씁쓸한 희곡의 시작은 14일 밤 10시쯤 서울중앙지검 출입기자들에게 도착한 한 통의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에서 시작됐습니다.
이 때 상당수 기자들은 2달여간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유우성씨 간첩증거 조작사건 최종수사결과 발표와 관련한 기사송고를 마무리짓고 서초동 선술집 곳곳에 삼삼오오 모여 회포를 풀고 있던 차였습니다.
도착과 함께 확인한 메시지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국정원 측에서 내일(15일) 오전 10시 내곡동 본원에서 남재준 원장이 입장발표를 한다고 알려왔음. 내일 오전 9시까지 서울지검으로 버스 2대를 보낸다고 함. 8시50분까지 각 언론사당 1인 참석신청자 명단을 받을 예정임. 일문일답은 없으며 방송과 신문 등 촬영기자는 '풀단'으로 구성해달라고 요구"
참으로 '국정원스러운' 일방적인 통고였습니다.
남재준 원장의 기자회견이라면 증거위조와 관련한 거취표명 기자회견일텐데, 이런 중요한 기자회견 일정을 불과 12시간 남겨둔 한 밤중에 문자 한통으로 통지하는 국가기관이 대한민국에서 국정원 외에 또 있을까요?
더군다나 기자들에게 취재요청을 하면서 '일문일답은 없을 것'이라고 미리 잘라말하는 대담함에는 혀를 찰 수 밖에 없었습니다.
취재를 요청하는 대상이 먼저 기자단에게 "풀단을 구성하라"고 비상식적인 요구를 하기도 했습니다.
통상 영상이나 카메라 기자들의 경우 장소가 협소하거나 불가피한 경우 몇개 사가 대표로 취재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풀단을 구성한다'고 하고, 전적으로 언론사끼리 자율적인 협의를 통해 결정돼 왔기 때문입니다.
국정원의 한밤 기자회견 통지는 그 자체만으로 상식 이하의 오만한 행태였지만 기자회견 참석은 또다른 문제였기 때문에 CBS법조팀은 기자회견 참석 여부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이 15일 서울 내곡동 청사에서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사건에 대해 대국민사과하고 있다. (사진=윤성호 기자)
국정원의 의도는 명백해보였습니다. 국정원 직원들이 증거조작을 했다고 공식 확인된 마당에 국정원장이 TV 카메라 앞에서 대국민 사과라는 이벤트를 벌일테니 기자들이 조용히 화면앞에서 들러리를 서달라는 요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뻔한 의도에 기자들이 넘어가줄 필요가 있겠냐는 의견이 대다수였습니다.
차라리 기자단 차원에서 '기자회견 보이콧'을 요구하자는 제안까지 나왔습니다.
하지만 한밤중이고 시간이 없어 기자단 차원의 논의가 쉽지 않다는 점, CBS 한개 언론사의 의사와 상관없이 어쨌든 기자회견은 진행될 가능성이 높은게 현실이었습니다.
15일 당일까지도 쉽게 나지 않던 결론은 기자회견장 출발을 한시간여 앞두고 참석쪽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어찌됐든 남재준 국정원장이 증거위조에 대해 사죄하는 '역사적 순간'에 기자가 참여하지 않는 것은 또한 일종의 직무유기일 수 있고, 현장에서 어떤 돌발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이 참석을 결정한 이유였습니다.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이 15일 서울 내곡동 청사에서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사건에 대해 대국민사과를 하고 있다. (사진=윤성호 기자)
결국 오전 10시 남재준 원장이 준비된 TV 카메라 앞에 굳은 표정으로 서면서 문제의 기자회견은 시작됐습니다.
그는 예상대로 국민에 대한 사죄를 이야기하며 카메라 앞에서 고개를 숙였습니다.
하지만 "책임을 통감한다"던 그의 입에서 "국정원장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말은 끝내 나오지 않았습니다.
3분여에 불과한 기자회견 대부분은 통렬한 반성보다는 증거조작은 '일부직원'들의 소행이고 국정원 개혁은 스스로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는 '셀프개혁'에 대한 설명이 차지했습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NLL 도발, 4차 핵실험 위협, 다량의 무인기'를 언급하며 "이 위중한 시기에 국정원이 환골탈태해서 새로운 기틀을 마련할 수 있도록 국민 여러분께서 기회를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라는 대목에서는 은근한 협박조까지 느껴졌습니다.
15일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국정원에서 남재준 국정원장이 대국민 사과발표를 마치고 급히 자리를 떠나고 있다. (사진=윤성호 기자)
3분도 채 안되는 '이벤트'가 끝나자 몇몇 기자들은 일제히 남 원장을 향해 질문을 던졌지만, 국정원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기자회견장을 나가버렸습니다.
기자들은 국정원장의 상식밖의 행동에 대해 기자회견장에 나온 국정원 관계자들에게 강력히 항의했습니다.
증거위조라는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른 국정원의 대표가 국민에게 사죄를 하겠다고 기자들을 불러내놓고 질문에 답변조차 하지 않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30여분간의 거센 항의에도 국정원 직원들은 기자들에게 아무 해명없이 돌아가는 버스에 빨리 탑승해달라는 재촉만 반복했습니다.
국가기관, 더구나 국정원장이라는 권력기관의 수장이 대국민 사과를 하는 자리에 온 기자들은 국민들을 대신해 참석한 것입니다.
정작 '국민들에게 사과하겠다'던 국정원장이 국민들의 질문을 무시하고 퇴장하는 이 해괴한 상황에서 기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남재준 주연의 '블랙코미디극'에서 한낱 들러리로 전락한 현장기자들의 감정은 '무력감'과 '자괴감'이라는 두 단어가 가장 적절했다고 보입니다.
과연 기자회견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 답이었을까요? 처음에는 '기자로써 책무가 더 중요하다'며 자신을 다잡았지만 이제 그런 대답을 자신있게 할 수 없을 거 같습니다.
국정원장에게도 대통령에게도 질문할 수 있다는 기자들의 '당연한 권리'가 대한민국에서는 어느때부터인지 '대단한 특혜' 혹은 '싸워서 얻어내야만하는 권리'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싸워야해서라도 답을 듣고 왔었어야 한다"고 국민들이 질책하신다면 들러리가 된 기자의 면목없는 대국민 사과는 이 한마디가 될 거 같습니다.
"다음에는 싸워서라도 답변을 반드시 듣고 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