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제공)
"정교하다!"
KBS 1TV 대하드라마 '정도전'에 쏟아지는 찬사의 중심에는 탄탄한 고증이 있다. 정도전과 이성계의 만남, 그리고 조선이 건국되는 드라마틱한 과정뿐 아니라 각각의 캐릭터들이 입고 나오는 의상, 사용하는 칼까지 철저히 사료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라는 찬사는 이같은 정교함에서 비롯됐다. 주말 밤, 여말선초 시간여행을 가능케 한 KBS아트비전 소속 장식디자이너 이정민, 의상디자이너 강윤정, 미술감독 김소연 등 비주얼팀 3인방을 만났다.
극중 정도전(좌)과 정몽주(우)는 다른 갓을 착용하고 등장한다.(KBS 제공)
◈ '정도전' 속 의상을 보면 캐릭터가 보인다의상은 '정도전'에서 가장 고증에 신경 쓴 부분 중 하나다. 단순히 시대상을 보여주는 것에서 나아가 각 인물들간의 대립, 캐릭터의 성격까지 의상으로 드러냈다. 의상디자이너 강윤정 씨는 "고려를 지키려는 사람들과 조선을 세우려는 신진사대부는 갓 모양부터 다르다"고 설명했다.
'정도전'을 보면 고려를 추종하는 인물들은 발립, 조선을 세우려는 세력들은 중립을 쓴다. 정도전과 정몽주의 갓 모양이 다른 것도 이 때문이다. 발립은 원나라의 영향을 받았고, 중립은 조선 초까지 계속 간다는 것에 착안했다. 중립은 '용의 눈물' 때에도 제작됐지만, '정도전'을 통해 대나무로 틀을 떠 초상화에 나오는 온전한 형태로 복원됐다.
이성계의 기상을 표현하기 위해 다른 인물들과 달리 털을 소품으로 사용했다.(KBS 제공)
또 이성계는 위풍이 당당한 장수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갑옷에 털을 둘렀다.
계급에 따라 사용되는 칼도 달리했다. 최근 10년간 퓨전 사극이 많이 나오면서 고증에는 다소 벗어나더라도 캐릭터에 부합하는 무기를 찾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정도전'은 고증에 좀 더 집중했다.
여말선초는 직도에서 환도로 넘어가는 시기다. 그래서 귀족들은 환도를 갖고, 하급 무인들에게는 예전에 쓰던 직도를 사용했다. 칼을 패용하는 것도 드라마에서는 싸움을 하거나 말을 탈 때 동선 때문에 손에 들거나 허리춤에 찼지만, 이번엔 허리춤에 고리에 거는 형식을 선보였다.
각 인물들이 출연하는 배경 공간도 색을 통해 분리했다. 김소연 미술감독은 "이인임과 신진사대부는 색이 다르다. 이인임의 집무실은 예전부터 써왔던 색들을 다 집어넣어 컬러톤을 살렸고, 신진사대부는 새로운 톤을 만들었다. 공간으로 두 세력을 구분 지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도전'에서 가장 비싼 의상으로 꼽히는 일본군 갑옷(KBS 제공)
◈ '정도전' 속 기네스 열전'정도전' 속 인물들이 입는 의상 중에서 가장 비싼 것은 일본군의 갑옷이다. 일본에서 직수입한 것으로 투구에 내피까지 합하면 벌당 1억 원을 호가 한다고.
이성계 등 장수들이 입는 갑옷도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만들어진다. 갑옷 하나를 만드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2개월 안팎. 강윤정 디자이너는 "일단 갑옷을 디자인하면 대량 생산은 중국 공장에서 이뤄진다. 그런데 이번엔 '국내산 갑옷을 만들어 보자'고 해서 국내에서 전량 생산했다. 갑옷에 쓰인 플라스틱도 새롭게 사용한 소재다"고 설명했다.
'정도전'에서 등장하는 검과 갑옷은 고증을 바탕으로 제작돼 호평받았다.(KBS 제공)
신소재 사용을 통해 갑옷의 무게는 획기적으로 줄어들었다. 경번갑의 실제 소재는 쇠사슬, 찰갑은 쇠다. 사료에도 주변 사람의 도움으로 입고, 벗었다고 기록돼 있을 정도다. 강 디자이너는 "우리는 일단 촬영을 시작하면 배우들이 1년은 입어야 한다"며 "쇠사슬과 쇠처럼 보이는 특수 플라스틱으로 최대한 가볍게 제작해 활동성과 편리성을 높였다"고 말했다.
'정도전'에서 간간히 등장하는 도자기나 불상들도 모두 작품을 위해 복원된 것. 주먹만한 도자기도 개당 150만원에서 200만원 정도를 호가하는 귀한 몸이다.
이인임의 사랑채는 평당 가장 비싼 제작비가 투입된 세트로 꼽힌다. 이인임의 사랑채는 이인임이 궁과 대등한 권력을 가진 인물임을 보여주는 장치였다. 일반적인 사극 세트들이 카메라가 잡히는 곳만 낙엽송을 쓰고, 그외의 곳은 저렴한 합판을 사용하지만, 이인임의 사랑채는 모든 마감을 낙엽송으로 했다. 여기에 바닥도 실제 돌을 깔아 비슷한 사이즈의 세트를 제작하는 것 보다 제작비가 3~4배 정도 들었다.
◈ 준비기간 5개월의 비밀'정도전' 속 소품과 배경의 정교함에도 불구하고, 준비기간은 단 5개월에 불과했다. 5개월 준비에도 불구하고 '정도전'이 높은 수준의 볼거리를 선보일 수 있었던 비법에는 '용의 눈물'이 있다.
1996년 첫 방송돼 1998년까지 2년간 전파를 탔던 '용의 눈물'은 이성계의 조선 개국에서 세종조까지 그려 '정도전'과 시대적인 배경과 역사적 사건 등이 일치한다. '용의 눈물' 역시 철저한 고증으로 화제를 모았는데, 그때 수집 및 정리된 방대한 자료가 '정도전'에서 다시 빛을 발한 것.
강정윤 디자이너는 "'용의 눈물'을 했을 때엔 자료조사만 1년을 했다고 하더라. 각 분야 전문가에게 조언을 받고, 사료를 찾는데 그만큼 시간이 걸린 것이다. 지금은 그때 잘 정리된 자료가 있기 때문에 힘들지 않았다"고 작업 과정을 설명했다.
이정민 디자이너도 "극중 등장한 일본기에 대한 자료를 찾고, 검증을 받는 데에도 이틀 밤을 샜던 것 같다"며 "만약 '용의 눈물'때 만들어진 자료가 없었다면 이처럼 단시간 안에 무언가를 만드는 게 불가능 했을 거다"고 덧붙였다.
고려 말 복식의 디자인을 따랐지만, 좀 더 맵시가 날 수 있도록 변형이 이뤄졌다.(KBS 제공)
◈이건 몰랐지? 볼거리를 위한 변화'정도전'에 대한 호평이 이어지고 있지만 이들 3인방은 "조화가 좋았던 것"이라고 말하며 "퓨전과 변형도 이뤄졌다"고 털어놓았다.
대표적인 예가 등장 인물들이 입는 한복이다. 강윤정 디자이너는 "당시 복식 스타일은 풍성하게 입는 방식이었는데, 그럴 경우 지금의 기준으로는 맵시가 나지 않는다"며 "의상의 디자인은 정통적인 방식을 따르데, 좀 더 몸의 맵시가 드러나도록 사이즈를 수정하면서 고증과 볼거리를 맞춰 나갔다"고 말했다.
단청 역시 변화가 이뤄진 부분이다.
김소연 미술감독은 "이전 사례를 살펴보니 단청에 대한 지적이 많은 것 같았다"며 "아예 단순한 줄무늬로 단청을 넣었다. 전문가들에게도 의뢰하니 가능한 변형이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때문에 '정도전'에 쏟아지는 '완벽한 고증'이라는 찬사에도 "솔직히 부담이 된다"고 고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