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내용과 관련이 없는 자료사진입니다
"그때의 공포와 수치심이 아직까지 생생한데 증거가 없어서 처벌을 못한다니요".
자주 가던 병원에서 의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뒤 3개월 넘게 경찰과 검찰을 오가고 있다는 A씨가 던진 물음이다.
A씨는 약 3개월 전 "병원 원장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며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하지만 가해자로 지목된 원장은 '증거 없음'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이 사건은 결국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됐다. A씨는 현재 해당 병원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 병원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부들부들 떨며 지난 100여일 간의 사건을 떠올린 A씨. 그녀의 주장은 이랬다.
A씨는 지난 8월 5일 위가 아파 병원을 찾았다. 전 남편의 후배가 운영하는 곳으로 수년 전부터 자신은 물론, 자녀가 아플 때마다 자주 가던 내과였다.
병원 접수대에서 간호사에게 "위가 아프다"고 말한 A씨는 다짜고짜 수면내시경실로 옮겨졌다. 의사 면담은커녕,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수면내시경 동의서조차 쓰질 않았다.
이동형 침대 위에 잠들어 있던 A씨는 누군가 흔들어 깨우는 통에 눈을 떴다. 면담조차 하지 않았던 병원 원장이었다.
보통 수면내시경 이후엔 간호사 안내로 대기실에 있다가 원장이 부르면 진료실로 이동하게 마련인데, 이날 원장은 A씨를 직접 깨워 진료실에 가자고 했다.
원장은 "아직 마취가 안 깨 몽롱하다"는 A씨를 억지로 일으켜 세운 뒤, 안고가다시피 부축해 진료실로 데려갔다.
진료실에 도착하자 원장은 느닷없이 "초음파 검사를 하자"고 수차례 권했다. 약 기운에도 A씨는 이를 재차 거절했지만, 계속된 권유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초음파를 받게 됐다.
의사와 단 둘이 초음파 검사실에 있게 된 A씨는 이후 상황을 다음처럼 기억했다.
"원장이 초음파 젤을 바르고 검사를 하는 척하더니 자신의 팔꿈치로 내 음부를 자극하고 본인의 성기에 내 손을 가져다 놓았다".
"마취 때문에 저항을 제대로 못하자 급기야 내 속옷을 벗기고 젤이 범벅된 초음파기계로 음부를 문질렀다".
"또 다시 젤을 두 손에 바른 다음 가슴을 만졌고, 손가락으로 음부를 성추행하기 시작했다".
A씨는 회상하는 내내 고통스러워했다. 당시 강하게 거부하자 원장이 "병원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너무 예뻤다, 한 번 해보고 싶었다"며 강제로 입을 맞췄다고도 했다.
"원장님이 돈은 받지 말라 한다"는 간호사의 말을 뿌리치고 모든 비용을 다 지불한 A씨는 곧바로 경찰서로 향했다.
A씨는 "경찰 수사가 진행되자 원장은 자신의 선후배를 시켜 돈 700만 원을 건네 합의를 종용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 국과수 '양성' 반응…"증거론 불충분" 경찰 '무혐의'
A씨는 경찰 수사에 최선을 다해 임했다. 국립과학수사원에 맡긴 A 씨의 속옷에서도 초음파 젤 성분인 글리세린이 검출됐다.
하지만 경찰은 '혐의 없음'으로 결론을 내렸다. 경찰 관계자는 "A 씨의 속옷에서 젤 성분이 나오기는 했지만 속옷 매듭이나 실밥 부분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배 부분에 젤을 바르면 속옷 끝에 묻을 수 있는데 이를 보고 성추행으로 단정짓긴 무리"란 것이다.
경찰은 또 "사건 당일 원스톱센터에서, A씨의 음부에서 면봉으로 채취한 가검물을 국과수에 의뢰했는데 젤 성분이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A씨는 "사건 당시 초음파 검사실에서 몸에 묻은 젤을 손수건으로 닦은 뒤에 속옷을 입었다"며 "게다가 이 속옷은 사건 발생 한 달 뒤에야 여성단체의 도움으로 제출했다"고 말했다.
A 씨는 특히 "젤은 피부에 흡수될 수도 있는데 경찰은 단지 몸에서 채취한 면봉만 국과수에 의뢰했다"면서 "가장 강력한 증거물이 될 수 있는 속옷은 제출하라는 얘기조차 하지 않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경찰은 이에 대해 "몸에서 채취한 면봉에서 젤 성분이 나오지 않았는데 이보다 강력한 증거가 어딨느냐"면서 "굳이 속옷까지 국과수에 의뢰할 필요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경찰은 다만 "A씨의 진술이 일관되고 실제로 억울해보이기도 하지만 증거가 부족하다"며 "원장은 계속 '진료 행위'였다며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경찰 관계자는 "우리도 증거가 있어야 기소의견으로 넘기는데 의사의 진술을 깨뜨릴 만한 증거가 없다"고 덧붙였다.
◈ "원장에게 성폭행 당해" 또다른 피해 여성
경찰 수사결과 '원장 무혐의'로 나오자, A씨는 분한 마음에 병원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던 중 충격적인 사실을 접하게 됐다.
같은 병원, 같은 원장에게 당했다는 또다른 여성이 A 씨를 찾아온 것.
자신을 40대라고 밝힌 B씨는 "4년 전 초음파 검사실에서 성폭행을 당했다"며 "그 이후로 정신적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아직까지도 우울증에 시달리며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있다"고 했다.
B씨가 전한 상황은 A씨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위가 아프다고 하자 원장이 초음파를 보자며 검사실로 데려왔고, 진료하는 척 하면서 '당신이 너무 예쁘다'며 몸을 제압하고 소리도 못 지르게 하면서 성폭행을 했다".
"발버둥치며 저항을 하자 그제서야 원장은 정신이 들었는지 몸을 추스르더니 내 외투에 무언가를 넣어줬다. 꺼내보니 돈 5만원이었다. 그 돈으로 초음파 비용 계산하라더라".
B씨는 "증인도 증거도 없고, 독신인 탓에 신고해봤자 나만 바보가 될 게 뻔해서 차마 경찰서도 못 갔다"고 했다.
◈ 원장 "진료행위였을 뿐…명예훼손 고소할 것"
두 여성의 성추행 주장에 대해 해당 병원장은 "나야말로 억울하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아프다고 하길래 의사로서 했던 진료 행위였을 뿐"이란 것이다.
원장은 다만 "수면내시경 하기 전에 의사가 환자를 먼저 만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며 "동의서를 작성하지 않은 것도 절차상 잘못인 건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그는 초음파 검사를 한 이유에 대해선 "지난해 A씨 남편의 모친상에 못 가서 사과의 표시로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보통 조의금을 10만원은 하는데 수면내시경 해봤자 3만원밖에 안하기 때문에 부조하는 셈 치고 초음파 검사를 해줬다"는 것이다.
초음파 검사 부위에 대해서는 "배뿐만 아니라 꼬리뼈 쪽을 함께 검사하기는 했다"고 말했다. A씨가 아랫배 난소에 혹도 있고 꼬리뼈 쪽도 아프다고 해서 "항문에 농양이 있나 보려고 했다"는 것이다.
원장은 "A씨가 병원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바람에 범죄자 취급을 당하고 있고 영업에도 방해된다"며 "검찰 수사가 끝나는대로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 시민단체 "내과에서 항문 농양 검사? 황당!"
시민단체들은 "성추행은 증거를 입증하기가 어려워 문제를 제기해도 피해자만 계속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특히 A씨와 B씨의 경우 밀실 공간인 진료실에서 의사와 단 둘이 있다 발생했기 때문에, 증인도 없고 CCTV도 없어 진실을 밝히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강태언 의료소비자시민연대 사무총장은 다만 "수면내시경 전에는 의사 면담은 물론 사전 동의서를 받게 돼있다"면서 "설명의무위반으로 법적 소송까지 갈 수 있는 사항"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내과에서, 그것도 위가 아파 병원을 찾은 환자에게 항문 농양을 보겠다며 꼬리뼈 초음파 검사를 했다는 의사의 진술도 거짓에 가깝다는 입장이다. "내과에서 항문을 왜 보냐"는 것이다.
강 사무총장은 이어 "또다른 피해자가 나타났다는 것은 의미가 남다르다"며 "검찰이 단순히 경찰 조서만 보고 무혐의로 사건을 종결짓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