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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사태 15주년, 천안문은 철저한 계획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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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06-03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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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9년 6월 4일 자유화와 부패척결을 주장하는 학생들과 시민 200여명을 살상시킨 천안문사태가 자행된지 벌써 15년이 됐다.


3일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당시 슈피겔의 베이징주재 특파원이었던 안드레아스 로렌츠의 증언을 빌어 이 학살극이 사전이 철저히 계획된 살인행위였을지 모른다는 의문을 제기했다.

처음에는 정치성없는 사회정의 외치던 시위, 인민일보 기자나 공안원까지 가세

1989년 5월 말부터 시작된 시위는 원래 민주화나 자유화가 아닌 덩샤오핑과 중국 공산당 내부의 비리, 그리고 인재등용에 있어 철저한 인척관계와 정치적 영향력이 있는 집안 출신이 득세하는 현실을 비난하는 비정치적 시위였다.

당시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이 시위는 일반시민인 거리의 행상, 청소부는 물론 의사, 중국정부의 공무원인 외교관, 세관원, 중국관영 신화통신 기자, 인민일보기자 등 언론인과 심지어 공안들까지 지지했다.

로렌츠는 넓은 천안문광장을 메우고 있는 인파를 보고 ''''이들 중국인들이 한국전에서 썼던 인해전술을 또 쓰려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들의 시위는 평화적인 것이었고 시위대와 옆에서 근무하던 인민해방군은 정치토론이나 농담을 주고받으며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평화롭게 머물러 있었다.

심지어 베이징 외각에 주둔하던 한 군부대의 장군은 ''''어떤 일이 있어도 시민들에게 발포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학생들 가세로 민주화, 자유 요구하는 정치시위로 성격변해

이런 시위는 6월에 접어들면서 차차 정치적 자유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식으로 성격이 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베이징대학 등 베이징소재 대학에 다니던 학생들의 가세로 시위의 성격에 엄청난 변화가 오고 있었다.

이들은 소련의 체재가 흔들리고 있고 민주화를 하지 않으면 중국도 소련의 전철을 밟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심어줬다.

이렇게 정치집회의 성격이 강해지자 학생들 가운데는 민주화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에 들어가기도 하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당시 현장을 지키던 외신기자들은 ''''이런 시위라면 당연히 최루탄과 물대포를 동원해 진압할 수 있는데 왜 중국정부가 수도 한 복판에서 벌어지는 시위를 방치할까''''라는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일부 기자들은 일단 이제까지의 기사나 사진을 전송하기 위해 홍콩에 있는 아시아지국으로 돌아갔고 로렌츠는 한 미국인 기자와 베이징에 남아 사태를 관찰했다.

탱크동원, 군인들 무기와 실탄 몰래 숨겨 들여와 유혈극준비

시위가 1주일을 넘어가 장기화되자 생업에 종사하는 일반 시민들은 상당수 광장을 떠나 직장으로 돌아갔고 시위대 수가 감소하는 조짐을 보였다. 그러던 중 6월 3일 시위대 사이에서는 ''''군인들이 우리에게 사격을 가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무엇보다 이런 소문을 뒷받침해주는 것으로는 천안문 일대에 무장한 탱크가 진주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위대는 탱크 옆에 서 있는 인민해방군들이 무기를 소지하지 않고 작은 야전용 배낭만을 들고 있는 모습에 안도감을 보였다. 이들은 군인들이 배낭 안에 소총과 실탄을 가지고 있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평화로운 모습에도 불안을 느낀 일부 시위대는 인근에 주차된 버스의 타이어를 터뜨려 일단 광장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6월 4일 새벽 1시 군인들은 일제히 행동을 시작했고 배낭에 숨기고 온 철모와 소총을 꺼내 일제 사격을 하며 학생들을 좁은 골목으로 몰아대기 시작했다. 군인들의 발포소식을 들은 학생들의 부모들은 자녀들을 구하기 위해 광장에 달려왔지만 군인들의 제지로 자녀들이 총을 맞고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만 봐야 했다.

이들 인민해방군은 그러나, 외신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분주히 촬영을 하는 것은 그다지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았고 덕분에 로렌츠일행은 광장에 잠입할 수 있었다.

이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광장은 인민해방군이 장악한 상태였고 학생들은 좁은 골목에 몰려 부상당한 동료들을 자전거로 나르고 있었다. 현장에 있던 한 의사는 영어로 ''''이 상처는 총상 때문에 생긴 것인데 아마 7.65구경 AK소총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일단 대다수의 학생들은 부상자를 데리고 베이징호텔 인근 병원가로 뛰어갔고 그 뒤를 군인들이 쫓았다.

도주하는 학생들에 사격, 대학 구내에서 공개총살

학생들 일부는 베이징시 남쪽으로 대피했지만 군인들이 이미 골목 맞은편에서 최루탄을 쏴 시위대의 진로를 차단하고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그날 밤 소문에는 군인들이 베이징대학까지 진입해 학생들을 대학 구내에서 사살했다는 말도 들렸다.

또, 베이징의 외교관 거주지 앞에 있는 다리에는 총에 맞은 시신이 며칠씩 방치되기도 했다.



로렌츠는 ''''그날의 기억은 생지옥이었고 11명이나 진입하는 탱크를 막다 탱크에 깔려 숨졌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로렌츠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한 중국인 학생운동가를 독일 항공 루프트한자와 스위스에어라인으로 안내한 뒤 독일행 비행기표 한 장을 사줬지만 곧 군인들이 들어와 천정에 총을 발사했다.

한 장교는 ''''이미 길은 막혔다''''며 도주해온 중국인 학생들을 연행해 갔다.

사전에 철저히 대비한 계획된 살인

로렌츠는 베이징시외에서 시위대에 사격을 가하는 것을 반대하던 한 군 지휘관이 이끄는 부대가 다른 부대와 교전을 벌였다는 말을 듣고 현장에 달려갔지만 이미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베이징시내에 진주해 있던 부대와는 달리 교외에 있던 부대 지휘관들은 외신기자들에게도 권총을 들이대며 위협을 하는 행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로렌츠는 ''''아직도 그날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한다''''며 ''''군인들이 시위대를 방관하는 것처럼 대해 안심시킨 뒤 총기를 숨겨와 사격을 가한 행동으로 보아 중국정부가 격한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무력을 행사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로렌츠는 ''''이는 사전에 철저히 계획된 살인행위''''라고 말했다.

노컷뉴스 이서규기자 wangsobang@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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