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고품격 뉴스, 세상을 더 크고 여유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CBS <김현정의 뉴스쇼=""> '기자수첩'에서는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았다. [편집자 주]김현정의>대자보는 대륙마다 역사의 전환기에 등장한다. 프랑스 대혁명(1789-1794)에서는 왕당파에 맞선 시민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써 붙여 지지와 단결을 호소했다. 1517년 종교개혁의 신호탄을 터뜨린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도 비텐베르크 성 교회 정문에 내붙인 대자보였다.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1966-1976)이 달아오르던 시절에 베이징대학 식당에 대학 당국자이자 공산당 간부인 고위층을 비판하는 대자보가 나붙었다. 배후에는 마오쩌둥이 있었다. 이후 대학마다 부르조아를 비판하는 대자보가 나붙기 시작했고 드디어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한 마오쩌둥의 베이징 인민대회당 대자보, '사령부를 포격하라-나의 대자보'가 등장한다.
이 대자보는 전국 각 처로 번지며 홍위병 운동을 폭발시켰다. 당시 공산당 실권파가 당 기관지 등 각종 간행물들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맞서는 조반(造反)파는 대자보를 대중 선동의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이 애용한 대자보 운동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대자보는 형식이 간편하고 생동감이 있으며 여러 사람에게 주의를 줄 수 있고 군중을 선동하는 데 편리하다."
◈ 대자보 - 우울한 시대를 포격하다우리나라 역사에서 대자보는 괘서, 익명서, 은닉서, 벽서 등의 이름으로 존재한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 진성여왕 때 정치를 비방하는 글이 큰 길 가에 나붙는 사건이 발생했다. 고려 충렬왕 때도 궁궐문에 글이 나붙었는데 누가 귀신과 무당을 섬기고 공주를 저주한다는 내용이었다.
조선 명종 때는 소윤파가 대윤파를 몰아내기 위해 경기도 과천 양재역에서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이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망조"라고 익명의 대자보 벽서를 써 붙인 뒤 대윤파 소행으로 몰아간 사건이 벌어졌다. 대윤파 2명에게 사약이 내려지고 20여명이 유배를 당했다.
사회 현안들을 외면한 채 진학과 취업 등 개인적 관심사에 매몰됐던 청년들의 성찰과 각성을 담은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에 대한 사회적 반향이 뜨겁다. 16일 오전 서울 고려대학교 안암캠퍼스 정경대학 게시판과 담벼락에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에 응답하는 대자보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윤성호 기자)
1755년 을해옥사와 관련된 '나주 벽서 사건'도 유명하다. 소론 노론의 다툼 과정에서 소론측 세력이 역모를 꾀하면서 나주 객사에 나라를 비방하는 글을 써 붙인 사건이다. 이렇게 사회적 파장이 컸던 사건을 따로 '벽서변'(壁書變)이라고 부르는데 의연한 임금도 있었다.
정조는 자기 비방 벽서가 붙자, '과인이 정치를 잘하면 저 벽보는 당연히 없어진다'며 괜한 공권력 동원이나 색출조치를 삼가라고 했다.
혈벽서(血壁書)라는 것도 있었다. 혈서로 벽서를 써 붙이는 것인데 유행처럼 번져 짐승 피로 위조한 혈벽서도 유행했다 한다. 이것을 '잡혈 벽서'라고 한다.
사화와 당쟁이 빈번하고 백성의 불안과 불만이 높아진 19세기가 벽서가 가장 횡행한 시기이다. 구한말에는 1898년 독립협회 등 개화파에게 밀리기 시작한 수구파가 서울 곳곳에 이씨 왕조를 뒤엎으려는 모반이 진행되고 있다고 써 붙여 독립협회 지도자들이 구속되기도 했다.
현대로 들어서서는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대학 대자보를 통해 광주항쟁의 진상, 5공 집권층의 비리 등이 국민에게 알려졌고, 대자보가 시대문화로 자리 잡았다. 언론이 통제당하니 대자보가 민중저항매체 노릇을 한 것이다.
최근 이슈가 된 '2013 대자보'는 사회 문제에 대해 개인의 생각을 적어 내려갔지만 집단적 각성이나 여론을 불러일으키는 새로운 형태로 가고 있다. 오프라인에서 게시판이나 벽에 써 붙이면 오래가지도 멀리 가지도 못하는 제약이 있다. 그런데 이번엔 대자보의 사진을 찍거나 내용을 요약해 SNS로 전파하는 새로운 소통 방식이 등장해 주목된다.
또 대자보에 대한 열렬한 호응은 대자보가 갖는 특성에도 기인한다. 트윗이나 페이스북, 카카오톡으로 자기 생각을 아무리 격렬하게 적어나가도 자기 글씨로 써내려가는 대자보의 비장함과 카타르시스는 흉내 내기 어렵다는 점이 이번 대자보 돌풍의 배경이 아닌가 싶다.
SNS로 짧고 단편적인 의사소통이 이뤄져 왔기에 어떤 한계와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그것을 젊은 세대 다수가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런 점에서 직접 써내려간 장문의 대자보는 진정성을 내보이는 효과도 커 사람들을 불러 모았을 것으로 본다.
물론 이 대자보 열풍은 곧 끝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음에 벌어질 사회문제와 이슈에서 다시 등장할 것이다. 지금의 SNS가 아닌 더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와 결합할 수도 있다.
◈ 언론 아닌 잡론(雜論)의 시대 대학 후배들에게 미안함을 담은 언론인의 대자보도 고려대에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