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엔화. (사진=이미지비트 제공/자료사진)
원·엔 환율이 끝없이 추락하면서 일본의 양적완화 정책으로 우리나라가 피해를 입는 이른바 '근린 궁핍화'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엔화 하락은 2일에도 이어져 이날 오후 3시 현재 100엔당 1032.42원을 기록했다. 5년만에 100엔당 1030원대에 진입한 이후 불과 나흘 만에 1020원선을 위협하고 있다.
사상 최대의 경상수지 흑자에다 해외유동성 유입으로 원화는 강세를 보이는 반면 엔화는 아베노믹스로 불리는 일본의 양적완화 정책의 영향으로 약세가 지속되고 있다.
특히, 이 같은 엔화 약세는 내년에도 이어져 세계 10대 글로벌 투자은행들은 내년 3분기에 100엔당 996원까지 떨어질 것이란 전망도 내놓고 있다.
양적완화는 통화 공급을 늘려 투자와 소비를 유도하고, 자국 수출상품의 가격경쟁력을 높여 수출을 확대하는 것이 목표다.
그러나, 신흥공업국 입장에서는 선진국의 넘쳐나는 유동성이 유입돼 자산거품을 만들고, 수출상품의 가격경쟁력을 떨어트리는 등의 악영향을 초래할 수 있다. 양적완화 정책에 대해 선진국이 자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 이웃 국가를 희생양으로 삼는, 이른바 ‘근린 궁핍화’ 정책이라고 비판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현오석 부총리가 지난 4월 주요20개국 재무장관 회의에서 선진국의 양적완화정책에 대해 '근린 궁핍화'를 거론하며 문제 제기를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현재 경제위기에 허덕이고 있는 브라질과 인도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 국가는 선진국에서 유입된 투기성 유동성으로 거품이 만들어졌고, 그 부작용으로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에다 경제성장의 탄력마저 잃은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양적완화축소 움직임이 나타나면서 환율이 급등하는 등 경제가 휘청거리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지난해 '아베노믹스'로 불리는 일본판 양적완화 정책으로 뒤늦게 통화전쟁에 뛰어들었다. 올 초만해도 독일, 영국, 중국 등이 일제히 일본의 엔저 정책을 비난했고,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이웃 나라를 거지로 만드는 정책"이라며 성토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선진국의 용인 아래 일본의 양적완화 정책이 오히려 갈수록 강도를 높이고 있고, 일본 경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우리나라는 가장 민감하게 그 영향권 안에 들어 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일본의 대외 수출물량이 7월부터 증가하기 시작했다. 또 우리 나라와 일본의 상위 100대 수출 품목이 서로 중복되는 숫자도 지난해 49개에서 지난 8월 현재 55개로 6개나 증가했다. 엔화 가치 하락으로 일본 제품의 수출 경쟁력이 살아나고 있다는 의미다.
수출 상위 100대 품목이 우리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54%를 넘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결코 적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에 대한 우리 상품의 수출비중도 떨어지고 있다.
반면, 일본은 자동차, 화학제품 등을 중심으로 수출 회복세가 뚜렷해지고 있다.
하지만, 엔화의 급격한 절하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는 우리 기업들이 일본과 차별화된 경쟁력으로 바탕으로 수출에 선방하며 사상 최대의 경상수지 흑자 행진을 이어가는 등 엔저에 강한 내성을 보여왔다.
그러나, 엔화 급락이 계속돼 100엔당 1000원 아래로 떨어지면 상황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자동차, 전기·전자, 화학업종을 시작으로 충격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서정훈 외환은행 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최근 원화와 엔화의 실효환율이 5년만에 역전됐고, 아베노믹스에 기초한 이 같은 엔저현상은 내년에도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며 "이미 우리 수출 기업의 가격경쟁력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떨어진 엔화 환율이 추가 하락할 경우 자동차, 반도체 업종 등을 중심으로 우리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급격히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물론, 우리 경제는 경상수지 흑자,외환보유액 등이 사상 최대를 기록하는 등 펀드멘탈 면에서 브라질, 인도 등 여타 신흥국과 현격하게 차별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일본의 양적완화 정책으로 우리 경제가 브라질,인도와 같은 경제 위기로까지 연결될 가능성은 낮지만,경기 회복의 발목을 붙잡는 가장 무서운 복병이 될 수 있다는 점도 배제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