요. 제가 조금 앞서간 거라고 생각하면 편안하지 않을까요?

▶ 일각에서는 두 분이 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TV프로그램에 나가서 그 얘기도 했다니까요. 헤어진 게 아니라 잠시 책 쓰느라고 떨어져 있을 뿐이다, 떨어져 있다 보니 편안해서 이대로 가면 어떨까 하고 의논 중이다, 그게 다예요.

▶ 여성으로 태어나서 아이를 낳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으신가요?

유성이 형한테 딸이 하나 있는 걸 알고 결혼했는데 그래서 딸이 있어서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아이를 낳는 걸 원하지 않았고 아이는 낳지 않겠다고 하니까 나는 애가 있으니까 나도 애 원하지 않는다고 합의를 봤죠.왜냐하면 나한테 쓰는 시간이 아까웠어요. 내가 만약 아이를 낳으면 아이를 봐줘야 하는 시간이 아까웠던 거죠.

나한테 투자하는 시간이 굉장히 많거든요. 손, 발톱은 물론 머리도 집에서 혼자 해요. 염색하거나 커트할 때만 미장원에 가고 그 외에는 뜨개질도 해서 가방도 짜서 들고 다니고 시장 가서 치마 옷감 있으면 사다 본떠서 치마도 만들어 입고...혼자 집에 있으면 굉장히 바빠요.

그렇게 생활을 하다가 꼬마 아이가 있으면 애에게 매달려야 하니까 다른 일을 못할 거 아니에요. 또 애는 내가 배는 순간부터 눈감는 날까지 걱정을 해야 하는 게 너무 싫었어요. 후회가 들기는 했어요. 노사연 씨 아들 크는 거 보고, 또 주위에 같은 때 결혼해서 아이 있는 사람들 보면 나도 낳을 걸 그랬나? 그런 생각도 했지만 후회는 안 해 봤어요.

▶ 전유성 씨의 자유인과는 또 다른 기질이 진미령 씨한테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것 같아요. 그러니까 서로 이해하고 책 쓴다고 나가 있는 것도 이해하고 또 책 쓰라고 나가라고 한 나를 유성이 형은 이해를 했고, 둘이 앉아서 조목조목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아는 거죠.

◇ 손쉽게 할 수 있는 프랑스 요리 책 내고 싶어

▶ ‘홀로이’는 무슨 뜻인가요?

그냥 의성어에요. 페루 말인데, 즐거울 때 할 수 있는 말이죠. 안데스 음악하고 가요하고 크로스 오버 시켰는데 페루 악기가 들어가요. 케냐, 산뽀냐, 오깔리나. 그래서 페루 악기는 페루 연주자인 라파엘이 연주해줬어요. 옛날에 ‘엘 콘도르 파사’라는 노래 같은 느낌이 나죠.

▶ 앞으로 특별한 계획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괜찮은 출판사가 있으면 집에서 쉽게 따라할 수 있는 프랑스 요리 책 하나 내고 싶어요. 뭘 정해 놓으면 안 하게 되고 또 그 틀로 들어가야 하니까 특별한 계획보다는 그냥 열심히, 재미있게 사는 거예요. 예를 들면 프랑스 요리학교 가야겠다, 프랑스 가야겠다 하는데 그게 한국에 들어와서 가게 되는 거라든지 또 지나다니다가 이번에 고려대학교에서 경영인들 수업하는 게 있다고 하면 가 볼까? 그렇게 들어가고. 눈앞에 있는 것들 내가 보고 짐작해서 결정해서 끝까지 마무리 지어야겠다고 생각하면 손을 대기 시작하고 마무리 못 할 것 같으면 손을 안 대죠.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박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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