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방공식별구역 설정이 동북아 안보지형을 흔들고 있다.
중국이 지난 23일 한국과 일본이 각각 실효지배 중인 이어도와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 열도 상공을 포함하는 방공식별구역을 설정한 지 사흘이 지난 26일 중일 갈등이 심화하는 동시에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밀월관계를 유지해온 한중관계에도 미묘한 파열음이 터져 나오고 있다.
중국은 미국과 일본을 향해 강경한 목소리를 내되 한국에는 '대화'를 강조하며 한국이 미·일의 대중 견제구도에 포섭되는 상황을 막으려 하고 있다. 반면 일본은 아베 정권의 기조대로 중국에 강하게 대응하면서도 이번 사태를 한미일 3각 공조의 복원 기회로 삼으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영공과는 별개 개념인 방공식별구역은 국가안보 목적상 자국 영공으로 접근하는 군용항공기를 조기에 식별하기 위해 설정한 임의의 선을 말한다. 외국 항공기의 영공 침범을 견제하기 위한 전투기 긴급발진(스크램블)의 기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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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이어도까지 방공식별구역 확대 추진
한국 국방부는 제주 마라도 서남쪽 149km에 있는 이어도 상공을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에 포함하는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에 착수했다.
김관진 국방부 장관은 26일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KADIZ에 이어도가 포함되지 않은데 따른 논란과 관련, "한국방공식별구역을 (이어도까지) 연장하는 것을 관계 부처와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군은 내부 검토가 끝나면 이를 토대로 외교통상부와 국토해양부 등 관계부처와 함께 이어도를 KADIZ에 정식으로 포함하는 방안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국방부는 28일 열리는 한·중 국방전략대화를 통해 이런 입장을 중국 측에 전달하고 중국의 성의 있는 조치를 촉구할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는 주변 강대국에 대한 '저자세 외교' 논란을 불식하되, 중국과의 심각한 외교갈등으로 사안이 커지지 않도록 대응 수위를 조절하는 모양새다. 25일 일본은 주일 중국대사를 초치해 항의한 반면 한국 정부는 같은 날 주한 중국대사관 공사참사관을 불러 입장을 전달했다.
◇일본, 미국 끌어들여 대중 견제…"센카쿠 주변에 글로벌호크 투입"
작년 9월 센카쿠 국유화로 중일갈등을 자초한 바 있는 일본은 중국의 이번 조치에 대해 물러서지 않겠다는 태도다.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26일 기자회견에서 일본항공(JAL)과 전일공(ANA) 등 자국 항공사들이 중국이 발표한 방공식별구역을 지나갈 때 비행계획을 중국 당국에 제출하기 시작한 데 대해 "제출할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방공식별구역을 지나는 모든 항공기는 사전에 중국 외교부나 민간 항공국에 비행계획을 통보해야 한다'는 중국 정부의 입장에 따를 필요가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일본은 중국의 조치를 미일공조를 강화하고, 소원해진 한국까지 끌어들여 한미일 3각 공조틀을 회복하는 기회로 활용하려는 태세다.
26일자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미국과 일본 정부는 중국의 방공식별구역 설정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동중국해 상공에서의 감시·정찰 활동을 강화하기로 했다. 특히 현재 활동 중인 자위대의 조기경보기(E2C)에 더해 미군의 무인정찰기인 글로벌호크 등을 동중국해 상공에 집중적으로 투입할 방침이라고 신문은 전했다.
또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무상은 25일 중국의 조치가 "동중국해의 현상을 바꾸는 것이므로 관련 국가도 우려할 사항"이라고 지적한 뒤 "연대해서 중국에 자제하라고 강력히 요구하겠다"며 한국과의 공동전선 구상을 밝혔다.
한편 대만은 미국, 일본 등과 공조해 대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린융러(林永樂) 대만 외교부장(장관)은 25일 입법원(국회)에서 당국 차원에서 미국, 일본 등과 이미 접촉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대일·대미 강공…한국에는 '대화' 강조
문제를 야기한 쪽인 중국은 연일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친강(秦剛) 외교부 대변인은 26일 정례브리핑에서 '민간 항공기가 사전에 비행계획을 알리지 않는 등 중국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으면 중국은 군사력을 동원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상황과 위협 수준에 따라 상응하는 대응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같은 날 나온 중국군 기관지 해방군보(解放軍報)는 중국의 방공식별구역 설정 논란과 관련, "어떤 국가도 중국이 자기의 핵심이익과 정당한 권익을 포기할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들 강경 발언은 주로 센카쿠를 놓고 갈등중인 일본을 겨냥한 것으로 해석됐다.
더불어 중국 외교부는 미국 정부가 중국의 조치를 강력 비판하는 성명을 낸 데 대해 24일 게리 로크 중국주재 미국대사에게 항의한 데 이어 25일 홈페이지를 통해 "중국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어도 문제가 불거진 한국에 대해서는 25일 "중한 양국은 우호적인 근린 국가"라며 "한국과 소통·대화를 강화해 지역의 평화안정을 지켜나가고 싶다(친강 외교부 대변인)"며 문제를 키우고 싶지 않다는 뜻을 밝혔다. 최소한 중국 외교당국은 이 문제를 계기로 한국이 일본·미국의 대중 견제구도에 포섭되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됐다.
◇3각 갈등 향배 주목…중국의 '확전' 여부가 관건
이번 사안으로 인해 중일 대립 구도가 깊어지는 동시에 한중간에도 미묘한 갈등 요인이 생김에 따라 동북아 안보지형에 어느 정도의 파장을 미칠지 주목된다.
일단 한국 정부도 일본, 중국에 이어 이어도를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에 포함하려는 뜻을 밝힘에 따라 한국이 실효적으로 지배하는 이어도를 놓고 한중일이 마찰을 빚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한국 항공기의 이어도 상공 진입에 대응해 중국이 전투기를 긴급발진시키고 중국 전투기가 이어도 상공에 진입했을 때 일본의 전투기가 출격하는 등의 상황이 이론적으로 가능해짐에 따라 동북아 안보 지형은 더욱 불안정해질 가능성이 커진 양상이다.
결국 사태의 향배를 좌우할 키는 중국이 쥐고 있다는 것이 외교 소식통들의 분석이다. 미국까지 반대 입장을 피력한 상황에서 중국이 서해와 남중국해에서도 방공식별구역을 설정하는 등 사태를 확대시킬지, 일본과의 센카쿠 문제에 집중한다는 기조로 확전을 피하려 할지가 관건인 셈이다.
한 외교 소식통은 "중국 군부가 주도한 것으로 보이는 이번 조치에 대해 외교적 파장을 우려하는 중국 외교부 등의 견제가 작동할지 여부가 사태의 향배에 변수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